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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의 개막 - 1

|||||||||||||| 2021. 3. 15.

"미국의 주요 수단은 자유고, 러시아의 주요 수단은 예속이다. 두 나라는 시작점이 다르고 과정도 다르지만, 세상의 절반의 운명을 뒤흔들려는 '하늘의 뜻'으로 나타낼 것이다"

- 마이클 돕스 (워싱턴포스트 기자) -

1943~1944년 히틀러는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와 싸우기 위래 180~190개 사단을 투입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서방 연합군과 싸우는 독일군 병력은 40~50개 사단에 불과했고 이탈리아에는 15~20개 사단이 고작이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도 이런 상황은 변하지는 않았다. 소련군의 희생이 늘거나 줄면 미군의 희생은 그와 반비례했다. 러시아인이 더 많이 죽을수록 미국인은 덜 죽었다.

스탈린은 저택 1층 스타프카에 들러 군사고문들과 회의를 했다. 스탈린은 지난주 내내 베를린에 대한 전면 공세를 승인할지 고민했다. 소련군 전선 지휘관, 스탈린그라드의 바실리 추이코프는 승인 요청을 했다. 히틀러가 병력을 충분히 증원하기 전, 길어야 열흘 안에 독일 수도를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참모본부는 신속한 진격에 반대했다.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의 독일군이 소련군 전선에 구멍을 뚫고 중앙의 게오르기 주코프 부대와 북쪽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부대 사이를 헤집고 들어올까 우려했다.

주코프 부대는 12일간 500킬로미터의 진격을 달성했지만, 너무 지치고 보급도 차질을 빚었다. 몇몇 부대는 병력의 35~45퍼센트가 사상자로 전락했고 전차 손실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스탈린은 루스벨트와 처칠로부터 서방 연합군이 아무리 빨라야 3월 중순까지는 라인강을 건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베를린에 대한 전면 공세는 위험부담이 크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병력을 북쪽으로 돌려 전선 우익을 방어하고 로코솝스키 부대와 간격을 좁히라고 명령했다.

얄타 회담에서는 서부전선의 독일군 병력이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러시아의 주요 요구사항 중 하나였다. 소련 장성들은 특히 '베를린과 라이프치히를 잇는 철도 교차점을 마비시켜달라'라고 요구했다.

드레스덴 공습은 얄타회담 이틀 뒤인 2월 13일 저녁에 실시됐다. 영국 공군이 먼저 오후 10시 14분에 도심부를 고폭탄 500톤과 소이탄 375톤으로 융단 폭격했다. 영국 공군의 랭커스터 중폭격기는 3시간 뒤 새벽에 또다시 폭탄 1800톤을 퍼부었다 미 공군 중폭격기 527대가 2월 14일과 15일에 폭탄 1247톤을 주간 정밀폭격으로 철도조차장에 퍼부었다. 

폴로 선수이자 철도재벌의 상속자인 해리먼은 1943년 10월 모스크바에 부임했다. 루스벨트의 렌드리스 정책 특사로 영국에 파견된 해리먼은 처칠과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종종 체커스 별장에 초대되어 주말을 보냈다. 해리먼이 1941년 9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로 접근해오는 나치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줄 전차와 트럭과 항공기의 대규모 제공을 약속하며 특사로 파견되었다.

루스벨트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강한 유대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데는 강하게 반발하는 이븐 사우드 국왕의 태도에 움찔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과 맺은 것과 비슷한 유대관계를 얻기 위한 시도로 농담 삼아 유럽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에 더해 미국의 유대인 "600만 명"을 팔레스타인에 이주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위대한 설계' 핵심은 전통적인 유럽식 힘의 균형 추구 정책을 대체할 집단안보체제 창설이었다. 루스벨트는 'UN은 전쟁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최고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나치 독일 패전 뒤 6개월 안에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했다. 미국의 UN구상에 약간 수정하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스탈린의 요구는 UN 총회에 소련을 위해 2자리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 줄 자리들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의 UN에 대한 계획서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스탈린의 태도는 대체로 방어적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이 제시한 선언문 초안을 아주 약간 수정하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바로 소련의 신탁통치에 관한 일이었다.

처칠은 '대서양헌장'이 '대영제국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려 했다. 더 나아가 처칠은 자신의 주장을 문서화해 루스벨트 대통령 특사였던 웬들 윌키에게 이미 건네기까지 했다.

아르덴 지역에서 몇 주일을 지체한 서방 연합군은 갑자기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진격했다. 처칠은 3월 25일 서부전선을 깜짝 방문하면서 아직도 모래주머니 방어벽이 구축된 라인강의 독일 쪽 기슭을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고" 거닐었다고 밝혔다.

3월 29일 패튼의 미 제3군(3군단, 4군단, 7군단)은 프랑크푸르트를 함락시켰다. 반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공세는 놀랄 만큼 느려졌다. 주코프 부대는 3월 말에도 얄타회담이 있던 2월 초에 비해 베를린에 가까이 서지 못했다. 헝가리에서 독일군이 저항하는 통에 소련군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하는 진격을 늦춰야 했다. 보통 소련군은 하루에 독일군 800명을 죽였지만,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 전사자가 60명만 나왔다. 독일군 약 2500명이 동부전선에서 매일같이 '실종되는' 반면, 서부전선에서는 그의 10분의 1만 실종됐다.

Ilya Ehrenburg (1891~1967)

일리야 예렌부르크의 표현에 의하면, 독일군은 미군에 항복하려고 한 반면, 러시아인들에게는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일부 사건은 스탈린의 편집증을 부추겼다. 독일군이 미군의 패튼 장군과 영국군의 몽고메리군에게 무더기로 항복하는 것은 어떤 뒷거래의 증거일지도 몰랐다. 3월 27일 자로 몽고메리의 사령부에서 발신된 로이터 통신 기사에 따르면 영국군과 미군은 독일의 심장부로 향하는 동안 저항을 받지 않았다. 스탈린은 이탈리아 복부에서 벌어지는, 독일군의 일제 항복에 대한 협상 소문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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