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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공수작전

|||||||||||||| 2021. 3. 21.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나치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4개로 분할해서 점령 통치했다. 다시는 통일된 독일이 전쟁 못 일으키도록 옛날 30년 전쟁 시절처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자 했다.

이렇게 4개국이 비슷비슷하게 나눠먹었는데, 문제는 베를린과 미국-소련의 대립부터 시작되었다. 보면 알겠지만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소련의 점령지 한가운데 있었다. 소련은 당연히 베를린 소련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미국-영국은 반발했다. 한나라의 수도인 만큼 그 상징성은 말 안 해도 대단한 거고 당연히 미국-영국-프랑스 모두 베를린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소련은 괜히 3개국 심기를 건드리는 거보다 한발 양보해서 결국 베를린도 4개국이 나눠먹게 되었다. 근데 문제는 미국-영국-프랑스가 한편을 먹고 소련을 왕따 시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쪽 심기를 건드린 가장 큰 이유는 소련이 동유럽을 전부 공산화시키면서 소련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걸 불쾌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보자 보자 하니까 공산화의 물결이 독일도 넘어설 것 같아 보였다. 결국 미국 뒤에 숨은 프랑스-영국은 미국의 주도하에, 3개국의 점령지를 통합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되자 가뜩이나 베를린 마저 빼앗겨서 기분이 찜찜한 소련은 3개국 점령지가 합쳐지면 4분의 1밖에 안 되는 자신의 점령지로는 상대하기 벅차다고 생각하고 점령지 공동통치 위원회 탈퇴해버리고 자신의 점령지에 멋대로 동독을 새워버린다.

당연히 나머지 지방은 연합군의 주도하에 본을 수도로 하는 서독이 탄생한다. 이렇게 되자 베를린의 입장이 묘해진 거다. 공산권 한가운데에 있는 자유의 도시가 돼버린 서베를린으로 수많은 공산권 인구가 탈출을 감행한 거다. 이러한 상황이 맘에 들지 않은 소련의 스탈린이 최대한 온건한 방법으로 미국을 엿 먹이기로 작정한다.

1948년 6월 18일 소련의 주도하에 서베를린 봉쇄가 시작된다.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가 봉쇄되었고, 뒤이어 21일에는 서베를린 주둔 미군의 보급 열차까지 강제로 회선 시켜버렸다. 게다가 24일에는 동독에서 보내주는 전기마저 끊어버린다. 당장 서베를린은 고립되어버린 섬처럼 되어 버렸다. 당시 소련군은 핵 개발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여서 이런 식으로 나가면 전쟁은 안 일어나지만 이 긴장감으로 서방세계가 서베를린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재래식 전력이지만 50만에 달하는 소련군을 서베를린 봉쇄에 동원한 것도 이러한 계산하에 움직인 거였다.

당장 인구 200만에 달하는 서베를린은 이제 쫄쫄 굶게 생겼다. 36일 치의 식량과 45일 치의 연료밖에 비축 못했던 서베를린 입장으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한편 서방세계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서베를린 봉쇄를 풀려면 전쟁을 일으켜야 했는데, 이미 미국 영국 모두 2차 세계대전 때 동원한 가공할 병력을 감축해서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소련군보다 한참 아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어떻게 해볼 생각도 못 했고 다들 미국만 바라보았다.

미국도 그렇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결국 백악관에서 지루한 토론 끝에 베를린에 공중수송으로 대규모 물자를 보급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합참의장 오마르 브래들리도 공중수송으로 베를린을 먹여 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그냥 서베를린에서 철수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진언했다. 그리고 이게 당시에는 합리적인 결정 같아 보였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베를린에 공중수송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서베를린을 유지하려면 하루에 3600톤의 물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대부분 베를린을 포기하자고 졸라댔지만 이 트루먼은 공군에 당장 모든 수송기를 동원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당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의 사령관은 트루먼이랑 죽이 잘 맞는 미치광이 커티스 르메이였다.

커티스 르메이
C-54 수송기

작전 개시 첫날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작은 C-47 수송기로 수송했던 물자는 겨우 82톤밖에 되지 않았다. 3600톤이 필요한 도시에 이렇게 적은 물자를 나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인지라 반대로는 거세졌다. 그러나 르메이의 요구를 백악관이 전격 수용하고, 미국이 작정하고 공수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작전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나자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수송기는 1000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퇴역한 조종사들 전부 불러 모으고, 서독과 서베를린 지방에서 옛날 나치 독일 시절 공군 정비사를 했던 인원까지 끌어모으며 인력을 확충해서 수송기의 작전을 도우기 시작했다. 7월 초가 되자 하루 수송량이 82톤에서 800톤으로 늘어나고 8월이 되자 1000톤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번 제대로 가속이 붙자 그 이후로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1949년 새해가 되자 1월에는 17만 톤, 2월에는 15만 톤, 3월에는 20만 톤에 가까운 물자가 서베를린으로 수송되었다. 이게 어느 정도 수치냐 하면 하루 평균 5800톤이었다. 3600톤이 필요한 도시에 5800톤의 물자를 때려 박고 있었던 것이다. 남는 물자는 당연히 비축이 가능했던 거고 소련은 어이를 상실했다. 당연히 굶어 죽을 줄 알았던 서베를린이 미국의 물량으로 되살아나고 있던 것이었다. 수송기를 격추한다면 소련과 미국 둘 다 끔찍하게 싫어하는 전면전이나 다름없었으니, 소련은 도저히 수송기를 건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편 미국은 소련을 무시하면서 계속 물자를 서베를린에 쏟아부었다. 처음에는 꼭 필요한 물자만 수송했지만 이 시기가 되면서 어린이들을 위한 사탕만 수송하는 수송기라던가, 기호품인 담배만 수송하는 수송기, 심지어는 커피나 콜라만 수송하는 수송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도 성에 안 찼는지 미국은 4월 기독교계의 큰 축일인 부활절 날 단 하루 동안 소련 보라고 성대한 이벤트를 벌였는데, 무려 하루에 13000톤의 물자를 쏟아버리는 이벤트를 벌였다. 소련은 어이가 날아가 버렸다. 더 이상의 봉쇄는 무의미했고, 오히려 미국의 각종 선전공작에 공산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공산권은 각종 물자가 부족해서 식량도 미국에서 사다 먹는 실정이었는데, 조그마한 도시 지키겠다고, 물자 풍족하게 쓰는 거 보면 언제 어디서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1949년 5월 소련은 봉쇄를 풀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선전 효과도 대단하고, 소련이 언제 다시 봉쇄할지 몰라서 작전을 계속했다. 5달이나 더 지속하다가 미국도 소련이 더 이상 봉쇄를 안 하는 것을 확인하고 10월 1일 베를린 공수작전을 종료했다.

서베를린을 포기시키겠다는 소련의 야심은 대실패로 끝나버렸다. 오히려 역효과로 전 세계에 미국의 가공할 경제력과 동원력을 각인시켜버렸다. 실제로 소련이 어찌저찌 나중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울 수 있던 것도 핵무기 때문이었다. 한편 미국도 이 작전으로 자신감을 되찾았다. 소련에게 미국의 강력함을 어필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이는 결국 나중에 트루먼이 재선에 성공하고 미국 내에서도 대 소련 강경파들이 득세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작전 전까지는 소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 작전 이후로 소련을 얕잡아 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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