역사63 소련의 북한 침공 작전 - 반달 작전 1969년, 중국과 소련 사이에 중-소 국경분쟁이 일어나면서 공산권은 친중파와 친소파로 갈라졌다. 북한은 노골적으로 누구 편을 들지 않으면서 '주체'니 '자주'니 하는 말을 들어 공산권 사이에 일종의 중립을 표방했지만, 중립국이라고 해서 정말 50%-50% 중립을 지킬 순 없었다. 이에 북한은 기존의 공산주의 이론을 조금씩 수정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을 조금이나마 도입했던 소련보다는 중국에 더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친소파 공산국가들과도 잘 지냈다. 근데 정작 중국과 소련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없이 소극적이기만 했다. 뭐 사실 브레즈네프는 그렇게까지 화난 건 아니었고, 언젠가 북한이 중국하고 더불어 자신들의 뒤통수를 때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놓고 북한에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사실 .. 역사 2021. 4. 7. 더보기 ›› 히틀러의 10가지 선동기술 독일이라고 하면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국민이라는 이미지이다. 그래서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선동되어 세계적인 범죄인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집시 등의 대량학살을 저지른 것은 미스터리였고 종전 후 미국과 소련은 히틀러와 나치의 선전선동 기술을 연구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세뇌(brain washing)에 대한 연구도 이뤄지게 되었다. 독일인들이 자신들이 히틀러에게 선동되었다고 믿는 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죄과를 참회하게 되었다면 일본인들은 오랜 기간 권력에 순응하고 살아왔다는 점에서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히틀러가 어떻게 대중을 선동하였는가 알아보도록 하자. 1. 히틀러는 대중을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란 그의 저서에서 "대중의 수용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며.. 역사 2021. 3. 25. 더보기 ›› 나치의 비행선 힌덴부르크호 폭발 이 힌덴부르크호는 1936년 3월 4일 첫 시범 비행을 시작하였고 그해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였을 때 점령지 상공을 비행하며 나치를 선전하는 전단을 살포하는데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후 총 65회를 비행하였고, 당시로서는 초장거리였던 대서양 횡단 비행 횟수만 35회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LZ-130 그라프 체펠린이라고 하는 자매 비행선도 있었다. 어쨌든 힌덴버그에서 뿌리던 전단은 아래와 같다. 내용은 "나는 독일인들이 내 이상을 수용하도록 14년 동안 투쟁하였다. 그리하여, 나에 대한 신뢰를 보내는 것에 감사한다. 나는 영예로운 육군 대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 의해 소집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영광스러운 국가와 정신적으로 불가분 하게 엮인 국민들에게 내 모든 에너지를 바쳤다. 한 사람으.. 역사 2021. 3. 23. 더보기 ›› 베를린 공수작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나치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4개로 분할해서 점령 통치했다. 다시는 통일된 독일이 전쟁 못 일으키도록 옛날 30년 전쟁 시절처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자 했다. 이렇게 4개국이 비슷비슷하게 나눠먹었는데, 문제는 베를린과 미국-소련의 대립부터 시작되었다. 보면 알겠지만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소련의 점령지 한가운데 있었다. 소련은 당연히 베를린 소련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미국-영국은 반발했다. 한나라의 수도인 만큼 그 상징성은 말 안 해도 대단한 거고 당연히 미국-영국-프랑스 모두 베를린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소련은 괜히 3개국 심기를 건드리는 거보다 한발 양보해서 결국 베를린도 4개국이 나눠먹게 되었다. 근데 문제는 미국-영국-프랑스가 한편을 먹고 소련을 왕따 시.. 역사 2021. 3. 21. 더보기 ››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의 개막 - 3 러시아에 비하면 미국의 인적, 경제적 희생은 극히 적었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미국인은 50만 명이 채 안되지만, 러시아인 사망자는 무려 2000만 명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실질임금은 5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무려 60퍼센트나 떨어졌다. 제강은 33퍼센트, 선철은 41퍼센트, 트랙터는 76퍼센트나 생산량이 줄었다. 반면 미국인들은 전쟁으로 부유해졌으며, 가처분 소득은 40퍼센트나 높아졌다. 1945년 미국은 소련보다 12배나 많은 석유를 생산했고, 전기와 제철 생산량도 6배나 많았다. 레오 질라드는 헝가리 출신이며, 1933년부터 핵 연쇄반응의 가능성을 연구했다. 