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북방군의 수장, 이괄의 난 - 4
이괄이 한양으로 입성하자, 한양에 남아있던 하급 관리들은 관복을 차려입고 나와 영접했다. 한양 주민 일부는 길을 닦고 황토를 뿌려 이괄의 군대를 환영했다.
그리고 이괄이 한양으로 왔던 흥안군(선조의 10번째 아들)을 새 왕으로 옹립하니, 조선 천하에 2명의 왕이 양립한 것이었다.
이괄은 자신이 옹립한 새 왕인 흥안군의 이름으로 한양 인근 고을에 선전관을 파견했다. 한양 인근 고을은 크게 혼란에 빠졌으며, 때마침 인조가 보낸 선전관도 한양 고을에 도착하였다.
'한양은 역적에게 넘어갔다. 한양에서 오는 선전관은 모두 목을 베어라!'
인조는 있는 힘을 다해 충청도 경계로 들어갔으며, 이때 충청병사 이완(이순신 장군의 조카)이 인조를 맞이하였다.
'전하께오서 역적 무리의 화를 당하셔 이리 고초를 겪으시니... 신들은 죽기 살기로 전하를 지킬 것이옵니다.'
이 상황에서 인조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근왕병을 소집하게 하였으며, 한편 한양 장만의 진영에서는 이괄을 칠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만은 평안도, 황해도, 경기 인근의 모든 군사들을 모아 10,000여 명에 가까운 대군을 모았다. 이때 장만이 군사 회의를 주도하면서 장수들은 작전 계획 수립에 골몰하였다.
장만 : 지금 당장 계책으로는 2가지가 있다. 한양 백성들이 모두 역적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하루 이틀 더 지체하면 한양 백성들이 역적의 무리에 붙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양을 공격하는 게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한양으로 진군해 적과 대적하는 것이 첫째 계책이다. 그다음 계책으론 한양을 포위해 적의 보급로를 끊어 놓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군사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 함께 협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둘째 계책이다.
즉 단기전이냐, 장기전이냐의 선택이었다. 정충신이 장만 앞에 나아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정충신 : 우리들이 힘을 다해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지금 역적이 한양을 침범하고 주상 전하께오선 파천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하지만 형세가 이미 급하니, 지켜볼 것만이 아니라 승패를 막론하고 한양에서 한번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에게 군사를 주십시오, 신이 먼저 나아가 안현에 진을 치겠습니다.
관군이 안현을 먼저 점령하여 진을 세우면, 이괄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안현은 정상에 오르면 한양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관군에게는 한양 견제를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위치는 없었을 것이다. 옆에 있던 남이홍은 즉각 정충신의 의견에 동조하고 여러 장수들 역시 일치단결하였다. 우선 정충신은 무사 20명을 선발하여 한양 인근의 봉화대를 기습하게 하였다. 이로써 봉화대가 무력화되었고, 이괄의 레이더망은 사실상 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정충신은 안현 고갯길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이희건의 정예 조총 부대를 배치하였다.
정충신은 이렇게 안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해 한양을 압박해가고 있었으며, 관군의 병력도 계속 증강되어 그 위용이 예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괄의 군대 위용 역시 만만치 않았다. 관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던 항왜병과 정예 조총병이 있었으며, 특히 편곤을 휘두르며 돌격하는 정예 기병 700명은 이괄의 자랑이었다. 2월 11일, 드디어 해가 뜨고 새 아침이 밝았다. 관군과 이괄의 일대 격전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한편 인조도 이괄의 항왜병이 위력적이라고 들었는지, 이괄의 항왜병에 대항하기 위해서 당시 부산포 왜관에 밀집하여 살고 있었던 일본인 1,000여 명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2월 11일 아침, 장만의 군대가 기습적으로 요충지 안현을 점령한 것을 보고 이괄은 당황했다. 이괄은 분명 큰 실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 한양에 오래 머물게 되면 이괄에게 전적으로 불리했다. 이괄이 한양에 있는 동안, 관군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포위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각설하고, 이괄은 안현의 관군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전투를 속행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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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 : 정충신이 선봉에 있고, 장만은 후방에 있다! 우리가 일부 병력과 항왜병을 이끌고 창의문에서 연서로 삥 둘러 나가면 북을 한 번 쳐서 관군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도원수가 잡히면 관군이 전의를 상실할 것이니, 단번에 승리할 수 있다!!!
