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의 개막 - 2

|||||||||||||| 2021. 3. 18.

3월 말, 스탈린은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들을 만나 자기 의사를 밝혔다. 

"독일 놈들과 싸울 것이고, 끝까지 그럴 겁니다. 하지만 동맹국들이 독일을 살려주고 그들과 뒷거래를 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독일 놈들은 가차 없이 대하지만, 동맹국들은 애들 다루듯 합니다."

서방연합군이 소련군보다 먼저 베를린에 도달하기 위해 내달릴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스탈린은 가장 큰 전리품을 빼앗기지 않기로 했다. 

3월 29일, 야전군 지휘관인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와 이반 코네프 원수에게 모스크바로 날아와 제3 제국 수도를 함락시키는 계획을 짜라고 명령했다. 이틀 뒤인 4월 2일, 스탈린은 휘하 지휘관들을 모아 베를린에 대한 최후 공세에 협의했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를 앞서 불려 설명하면서 휘하 장군들 사이에 '베를린 정복자' 타이틀로 장식하려는 경쟁구도를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두 개의 예비군을 코네프에게 넘겼다. 병력 250만 명과 항공기 7500대, 전차 6250대, 야포 4만 1600문을 마지막 공세에 배정되었다.

코체뷰 중위는 21살의 텍사스 주 휴스턴의 군인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와 의붓아버지 모두 정규군 대령이었다. 1942년 11월 육군에 지원한 뒤 노르망디부터 독일 중심부에 이르기까지 전투를 치르면서 뛰어난 소대장으로 평가받았다. 휘하 소대를 이끌고 마을에 있는 물더강과 엘베강 사이 평야의 농업 지대를 이동하던 코체뷰는 피난민 무리를 발견했다.

전의를 상실한 독일 병사와 갑작스러운 해방에 당황한 연합군 포로의 대열이 뒤섞였다. 큐체뷰는 소련군에 안 붙잡히고 아무 미군에게라도 항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수많은 독일 병사를 계속 저지해야 했다. 퀴렌 마을만 해도 코체뷰의 소대 36명이 전의를 상실한 독일군 355명을 무장 해제시켜야 했다. 독일 병사들은 한 농가의 정원에 집결한 뒤 해방된 영국군 포로들의 감시를 받았다. 마을 촌장은 또 다른 독일 부상병 100여 명을 모았다. 코체뷰는 한 독일 장교에게 부하 세명을 시켜 이들이 내놓은 소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총기 더미를 부수라고 지시했다. 순찰대는 동쪽으로 8킬로미터를 더 달려 달렘 마을에 도달해 그곳에서 독일군 31명을 붙잡았다. 마을 주민은 그 지역에 러시아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도망쳤다. 10킬로미터를 달린 미군 지프 일곱 대가 레크위츠 마을에 진입했다. 그는 말을 타고 어느 집 정원으로 들어가버린 사나이를 발견했다. 말 탄 사나이를 따라 정원으로 들어간 코체뷰는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에워싸였다. 말을 탄 의문의 사나이는 정찰에 나선 소련군 기병대원이었다. 이름은 아이트칼리아 알리베코프로, 카자흐스탄 출신이었다. 독일 시각으로 오전 11시 30분, 워싱턴 시각으로 오전 5시 30분, 모스크바 시각으로 오후 12시 30분, 미 육군 제69 보병사단이 소련군 제58 근위소총사단과 연결되었다. 나치 독일은 마침내 둘로 나뉘었다.

미군은 소련군의 후진성에 깜짝 놀랐다. 미군 순찰대가 처음 만난 소련군 병사가 기병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러시아인들은 상당수 보급과 정찰을 말에 의존했다. 야포도 진지까지 말이 견인하고 보병도 걸어서 이동했다. 전차와 중포는 베를린 공격 같은 주요 공세용으로 남겨두었다.

미군과 달리 소련군 제58근위소총사단 병사들은 엘베강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진격해왔다. 강에 가까이 갈수록 저항은 거세진 독일군은 결사를 다짐한 듯 싸웠다. 나치 친위대, 히틀러 유겐트, 게슈타포 등 모든 병력을 투입했고, 소련군은 많은 사상자를 기록했다. 

반면, 미 제69보병사단은 노르망디에서 엘베강까지 1120킬로미터를 진격하는 동안 65일만 전투를 치렸다. 모든 원인에 의한 총 사망자 수는 309명으로, 전체 병력의 2퍼센트였다.

