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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북한 침공 작전 - 반달 작전

|||||||||||||| 2021. 4. 7.

우수리강 근처에서 집단 패싸움하는 소련군과 중공군
도망가는 중공군

1969년, 중국과 소련 사이에 중-소 국경분쟁이 일어나면서 공산권은 친중파와 친소파로 갈라졌다. 북한은 노골적으로 누구 편을 들지 않으면서 '주체'니 '자주'니 하는 말을 들어 공산권 사이에 일종의 중립을 표방했지만, 중립국이라고 해서 정말 50%-50% 중립을 지킬 순 없었다.

이에 북한은 기존의 공산주의 이론을 조금씩 수정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을 조금이나마 도입했던 소련보다는 중국에 더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친소파 공산국가들과도 잘 지냈다. 근데 정작 중국과 소련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없이 소극적이기만 했다.

뭐 사실 브레즈네프는 그렇게까지 화난 건 아니었고, 언젠가 북한이 중국하고 더불어 자신들의 뒤통수를 때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놓고 북한에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사실 소련과 북한의 상호 경계는 국경분쟁은 이전부터 있었다.

사실 소련의 입장에서 북한은 스탈린 시절부터 식민지보다 좀 나은 것에 불과했다. 김일성 때부터 "남조선 침공하게 해 주세요" 라면서 징징대는 소리에 "쯧 어쩔 수 없지 한번 해봐"라고 해놓고 소련은 그냥 팔짱만 끼고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아 소련은 그냥 손 놓고 있는데 중국은 군사력으로 지원해주네? 중국 최고' 하면서 이때부터 소련을 경계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직후로도 말이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난 이후, 수정주의자인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에 대해서 거리를 두려는 북한의 움직임은 더 교묘해졌다.

1964년부터 1981년까지 집권했던 레오니프 브레즈네프

하여튼 중국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고 북한도 경계했던 브레즈네프는 1969년 중국과 국경분쟁이 벌어지자마자 붉은 군대에 지시하여 북한에 대해서도 침공작전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해서 '반달(Полумесяц, 뽈류몌샤쯔)'작전이다.

북한 침공작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북한이 만일 중국과 군사적 협력을 맺고 소련군에 대항할 경우를 전제로 한다.

  • 투입 병력은 15만으로 한다.

2. 두 가지 루트를 이용하여 북한의 북서부 지역을 장악한다.

  • 두만강을 경유하여 회령(빨간 원 친 부분)을 신속하게 점령.
  • 해군과 육전대를 이용하여 나진-선봉 일대를 점령한다.

3. 함경북도 일대를 점령지로 삼은 다음, 2주 이내로 평양으로 기갑부대를 선봉으로 투입하여 주석궁과 여하 주요 기관을 점령한 후 북한의 항복을 받아낸다.

 

한마디로 이 작전은 북한이 중국과 손잡을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중국의 오른팔을 꺾어놓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군사계획은 김일성의 타고난 간 보기 능력으로 시행되는 일은 없었다. 또 소련 입장으로써는 너무 무리한 작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1969년 9월 중국과 잠정적 합의를 도출했음에도 중공에 대한 대규모 군사작전과 함께 여전히 '보류 및 대기'상태에 있었다. 그만큼 소련이 아직 북한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단 증거이다.

그리고 이 작전은 유리 안드로포프가 집권하고 나서 폐기되기에 이른다. 그 이유는 미국이랑 경쟁도 가뜩이나 힘든 판에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북한은 이미 남한 상대하기도 바빠서 소련에게 총부리 들이댈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보면 유리 안드로포프는 절약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다. 유리 안드로포프의 결정으로 결국 북한은 침공당하지 않았다.

역사에 만약이란 건 없지만 만약이 있었다면 북한은 소련의 침공으로 김일성 왕조는 소련군에 의해 붕괴되고 소련처럼 비슷한 정권이 생겨 김일성 왕조처럼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적인 북한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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