한명련 : 안현 고개 위의 관군은 이미 파악했습니다. 백성들을 몰아내어 성 위에 올라가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온 힘을 다해 우리가 공격하면 저 오합지졸들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니, 백성의 민심을 가라앉혀 우리에게 복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괄 : (전군에게 명령) 적을 무찌른 후에 아침밥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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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승전과 한양 점령으로 인해 이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가벼운 운동이라도 하듯, 자신만만하게 전투 준비를 했다. 한양 백성들은 아침밥을 먹다가 성벽 위로 줄줄이 올라갔다. 곧 돈의문에서 남산까지 성벽 위로 빽빽이 한양 백성들로 가득 찼으며, 이러한 싸움 구경은 한양 백성들에게 즐거운 볼거리였다. 한양 백성들은 전투를 구경하면서 아예 놋그릇과 꽹과리를 치며 흥을 돋기까지도 한다.
한양 백성들 :
"이거 매우 재밌겠구나! 나는 이괄이 이긴다에 돈을 걸겠소!"
"나는 관군이 이긴다에 돈을 걸겠소! 껄껄..."
한명련은 즉각 선봉군을 이끌고 출진했으며, 이괄 역시 뒤이어 출정했다. 이괄은 우선 빠른 기동력으로 안현 주위를 포위했다. 그러나 정충신은 험한 요지를 바탕으로 높은 곳에서 방어 진지를 구축했기에, 이괄은 돌격보다는 사격전을 명했다. 곧 쌍방이 조총과 활로 사격전을 벌였으며, 뒤이어 항왜병과 조총병을 앞세워 정충신 진영으로 일제히 발포하였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화약 연기 때문에 뿌연 구름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정충신군은 계속해서 높은 고갯길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이괄군을 향해 사격하였다.
이괄군은 산 아래서 위로 진군하면서 사격했기에, 이괄군은 마침내 형세가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이괄은 전세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전군을 안현 산길로 오려보내 총공격을 지시했다. 한명련은 직접 앞장서서 돌진했으며, 위에서 정충신 군대는 조총과 활을 통해 이괄군의 진공을 막았다. 빗발치는 총알과 화살을 뚫고 싸워야 하는 이괄 입장에서는 형세가 불리했지만, 마침내 이괄은 탄환을 뚫고 정충신 진영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항왜병을 제1선에 앞세워 관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백병전에서는 이괄이 유리했고, 관군 장수 김경운이 항왜병이 쏜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2선까지 후퇴하였다. 이괄은 계속해서 몰아쳤으며, 관군 장수 이희건의 진지까지 접근하였다. 그때였다.
명나라 군기도설의 윤류방총도 이희건은 좁은 길목에 포수들을 5열로 정렬시키고 그 뒤에 궁수들을 배치했다.
이희건 : 역적 무리가 멀리 있거든 활을 쏘고, 10보 가까이 오거든 그때 조총을 쏴라!
이괄군이 이희건의 본대로 올라가자, 이희건의 진영에서는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괄군은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그럼에도 이괄군 장수 이양은 말을 타고 위로 앞장서서 돌진했다. 한명련 역시 화살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지휘 돌격했다. 그리하여 이희건 진영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이희건 휘하의 한 포수가 10보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도 발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희건은 즉각 칼을 뽑아 군기를 어긴 그 포수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리하여 군기가 다시 세워졌으며, 이괄군이 10보 앞으로 오자 이희건 조총 부대가 쉴 새 없이 발포하였다. 이희건의 조총 부대는 1열이 총을 쏘고 뒤로 빠지며, 2열이 그때 앞으로 나와 또 총을 쏘는 방식으로 번갈아가면서 계속 쏘아댔다. 이에 이괄군 장수 이양은 조총에 맞아 전사했으며, 한명련은 화살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한명련은 긴급히 후송되었고, 이를 보던 남이홍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괄이 패했다! 한명련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괄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정충신은 이괄군을 향해 전군을 돌진시켰다. 다시 격전이 발생했지만, 이괄은 많은 지휘관이 전사했기에 즉각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때 정충신의 부하 장수였던 유효걸의 기병대는 퇴각하는 이괄군을 추격하였다.
유효걸의 기병대는 이괄군의 후미를 급습해 많은 타격을 주었으며, 이때 정충신의 본대도 이괄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성벽 위에서 전투를 재밌게(?) 구경하고 있었던 한양 백성들은 이괄이 패하고 쫓기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괄의 패배를 확신했고, 곧 관군이 입성하리라 판단하였다. 한양 백성들은 즉각 성문을 지키던 이괄군을 살해하고 돈의문과 서소문을 잠가버렸다. 앞에는 성문이 잠겨져 있고, 뒤에는 관군이 추격하니... 이괄군은 앞뒤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때 이괄과 한명련은 간신히 잔여 부대를 수습해서 문이 활짝 열려있던 남대문으로 들어갔다.
