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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10가지 선동기술

|||||||||||||| 2021. 3. 25.

독일이라고 하면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국민이라는 이미지이다. 그래서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선동되어 세계적인 범죄인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집시 등의 대량학살을 저지른 것은 미스터리였고 종전 후 미국과 소련은 히틀러와 나치의 선전선동 기술을 연구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세뇌(brain washing)에 대한 연구도 이뤄지게 되었다.

독일인들이 자신들이 히틀러에게 선동되었다고 믿는 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죄과를 참회하게 되었다면 일본인들은 오랜 기간 권력에 순응하고 살아왔다는 점에서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히틀러가 어떻게 대중을 선동하였는가 알아보도록 하자.

1. 히틀러는 대중을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란 그의 저서에서 "대중의 수용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며, 그 이해력 또한 미약하다"라고 말했다. 히틀러에게 대중은 그저 자신에게 권력을 가져다줄 선동의 대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미약한 사고능력으로 인해 자신들을 들뜨게 만드는 그 선동이 거짓임을 알지 못했다. 이게 히틀러가 보여준 패러독스이다.

2. SA친위돌격대의 조직

히틀러가 나차당의 지도자가 된 뒤로 무장 폭력단을 조직해서 반대파들을 제어했다. 

3. 반란사건을 영웅적인 사건으로 미화

1923년 히틀러는 뮌헨을 무력으로 장악하기 위해 루덴도르프 장군과 협약을 맺는다. 그런데 경찰이 발포를 시작하자, 히틀러는 일착으로 도망가고 루덴도르프 장군만 죽어라 싸우다가 패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감옥에 잡혀 갔다.

그런데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시작하면 뮌헨 반란사건에서 죽은 나치 16명은 영웅적인 희생자로 거국적으로 추모되기 시작했다. 역사는 권력자의 편에서 서술되는 법이니까.

4. 법정투쟁을 선전에 이용하기

히틀러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강력한 선전전을 펼치는데 이때 발언들이 대중에게 큰 공감을 주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영향력을 한차례 격상시킨 계기가 되었고, 5년의 수형기간 중 '나의 투쟁'이란 책을 저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차 대전이 종결된 이후 전범재판에서 괴링은 이를 떠올리고 법정을 강력한 선전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장관들의 군기를 잡았다. 연합군 측은 매우 초조했는데, 군수 장관을 했던 인물이 나치의 잘못을 시인하고 나섬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5. 경제적 위기를 권력 장악의 시기로 삼는다.

1차 대전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도 극복하고 세계 경제의 호황으로 독일 경제도 안정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독일에 투자가 중단되자 독일도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독일 국민들은 이때 '어째 이런 일이 또다시...' 하며 망연자실하게 되었다.

600만 명이 실업자가 되어 고통스러워할 때에 히틀러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내 인생에서 요즘처럼 기뻤던 적은 없다!"

선동이 효과를 발휘하고 가난은 혁명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낙심천만하고 실업자가 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선동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고, 공산주의자들이 설치는 것에 위협감을 느낀 자본가들은 나치의 SA무장조직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다고 자금을 대기 시작했다. 대공황의 시기에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연설로 높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6. 국수주의

히틀러는 매우 국수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독일 국민들이 자신감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베르사유조약을 폐기하겠다, 아리안족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다 이런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독일 국민들은 자신감을 고취시켜주는 이런 발언에 열광하게 되고. 덕분에 유대인들이 희생양으로 선정되었다. 나치의 선전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독일 국민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는 점도 있다.

1차 세계대전에 패전 후 수립된 정부에 대해 연합국에 의해 만들어진 허수아비 정권이란 인식이 있었고, 이것은 독일 각계각층이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도덕적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7. 열사 만들기

SA돌격대의 호르스트 베셀이란 청년은 SA에서 부를 노래의 가사를 지은 적이 있는데, 어느 날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선동의 대가 괴벨스는 베셀의 장례식을 영웅적 순교자의 장으로 치렀다. 거대한 순교자 만들기 선적극이다. 베셀의 노래는 독일의 제2국가가 된다.

8. 기업가와의 친분

히틀러는 기업가들의 자금으로 그들의 선전선동 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업가들과 상류층의 부패를 척결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면서 대중의 호감을 얻기도 했다. 

1932년 뒤셀도르프 기업가 모임에서 히틀러는 엄청난 액수의 기부를 받게 되고, 친나치 기자들의 대대적인 선전이 이뤄졌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패했다. 그러지만 브뤼닝 수상을 사임을 강요할 수 있을 정도로 나치의 세력은 커지게 되었다.

이런 선전에 힘입어 히틀러의 나치는 기업가와 자본자의 지원과 중산층의 지원과 가난한 실업자들이 나치의 지지자가 되었고, 히틀러는 선거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1933년에는 독일의 수상으로 취임하게 된다. 거짓과 선동에 중점을 둔 선동 프로그램이 만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제3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된 최초의 선동은 무덤에서였다.

"언젠가 이 무덤에서 독일 전체를 밝혀줄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10. 신문과 라디오의 장악

히틀러가 권력을 갖게 된 후 괴벨스는 곧 신문과 라디오를 완전 통제하게 된다. 독일 국민들은 나치가 원하는 정보만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된 것이고, 그렇게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체로 전락해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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