그는 핵무기 군비경쟁의 위험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원자력 정책에 대해 대통령에게 조언할 과학자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 역사 2021. 3. 19. 더보기 ››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의 개막 - 2 3월 말, 스탈린은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들을 만나 자기 의사를 밝혔다. "독일 놈들과 싸울 것이고, 끝까지 그럴 겁니다. 하지만 동맹국들이 독일을 살려주고 그들과 뒷거래를 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독일 놈들은 가차 없이 대하지만, 동맹국들은 애들 다루듯 합니다." 서방연합군이 소련군보다 먼저 베를린에 도달하기 위해 내달릴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스탈린은 가장 큰 전리품을 빼앗기지 않기로 했다. 3월 29일, 야전군 지휘관인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와 이반 코네프 원수에게 모스크바로 날아와 제3 제국 수도를 함락시키는 계획을 짜라고 명령했다. 이틀 뒤인 4월 2일, 스탈린은 휘하 지휘관들을 모아 베를린에 대한 최후 공세에 협의했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를 앞서 불려 설명하.. 역사 2021. 3. 18. 더보기 ››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의 개막 - 1 "미국의 주요 수단은 자유고, 러시아의 주요 수단은 예속이다. 두 나라는 시작점이 다르고 과정도 다르지만, 세상의 절반의 운명을 뒤흔들려는 '하늘의 뜻'으로 나타낼 것이다" - 마이클 돕스 (워싱턴포스트 기자) - 1943~1944년 히틀러는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와 싸우기 위래 180~190개 사단을 투입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서방 연합군과 싸우는 독일군 병력은 40~50개 사단에 불과했고 이탈리아에는 15~20개 사단이 고작이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도 이런 상황은 변하지는 않았다. 소련군의 희생이 늘거나 줄면 미군의 희생은 그와 반비례했다. 러시아인이 더 많이 죽을수록 미국인은 덜 죽었다. 스탈린은 저택 1층 스타프카에 들러 군사고문들과 회의를 했다. 스탈린은 지난주 내내 베를.. 역사 2021. 3. 15. 더보기 ›› 최고 북방군의 수장, 이괄의 난 - 4 이괄이 한양으로 입성하자, 한양에 남아있던 하급 관리들은 관복을 차려입고 나와 영접했다. 한양 주민 일부는 길을 닦고 황토를 뿌려 이괄의 군대를 환영했다. 그리고 이괄이 한양으로 왔던 흥안군(선조의 10번째 아들)을 새 왕으로 옹립하니, 조선 천하에 2명의 왕이 양립한 것이었다. 이괄은 자신이 옹립한 새 왕인 흥안군의 이름으로 한양 인근 고을에 선전관을 파견했다. 한양 인근 고을은 크게 혼란에 빠졌으며, 때마침 인조가 보낸 선전관도 한양 고을에 도착하였다. '한양은 역적에게 넘어갔다. 한양에서 오는 선전관은 모두 목을 베어라!' 인조는 있는 힘을 다해 충청도 경계로 들어갔으며, 이때 충청병사 이완(이순신 장군의 조카)이 인조를 맞이하였다. '전하께오서 역적 무리의 화를 당하셔 이리 고초를 겪으시니... .. 역사 2021. 3. 9. 더보기 ›› 최고 북방군의 수장, 이괄의 난 - 3 이괄이 이끈 반란군은 순식간에 대동강을 넘어 황해도로 진입했으며, 정충신과의 황주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괄의 군대는 예성강 방어선을 뚫기 위해 계속 전진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황주 전투에서 패전했던 정충신이 추격하고 있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정충신은 이괄을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 정충신이 아닌, 이중로를 주목해보자! 내가 첨부한 위 지도를 보면, 이중로의 군대는 예성강 방어선에 주둔하고 있다. 이중로는 조총에 관심이 많아 직접 사격술을 배웠다고 하며, 인조반정 때에는 인조를 도와 3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때 이중로는 예성강 방어의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그가 거느린 황해도 관군은 급히 동원되었기에 군사의 질이 매우 떨어졌다. 게다가 이중로는 예성강 방어에 부임하기 .. 역사 2021. 3. 7. 더보기 ›› 최고 북방군의 수장, 이괄의 난 - 2 1624년(인조 2) 1월 24일, 조선을 지켜야 할 최정예 북방군 13,000여 명은 이괄의 지휘 하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괄은 국경에 오래 일했었기에 국경 지역의 지리와 관군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괄 자신은 뛰어난 무장이었으며, 그 휘하의 북방군은 누차 언급했지만 조선의 최정예군이었다. 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괄의 본영이 위치한 영변 지역은 한양과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영변과 한양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인위적(성, 요새) · 자연적(대동, 예성, 임진강) 장애물이 있었다. 특히 평양성에는 도원수 장만이 5,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으며, 평양성은 인조 때 대대적인 보수로 인해 강력한 요새가 되었다. 따라서 이괄은 피해를 최소화하고 단기전으로 끝내기 위해서 주요 .. 역사 2021. 3. 5. 더보기 ›› 이전 1 2 3 4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