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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53

명량대첩, 133 VS 13 임진왜란 때 미스테리한 전투 명량대첩, 133 VS 13 임진왜란 때 미스테리한 전투 133대 13 누가 봐도 13이 불리한 숫자이며 만약 싸울 경우 10배나 많은 적한테 필패할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을 할 것이다. 아니 예상할 필요가 없이 필패이다. 그러나 그 예상을 뒤집은 사람이 존재한다.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알 것이다. 바로 대한민국의 존경하는 인물 1위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여러 전투 중 가장 미스터리한 전투가 명량해전이다. 우리는 과연 명량대첩(해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혹여 다른 전투로 인해 역사에서 그 비중이 축소된 것은 아닐까? 승리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본군은 왜 전투가 끝난 뒤 재공격을 안 하고 후퇴를 했을까? 그럼 조선 전쟁사 중 가장 미스터리한 해전인 명량 해전을 알아.. 역사 2020. 10. 18.
조선시대, 조선의 여진족 학살 조선시대, 조선의 여진족 학살 이 노토 부락은 좌우로 높은 산과 절벽이 있고 마을 안은 매우 넓다. 토지는 비옥하고 그 가운데로 큰 냇물이 흐르며 모든 부락들은 그 물을 끼고 살고 있다. 집들 역시 즐비하며 살림의 넉넉함은 다른 여진 부락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평소 여진족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그들 역시 가축에게 풀을 먹이며 곡식을 재배하는 등 평화롭고 목가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방에서 불화살이 쏟아지더니, 맹렬한 굉음이 온 하늘을 준동하였다. 평화롭던 노토 부락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고, 절벽 위에서 불화살과 대포알이 쏟아졌다. 노토 부락민은 비명을 지르며 즉각 도망가기 시작했고, 마을은 금세 온 비명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거친 말발굽 소리와 함께모래 바람이 하늘을 가리더니, 정.. 역사 2020. 10. 17.
조선 시대, 왕의 북벌 추진과 신하들의 반대 조선 시대, 왕의 북벌 추진과 신하들의 반대 『성상(임금을 높이 부르는 말)이시여, 고구려를 침공하다 패퇴한 당 태종의 고사를 잊으셨습니까!』 당나라 황제 이세민은 청년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수나라 말기의 여러 전장을 누비며, 마침내 통일 제국 당나라를 세우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이세민은 수나라 말기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나타난 여러 군웅들을 토벌하였고, 또한 돌궐을 정벌하고 서역을 원정하는 등 제국의 영향력을 서북방 변경에 떨쳤다. 그러나 이세민은 자신이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한 사업이 있었으니... 그는 10만여 명이 넘는 대병으로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고, 천하의 뛰어난 무장들 역시 원정에 참여하였다. 물론 이때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방어선이 붕괴되는 등 막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이세민은 안시성.. 역사 2020. 10. 16.
조선 시대, 초기 부국강병을 꿈꾼 군주와 관료들 조선 시대, 초기 부국강병을 꿈꾼 군주와 관료들 고려 말기, 이성계의 활약 고려 말기, 수없이 많은 이민족의 준동으로 고려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홍건적 20만의 침공으로 고려 왕조는 수도가 함락되기도 했고, 왜구의 계속된 침공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해안가 지방이 쓸쓸해졌고, 내륙 지방까지 왜구가 준동했다. 그때마다 고려 왕조는 이성계를 찾았으니, 이성계 군대는 이 난세에서 그야말로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1380년, 이성계가 이끈 친병(親兵)이 황산에서 1만여 명의 왜구를 대파했는데, 고작 70여 명의 왜구가 살아서 도망쳤다. 이성계는 항상 출정할 때마다 전장에서 소라로 만든 군사 악기를 부르게 했는데, 이는 이성계 군단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저 소리는... 이것은 이성계의 차거(硨磲)로 만.. 역사 2020. 10. 15.
엠스 전보사건 - 외교의 천재,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사건 엠스 전보사건 - 외교의 천재,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사건 1. 으르렁대던 프랑스와 프로이센 1848년 12월 선거에서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쿠데타를 일으키고 큰아버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이은, 프랑스의 두 번째 황제로 취임했다. 어린 시절부터 황제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국내 정책과 대외 정책에서 주도권을 쥐고 나서 빈 회의에서의 치욕을 딛고 프랑스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프랑스 민족의 위대함을 역설하며, "만약 다른 국가들이 어떤 것을 얻으면, 프랑스도 역시 뭔가를 얻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돌아온 나폴레옹 황제'로 여기며 열렬히 환영했다. 이어 크림전쟁.. 역사 2020.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