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의 개막 - 3
러시아에 비하면 미국의 인적, 경제적 희생은 극히 적었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미국인은 50만 명이 채 안되지만, 러시아인 사망자는 무려 2000만 명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실질임금은 5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무려 60퍼센트나 떨어졌다. 제강은 33퍼센트, 선철은 41퍼센트, 트랙터는 76퍼센트나 생산량이 줄었다. 반면 미국인들은 전쟁으로 부유해졌으며, 가처분 소득은 40퍼센트나 높아졌다. 1945년 미국은 소련보다 12배나 많은 석유를 생산했고, 전기와 제철 생산량도 6배나 많았다.
레오 질라드는 헝가리 출신이며, 1933년부터 핵 연쇄반응의 가능성을 연구했다. 그는 핵무기 군비경쟁의 위험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원자력 정책에 대해 대통령에게 조언할 과학자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미국과 소련 간 핵군비 경쟁이 주는 위험은 조국이 소련 점령하에 놓이는 운명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실정치와 이론물리학의 세계였다. 고농도 우라늄은 드물고, 당시 알려진 최대 우라늄 매장지는 벨기에령 콩고로
미국과 영국의 통제하에 있었다. 반면 러시아인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량의 고농도 우라늄 원광을 얻을 수 있었다.
스팀슨은 이 기술적 진보를 다른 나라, 특히 소련과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철저한 주고받기식, 즉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투명한 사찰도 가능한 운영 체제를 먼저 수립해야 했다. 폴란드계 프랑스인 화학자 마리 쿼리는 방사능의 기본 원리를 발견했다. 독일 태생 유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핵물리학의 기초를 제공한 상대성 이론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인 엔리코 페르미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질라드가 앞서 연구한 연쇄반응을 다듬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오토 프리슈는 우라늄의 원자핵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설명하면서 '핵분열'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덴마크인 닐스 보어는 우라늄 동위원소 U-235가 원자폭탄의 기초가 되는 것을 설명했다.
핵무기 경쟁의 초기 선두주자는 제3제국이었다. 독일은 전쟁 초반에 벨기에의 광산 업체 위니옹 미니에르가 콩고에서 추출한 고농도 우라늄 재고 전부를 장악했다.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중수를 감속재로 사용하는 독일인들이 우라늄 장치라 부르던 원자로를 열심히 개발했다. 독일의 원자력 계획은 과학자들의 내분과, 핵무기 완성을 믿지 않은 나치 고위 당국자의 무관심으로 그 잠재력을 잃었다. 그런데도 필요한 모든 요소는 독일에 있었으며, 미군과 소련군 사이의 무인지대에 끼어있었다. 미군 장군인 그로브스는 독일의 원자력 연구 성과를 긁어모아야 한다는 일념에 알소스라는 암호명의 정보 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보리스 패시가 이끌었다. 신학생이었던 그는 미군 대령이 되고 독일 과학자와 원자폭탄 관련 물자들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4년 후반 스트라스크부르의 버려진 독일 물리학연구소에서 문서가 대량 발견되자 패시와 그의 부하들은 현장으로 달려갔다.
알소스팀의 조사 목록 상위에 있던 것 중 하나는 우라늄 광석을 금속으로 정련하는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오라니엔 부르크의 아우어 화학공장이었다. 소련에게 우라늄이 먼저 들어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3월 15일 오후, 미 제8공군은 중폭격기 1347대와 호위 전투기 762대를 출격시켜 아우어 화학공장과 주변 철도조차장 폭격에 나섰다. 폭탄 1784톤과 소이탄 세례를 쏟아부았다.
4월 17일 알소스팀은 슈타스푸르트 인근 소금광산에서 우라늄 원광 1100톤을 발견했다. 그 뒤 3일 밤낮 동안 우라늄 2만 통이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영국군 점령 지역에 있는 하노버 공항 격납고에 입고됐고, 배와 항공기로 영국에 옮겨졌다.
패시는 물리학자들이 슈투트가르트 남쪽 슈바벤 알프스 지역의 마을인 하이겔로흐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4월 22일 하이겔로흐에 도착한 패시는 폭 3미터짜리 콘크리트 구덩이를 발견했다. 구덩이 가운데에는 두꺼운 금속 원통이 있었다. 그 안에는 항아리처럼 생긴, 중금속으로 만든 용기가 들어있었는데, 지면보다 대략 1.2미터 아래에 놓여있었다. 독일의 '우라늄 장치'를 찾은 것이다
전쟁부장관이 중요 사안이 있다며 트루먼 대통령에게 면담 요청했다. 헨리 스팀슨은 당일 새벽 5시 30분 뉴 멕시코 주의 사막에서 실시된 최초의 핵실험 결과를 직접 보고하기를 원했다. 오후 7시 30분, 워싱턴에서 전보가 도착하자 스팀슨은 곧바로 대통령에게 들고 갔다. 이 전보는 보험회사 중역이자 이 당시 스팀슨의 맨해튼 프로젝트 특별보좌관으로 일한 조지 해리슨이 서명한 것이었다.
7월 18일 수요일에 스팀슨은 백악관으로 달려갔다. 뉴멕시코 주 알라모고르도에서 폭발 실험을 한 플루토늄 폭탄이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7월 16일 실험된 원자폭탄의 폭발 섬광은 거의 400킬로미터 밖에도 목격됐다. 폭발의 굉음은 80킬로미터 밖이었다. 트루먼은 취임 100일 만에 가장 무시무시한 폭탄을 통제하게 되었다. 처칠은 신무기가 러시아인들과의 균형을 재정립하고 회담에서 외교적 균형 상태를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확신했다. 냉전 초반의 분수령이라 할 사실상 모든 사건들, 즉 루스벨트 사망, 반히틀러 동맹의 분열, 유럽의 정치적 대립구도에 따른 분단 같은 사건들은 1945년 2월에서 8월 사이에 벌어졌다. 얄타회담에서 3거두 (스탈린, 처칠, 루스벨트)가 '잠정적 영토 배치'라고 생각하고 그었던 경계선은 냉전 분단선으로 바뀐다.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포츠담과 바벨스베르크 사이를 20분간 오갈 때마다 통과했던 하펠강 위의 글리니케 다리는 냉전기에 스파이 교환의 무대였다.
국무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UN 회의를 거창하게 개최하기로 했다. 미국 대중 여론은 추상적이고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얄타회담 선언문에 반대했다. UN 창설회의는 4월 25일 개최됐다. 46개 국기가 현대적인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하우스의 무대를 장식했다. 각 깃발들 사이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약속한 4대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빈곤의 자유, 공포의 자유를 뜻하는 금빛 기둥 4개가 높여져 있었다. 오후 4시 30분에 국무부 장관 스테티너스가 UN 사무총장 대행을 맡은 앨저 히스를 대동하고 무대에 올랐다. 스테티너스는 회의를 시작하면서 명상의 시간을 요청했다.
그러고는 트루먼에게 백악관에서 라디오로 각국 사절들에게 연설해달라고 요청했다.
'여러분의 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 훨씬 나은 세계, 즉 인간의 영원한 존엄성이 존중받는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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