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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 욕망과 혼돈의 기록:도쿄 1991

|||||||||||||| 2020. 8. 29.

다큐 - 욕말과 혼돈의 기록:도쿄 1991

명품 브랜스 숍과 고급술집이 밀집해 있는 일본 도쿄의 긴자 거리

980년대 이곳은 사치와 허영, 富에 대한 욕망이 한대 뒤섞여 흥정이고 있었다.

긴자 호스티스의 팁으로 수억원의 가게와 패물이 오가는 소설같은 일이 벌어지는 곳이 거품시절의 긴자였다. 그 거품의 중심에 부동산이 있었다.

영화 울트라맨, 고질라 등의 미술감독으로 최고의 명성을 쌓아온 스즈끼씨, 이제 사람들은 그를 개인파산자 스즈끼씨로 기억한다.

부동산 버블의 최전선에 있었던 부동산 버블전사 고지마 노부타카 그는 최고의 사업수완으로 총자산 8천억엔의 자산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후 일본 최고의 빛쟁이로 전락해 버렸다.

이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부를 이뤄냈고, 이들이 모두 파산하게 된것도 1991년 같은 해였다.

그들의 삶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반전시킨 1991년 과연 그들에겐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금 수백만엔을 우습게 쓰는 고지마씨의 배포에 시중은행들은 너도나도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전성기 그는 도쿄시내 빌딩 70채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빌딩들을 전매해서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연간 매출액 5000억엔 순이익만 1500억엔이 넘었다. 늘어나는 그의 매출액 만큼 도쿄의 토지가격은 계속 높아만 갔다.

83년이래 일본의 땅값은 유래없이 급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벼락부자가 되는 꿈들을 꾸기 시작했다.

억센 행운의 사나이 고지마씨, 그도 거품시절 쌓아놓은 자산의 크기만큼 큰 타격을 받았다. 총 8개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 고스란히 빛으로 남았다.

고지마씨에게 남은 것은 파산의 노년뿐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추락하기 시작한해인 1991년을 기억하고 있다.

1991년 그해 견고해 보이던 일본 거품경제의 바벨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85년 9월 미국은 만성적인 대일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일본에 엔화절상을 요구한다.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엔화는 1년새 2배로 급격히 상승하게 된다. 수출에 빨간불이 커진 일본정부는

5%대였던 금리를 2.5%까지 인하하게 된다.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진 일본 정부의 저금리 정책이 3년넘게 지속되면서 시중에 돈이 넘치기 시작했다. 85년 3.8%이던 통화증가율이 88년 13%까지 증가하게 된다.

풀려나온 돈들은 고수익 투자처를 찾기 시작했고 곧 토지와 주식에 몰려들었다. 특히 일본사회에는 토지불패의 신화가 있었다. 오르기는 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에도시대부터 내려온 일본인들의 땅에대한 믿음이었다.

도쿄 중심부에서 시작된 부동산 붐은 도쿄외곽으로 확대되며 지가상승을 부추겼다. 이런 부동산 붐 뒤에는 시중은행들의 대출경쟁이 있었다. 부동산을 담보로 평가액의 120%까지도 대출이 가능했다.

도쿄를 포함한 나고야, 교토등 일본의 6대 도시 지가가 거품경기가 이어지는 5~6년동안 무려 5배까지 급등했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유행했다.

일본의 부동산 투기 광풍은 국내를 넘어 해외부동산에까지 확대되었다.

뉴욕의 심장 록펠러 센터의 인수는 제조업 중심의 착실한 수출국가 일본이 해외부동산의 큰손으로 등장하게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미국인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일본의 대기업과 부동산 회사들은 명화시장에 뛰어들면서 명화의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큰손들에 의해 도쿄의 땅값이 춤추고 있는 동안 서민들의 내집마련 꿈들은 점점더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값싼 임대아파트 추첨의 당첨확률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웠다.

도쿄집값 폭등으로 임대료가 폭등하면서 내집없는 서민들은 멀리 도시외곽으로 쫓겨나기 시작했다.

도쿄 위성도시들의 인구가 300만명이나 증가했다.

 

 

 

거품경제가 주는 이익은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지지 않았다.

서민들로부터 뭔가 잘못돌아가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경제지표가 하향곡선으로 돌아섰다.

시중에 자금이 마르면서 주가가 곤두박칠쳤고, 대출규제로 투기성 매물이 쏟아지면서 지가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1991년은 에도시대부터 믿어왔던 토지불패라는 신앙이 깨어진 한해로 기억된다.

거품붕괴는 맨 처음 버블전사였던 부동산업자들을 강타한다.

1991년을 기점으로 지가는 상승한만큼 크게 하락했다.

지가하락이 계속되면서 일본사회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부동산회사, 건설업체의 잇따른 파산은 은행들에게 엄청난 부실채권을 안겼다.

<파산>

<파산>

<파산>

<파산>

시중은행에 12조엔의 공적자금이 투입됬지만 연쇄부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파산>

<파산>

정부차원에서 채권회수를 위한 채권관리기구를 신설했다. 사금융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채권을 회수했다.

<야반도주>

부실채권으로 인한 은행들의 잇단 도산은

투기목적이 아닌 일반 대출자들까지도 피해자로 만들었다. 결국 담보로 잡힌 집들이 경매처분 당하고 개인파산자들이 급증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은 돈으로 내집마련의 꿈을 이룬사람들도 거품붕괴의 피해자가 되었다.

거품붕괴 그들의 소중한 집들은 깡통아파트로 전락했다.

일본경제의 기반이 무너졌다. 일본경제는 점점 깊은 경제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대규모 불황이 오면서 일본의 대기업들은 대량해고와 임금삭감을 통해 강도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투기는 물론 내집장만을 엄두도 못냈던 서민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1억 중산층 사회란 자부심은 이미 옛말이 되고 중하류 계층이 일본사회의 80%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득이 줄면서 서민들이 지갑을 닫기 시작했고 경기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마이너스 성장이 계속되던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살자 마져 급등하는 등 거품붕괴의 그늘은 깊어만 갔다.

<자살자의 급격한 증가>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더 빨리 금리를 올리고....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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