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63

베티고지 전투 - 한국전쟁의 신화적인 전투

베티고지 전투 - 한국전쟁의 신화적인 전투 베티고지 전투는 다른 전투들에 비해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을 테지만 한국전쟁 중에 가장 신화적인 전투라고 칭송받는 전투이다. 김만술 대위가 이끄는 30명의 국군이 중공군 800명을 궤멸시킨 전설적인 전적을 올린 전투이다. 47년 상사로 입대하여 중화기 중대에서 근무하시다가 임관시험을 보시고 소위로 임관하셨다. 1931년 10월 28일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시고 1991년 5월 18일 날 돌아가셔서 현재는 국립묘지에서 안장되어 계신다. 1953년 제1사단 제11연대 제7중대 제2소대장이 되셨고, 소대장으로 임관하던 날, 소대원들 얼굴도 제대로 모르고 바로 베티고지로 투입됐다.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옆에 위치해 있다. 국군 전진부대는 한국전쟁 개전 초기 구.. 역사 2020. 9. 9.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호주는 미국에 이어 2번째로 참전을 결정하고, 육군 2개 대대 + 지원부대 10657명, 항공모함 1척과 구축함 2척 등 해군 4507명, 공군 1개 전투기 대대 2000명, 도합 17164명을 파병해서 부산에서 UN의 북진 단계부터 참여했다. 사리원 전투, 영유리 전투, 박천 전투, 가평전투, 마량산 전투 등 무수한 전투를 수행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평 전투와 마량산 전투에서 훌륭한 활약을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공군은 20대 경 항공기와 1800여 명의 병력만을 보유해서 공군이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공군 전력을 파병한 국가는 8개 국가뿐이었다. 한국전에 적합하다는 이유로 초기엔 F-51 무스탕 전투기가 실전 배치되었는데 호주군은 F-.. 역사 2020. 9. 7.

한국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한국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1950년, 동아시아의 어느 이름 모를 나라에선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 참가해 남한을 돕기로 결정한다. 유엔 역시 59개 회원국 중 33개국이 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각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모였고 은 국가들이 군대 파견을 약속하였다. 이중 한 국가가 바로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그리 여유로운 사정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 국토가 전장으로 변해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사실, 네덜란드는 한국전쟁의 참전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한국전쟁 참전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나라를 위해 청년들의 소중한 목숨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마셜플랜의 회원국이었고 참.. 역사 2020. 9. 5.
한국전쟁의 비하인드 스토리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0. 9. 2.

830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830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1.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려 했던 이유는 뭘까? 왜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웠는지 한번 그 배경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다. 바야흐로 삼한이 신라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다. 이때부터를 소위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최근엔 사진에도 나오는 것처럼 발해도 우리 한민족의 나라인데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가 과연 합당한가?라는 논리가 생겨났다. 이제는 거의 대부분 통일신라와 발해를 아우르는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라고 불린다. 어쨌든, 이 사진이 왜 나오느냐면 바로 이때 섬나라 일본이 신라를 침공해야 한다고 운운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는 결국 신라의 통일로 마무리가 되었다. 지금이야 우리가 당시 삼국을 같은 조상이라고 취급하지만 당시의 삼국은 그.. 역사 2020. 9. 1.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문화인 요바이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0. 8. 31.

일본, 버블보다 더 큰 기업의 붕괴

일본, 버블보다 더 큰 기업의 붕괴 이 표는 80년대 일본의 위엄이니 뭐니 하면 제일 많이 보는 표였을 것이다. 오늘 다룰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표를 먼저 보는 게 가장 이해가 될 것 같다. 1987년, 전 세계 50대 기업 순위 중 절반 이상이 일본 기업이고, 21세기가 되면 일본이 세계 1위가 된다는 꿈에 빠져있던 때였다. "일본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다."라는 말을 스스로 하고 다닌 시기다. 이제 시계를 1987년에서 15년 전으로 돌려서 1973년으로 가보겠다. 1973년 2월, 일본은 외환관리법을 바꾸어 기존의 고정환율제(1945~1973.2)에서 변동환율제로 전환했다. 1945년부터 1973년 2월까지 1달러는 무조건 360엔이었다. 물론 1971.12부터 1973.2까지는 1달러에 30.. 역사 2020. 8. 30.

다큐 - 욕망과 혼돈의 기록:도쿄 1991

다큐 - 욕말과 혼돈의 기록:도쿄 1991 명품 브랜스 숍과 고급술집이 밀집해 있는 일본 도쿄의 긴자 거리 980년대 이곳은 사치와 허영, 富에 대한 욕망이 한대 뒤섞여 흥정이고 있었다. 긴자 호스티스의 팁으로 수억원의 가게와 패물이 오가는 소설같은 일이 벌어지는 곳이 거품시절의 긴자였다. 그 거품의 중심에 부동산이 있었다. 영화 울트라맨, 고질라 등의 미술감독으로 최고의 명성을 쌓아온 스즈끼씨, 이제 사람들은 그를 개인파산자 스즈끼씨로 기억한다. 부동산 버블의 최전선에 있었던 부동산 버블전사 고지마 노부타카 그는 최고의 사업수완으로 총자산 8천억엔의 자산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후 일본 최고의 빛쟁이로 전락해 버렸다. 이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부를 이뤄냈고, 이들이 모두 파산하게 된것도 1991년.. 역사 2020. 8. 29.

플라자 합의 -일본 버블 경제의 원인

플라자 합의 -일본 버블 경제의 원인 0. 멈출 줄 몰랐던 일본의 성장, 이에 불안감을 느낀 미국 1970년대 소니가 워크맨이라는 카세트를 처음 선보인 이후 일본의 경제성장은 소니를 비롯한 수출기업들이 주축이 되면서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결과적으로 80년대의 고속성장을 알리게 만든 뿌리가 되면서 수많은 외화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일으키게 된다. 특히 전자업계와 자동차 업계는 그 어떤 국가들조차도 따라 잡기 힘들 만큼 엄청난 부를 축적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 업계 기업들은 예상 밖의 기술력과 창의성 그리고 섬세함까지 내세우면서 소비자들을 매료시켰고 소비자들은 앞다투어서 일본산 제품을 열렬히 구매하면서 일본산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쌓게 해 주었다. 외화는 점차 늘면서 일본은 제1의 경제대국.. 역사 2020. 8. 28.

일본의 버블 경제

일본의 버블 경제 위 차트는 1980년대 미국의 고금리 정책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 왜 이런 고금리 정책을 펼쳤냐면 바로 시중의 돈을 빨아들여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상승을 잡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출금리 상승으로 인해 자금 확보가 힘들어진 미국 제조업체들이 서서히 망가지는데 이때 우수한 제조업 경쟁력을 가진 일본이 등장했다. 미국은 이때부터 엄청난 제조업 경쟁력을 가진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무역수지 적자를 보게 되는데 미국은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이 호텔은 영화 "나 홀로 집에 2"에 등장했던 뉴욕의 플라자 호텔이다. 이곳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G5 재무장관들이 모여 "플라자 합의"를 하게 되는데 미국은 자국 제조업을 .. 역사 2020.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