이괄의 주력 부대는 관군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살아남은 이괄의 병사들은 대부분 흩어졌다. 이괄의 휘하에는 고작 1,000여 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한양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쌀을 털어가자, 병사들이 먹을 식량이 없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이괄의 병사들이 한양 백성들의 목을 참수하는 등 한양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괄은 도저히 한양에 주둔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밤 11시 즈음에 수구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왔다.
이괄을 추격했던 장만은 드디어 한양에 입성하게 되었고, 한양의 이괄 잔당 색출에 나서게 되었다. 이괄에게 협력했던 한양 백성들이나, 민가에 숨어 들어간 이괄의 패잔병들은 모두 참수되었다. 이괄은 경기도 광주에 도착했으며, 광주목사 임회는 이괄군이 출몰했음을 즉각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괄은 임회의 목을 베고 계속 북쪽으로 도망쳤다. 유효걸은 27명의 기병으로 이괄의 뒤를 추격했으며, 이괄은 묵방리 부근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피곤에 곯아떨어졌는지... 이괄은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이괄이 잠든 틈을 타서 부하 장수인 이수백과 기익헌은 딴마음을 품게 되었다. \
이수백 : 지금 우리의 처지가 좋지 않소. 차라리 부원수(이괄)을 죽여 목숨이라도 보장합시다.
기익헌 : 그리 합시다...
이수백과 기익헌은 진영에 불을 질렀고, 혼란한 틈에 부하 40명을 이끌고 이괄의 거처를 포위하였다. 이어 이수백과 기익헌은 칼 한 자루를 들고 들어가 이괄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이어 이괄의 동생이었던 이수, 아들 이전, 한명련, 조카 한섬까지 모조리 목을 베어 인조에 달려갔다. 이것이 이괄의 난의 허무한 최후였다. 이괄이 옹립했던 왕 흥안군은 경기도 광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광주부사가 이를 고발하였고, 흥안군은 체포되어 한양으로 끌고 갔다.
남도도원수 심기원 : 이제(흥안군)가 이미 임금을 사칭했으니, 그가 왕족이라도 누구든지 잡아 죽일 수 있다.
선조의 10번째 아들이자, 잠시나마 왕 자리에 있었던 흥안군은 교수형에 처해 죽게 되었다. 한편 이수백과 기익헌이 이괄의 목을 가지고 투항하였으므로 인조는 난의 평정을 알리며 안도감을 내쉬었다.
인조 : 역적이 감히 천하를 어지럽혀 일이 이렇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의 백성이 고통을 받았도다. 이제 지혜로운 장수와 용맹한 병사의 분투로 난이 평정되었으니, 이를 종묘와 신주에 고한다.
이괄의 난은 끝났지만, 한동안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이괄의 잔당 색출 작업에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으며, 죄 없는 사람이 죽는 비극적인 일도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괄의 난 때 항왜병의 선전으로 인해, 인조는 조선 내의 항왜 공동체에 압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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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이 평정되고 10년이 흘른 1634년 3월 13일. 한양에 살인 사건이 벌어져 떠들썩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낸 것이다. 가해자들은 바로 과거 이중로의 아들 2명과 박영신의 아들 3명이었다. 그리고 피해자는 놀랍게도 이괄을 죽이고 투항했던 이수백이었다.
"전하! 저희 아비는 지난날 역적 이괄과 싸우다 죽은 충신이옵니다. 국가에서는 특별히 이수백을 용서하였으나, 흉악한 자의 목숨이 아직도 살아 있으므로 신들은 뼈가 저리고 가슴이 아파했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원한을 씻고자 함부로 살인하였으니, 그 죄는 면치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들의 죄를 엄히 다스려 지하에 가서 부친을 만나게 해 주소서!"
당시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에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인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죄를 가볍게 해 주었다. 인조는 이들에 대해서 유배를 보내는 데 그쳤으며, 이괄을 통수 쳤던 이수백의 최후도 비참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기익헌은 유배지에서 병으로 사망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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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한양 백성들이 관군과 이괄의 전투를 성벽에 구경하고 나서 '장만 장군은 볼만이요, 이괄은 꽹괄이로세.'라는 노래 가사를 지어 한동안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꽹괄이라는 단어가 이 당시 백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라고 전해진다.
p.s : 이괄의 난 진압에 활약했던 관군 측 무장들은 정묘, 병자호란 때 대부분 전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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