반면 소련군 제58근위연대 병사 중 대다수는 1941년 6월 나치가 소련을 침공한 이래 거의 지속적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224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했다. 소련군은 베를린 전투 한차례에서만 7만 8000명이 전사했다.

미 육군은 전쟁 막바지의 몇 주일 사이에 9000명이 희생됐으며 라인강부터 엘베강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선에서 제대로 된 저항은 거의 받지 않았다. 전쟁 중 죽은 독일군 550만 명 중 35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죽었고, 서부 유럽, 이탈리아, 북아프리카에서는 다 합쳐도 전사자가 100만 명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발칸반도의 게릴라전에서, 훅은 포로 생활중 숨겼다. 스탈린은 소련군이 독일군에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던 1941~1942년의 암흑기를 회고하면서 '그땐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밝혔다.

Harry S. Truman (1884~1972)

해리 트루먼은 미합중국 제3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바로 다음날 의사당으로 돌아왔다. 트루먼은 10년간 상원의원 생활을 한 덕분에 의회 지도자들과 친밀관계를 가졌다. 이제 유럽과 아시아에 배치된 1200만 대군을 거느리는 군 통수권자 이기도 했다. 부통령 재임기간 82일 중 트루먼은 루스벨트와 단 2차례 만났다. 트루먼은 얄타회담, 폴란드 문제, 원자폭탄 개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트루먼은 상원의원회 위원장 출신으로, 미주리 주에서 노새 주인의 아들이었다. 해리먼은 트루먼에게 루스벨트, 스탈린 사이의 대화록 전체를 읽는 숙제를 냈다. 신임 대통령은 미국 소련관계의 긴급 현안을 요약해달라고 요청했다. 국무부 장관 스테티너스와 부장관 조셉 C.그루, 볼렌도 동석했지만 대부분 발언은 해리먼 대사가 했다.

"우리는 야만족의 유럽 침략에 직면했습니다"

해리먼이 불쑥 내뱉었고, 트루먼은 이 말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Henry Lewis Stimson (1867~1950)

헨리 스팀슨에게는 대통령과 반드시 나누고자 하는 비밀이 있었다. 3년간 스팀슨은 비밀 프로젝트의 공식적 책임자였다. 행정부 내에서 이 계획은 S-1, 즉 과학국방연구소의 섹션 1을 뜻하는 암호명이었다. 당시 새로 창설된 육군 공병단의 맨해튼 공병 지구에 임무가 배정되었기 때문에 맨해튼 프로젝트로 붙은 것이다. 1945년 4월 과학자들은 성공을 확신하는 수준까지 도달했고, 미합중국 대통령은 명령할 권한을 얻었다.

북아메리카 대륙 곳곳의 비밀시설을 건설하는데 당시 돈으로 무려 20억 달러가 소요됐고 30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동원됐다. 트루먼 역시 대통령이 되었을 때 S-1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몰랐다. 아직 상원의원이었던 때 테네시 주와 워싱턴 주에 값비싼 과학실험이 이루어지는 비밀공장이 존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국방비 남용을 적발하는 감사위원회를 주관한 트루먼은 이문제에 감사를 검토했다. 트루먼은 전쟁부 장관 스팀슨 본인이 '1급 기밀이어서 안보상 핵심적인 이 계획에 든 모든 비용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지겠다'라고 밝히자 감사를 취소했다.

핵무기 확산을 통제할 어떤 체제를 포함하지 않고서는 국제평화기구는 비현실적이었다. 그런 통제에는 매우 엄격한, 사찰과 내부 통제권이 요구되므로 실행이 어려웠다. 타국 정부와의 핵무기 공유와 차단은 대외 관계의 핵심 사안이 될 터였다.

Leslie Groves (1896~1970)

맨해튼 프로젝트의 사령관인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대통령이 즉각 읽길 원하는 24페이지 보고서를 들고 트루먼은 테네시 주 오크릿지에서 이루어지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및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에서 이루어지는 원자폭탄 조립에 대한 복잡한 설명서를 읽었다. 

이 보고서에는 미국이 유럽부터 벨기에령 콩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우라늄을 확실히 공급받기 위해 했던 노력도 포함됐다. 트루먼은 공식적으로 원자폭탄 계획과 이 무기 사용을 결정할 위원회 설치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다음 글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