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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버블보다 더 큰 기업의 붕괴

|||||||||||||| 2020. 8. 30.

일본, 버블보다 더 큰 기업의 붕괴

일본, 버블보다 더 큰 기업의 붕괴

 

1987년 세계 50대 기업

이 표는 80년대 일본의 위엄이니 뭐니 하면 제일 많이 보는 표였을 것이다. 오늘 다룰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표를 먼저 보는 게 가장 이해가 될 것 같다. 1987년, 전 세계 50대 기업 순위 중 절반 이상이 일본 기업이고, 21세기가 되면 일본이 세계 1위가 된다는 꿈에 빠져있던 때였다.

"일본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다."라는 말을 스스로 하고 다닌 시기다.

이제 시계를 1987년에서 15년 전으로 돌려서 1973년으로 가보겠다.

1973년 2월, 일본은 외환관리법을 바꾸어 기존의 고정환율제(1945~1973.2)에서 변동환율제로 전환했다. 1945년부터 1973년 2월까지 1달러는 무조건 360엔이었다. 물론 1971.12부터 1973.2까지는 1달러에 308엔의 고정환율제였다. 이 1971년의 360엔 -> 308엔 체제는 브레튼 우즈 체제 붕괴의 인한 것이지만 이건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다.

변동환율제를 도입한 직후, 일본의 엔화는 1달러에 308엔에서 260엔으로 급격한 엔고 현상을 보였다. 그 해 가을의 일본 엔화는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다시 1달러당 300엔으로 돌아가지만, 오일쇼크 이후 안정을 찾으며 1985년까지 200~250엔 사이를 이동하며 안정적인 상태가 됐다. (물론 중간에 일시적인 엔고로 달러당 180엔까지 오르긴 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실물경제로 돌아가 1973~1985년 사이의 기업 움직임을 살펴보겠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이전의 일본은 경제 규모는 세계 2위였지만, 구미 열강에 비해서 산업 구조는 취약한 상태였다. 섬유와 화학섬유 위주의 수출과 함께 자동차나 전자제품은 2류 조악품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통상산업성(MIDI, 현재의 경제산업성)은 국내 전자산업을 위해 IBM 컴퓨터와 TV의 수입을 규제하고 있었는데, 이는 내부의 방송국 및 정밀가공업체와 외국 정부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었다. 이를 가리켜 Notorious MIDI (악명 높은 통산성)이라고 구미에선 일컫고 있었다.

이와 같은 통상산업성, 대장성 등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 기업은 대망의 1980년대 자동차, 가전 등의 하이테크 산업에 진입했다. 우리가 아는 혼다, 도요타를 비롯하여 망한 마츠시타, 산요 등의 기업이 이때부터 전 세계에 1류 메이커로 자리 잡았다.

위 표로 일본 자동차 업계의 80년대 미국 시장 점유율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79년만 해도 9.2%밖에 안되던 셰어가 오일쇼크 몇 번 터지고 기술 좀 올리니 20%대로 상승했다. 일본에서는 "우리가 태평양전쟁에서 지고 다시 진주만 상륙을 했다!"라고 엄청나게 좋아했다.

미국은 카터 정부가 물러나고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Japan Bashing(일본 때리기)를 구상하고 있었다.

필요에 의해 그래프를 잘랐지만, 빨간 그래프가 수출이고 녹색 그래프가 수입이다. 80년대 들어 수출이 수입을 앞지르기 시작하더니 거의 10조 엔 이상 차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눈금 1칸당 10조 엔)

일본의 수출이 날개 돋친 듯 미친 듯이 상승하던 1985년의 어느 날, 미국을 대장으로 나머지 G5 국가들이 일본을 견제할 계획을 세운다.

그건 바로, 플라자 합의이다.

미국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이루어진 이 합의는 일본 엔화를 상승시켜 일본의 대미, 대유럽 수출을 막고 일본 경제를 견제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1985년 9월 22일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미국/일본/영국/프랑스/서독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이 모여 합의했는데, 일본만 독박쓰는 정책이었다.

이처럼 플라자 합의 이전엔 달러당 240-260엔 선이던 엔-달러 환율은 급격히 하락했다. 1986년 말에는 고정환율제 당시의 반에도 못 미치는 달러당 140엔선까지 엔화가 강세를 보였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다시 한번 짚어보도록 하자.

  • 일본의 1985년 1인당 소득은 엔화 기준 2,921,675엔

    • 이를 플라자 합의 이전의 1달러 = 240엔으로 환산 시 달러 환산 소득은 12,173달러
    • 이를 플라자 합의 1년 후의 1달러 = 140엔으로 환산 시 달러 환산 소득은 20,869달러
    • 일본 내 거주자의 엔화 표기 소득은 변하지 않았더라도 환율로 인해 부풀려지는 효과가 생김.
  • 일본의 대미, 대유럽 수출 등 해외 수출이 둔화되고 해외에서 수입해오는 것이 유리해지기 시작함.

    • 3번째 그림에서 86년 이후로 일본의 수출입이 모두 상승하는데, 수입이 특히 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이는 수입량이 상승한 효과보다는 엔화 절상에 의한 효과가 더 크다고 보는 것이 맞다.
  • 해외여행 만세!

    • 실제로 엔화 가치 상승로 신혼여행객이 1박에 수 만 엔 하는 호텔에 묵고 20만 엔짜리 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키기도 했다.

    단순하게 세 가지만 적었지만,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의 시발점이 되는 버블이 시작됐다. 이제부터 일본 국내의 버블이 아닌 버블로 인한 일본 자산의 해외 매집에 대해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1. 쌀처럼 씹어먹자! 그래서 米國이다!

일본 기업은 지갑도 든든하겠다, 일본 정부가 뒤도 봐주겠다. 겁이 없는 미친놈으로 변신해했다.

록펠러 센터

뉴욕에 갔던 사람들은 다 알만한 록펠러센터다. 이 록펠러 센터는 당시 미국인들에게 "Spirit of America"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이걸 미츠비시가 2200억 엔에 사버렸다.

그 외에도 일본 기업이 미국에서 구매한 대표적인 부동산 혹은 관련 기업은 아래와 같다.

  • 1986년 국제흥업, 쉐라톤 호텔 일부 인수 (팰리스, 와이키키, 마우이 등)

  • 1986년 뉴욕 맨해튼 엑손(Exxon) 빌딩, 미츠이 부동산이 6.1억 달러에 인수

  • 1986년 미국 하와이 하얏트 리젠시 와이키키, 일본 기업이 인수 (리넨)

  • 1988년 아오키 건설이 웨스틴 호텔 주식인수, 웨스틴 호텔은 아오키 건설 산하로 편입됨

- 1988년 세종(セゾン)이 인터콘티넨털 호텔 인수

이 정도로 해두고, 미국 외에도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쪽에도 엄청나게 부동산을 사들였다. 특히 노무라 증권이 영국 런던에 건물을 열었을 때는 당시 영국 총리까지 와서 축연을 할 정도였다니 일본 기업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기업 외에도 개인 자산가를 비롯한 소규모 흥산(興業) 들이 엄청나게 해외 부동산을 사들이는데, 이 배경에는 일본의 미친 은행들이 있다.

일본의 여러 도시은행들이 일본 내 부동산을 가진 사람에게 담보가 대비 120% 이상의 대출을 해주었다고 하지만, 국책은행도 이런 짓을 했다.(도시은행 : 일본에서 시중 은행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이라면 국민은행, 하나은행 등이 이에 속한다.)

이 버블에 일조를 한 국책은행은 바로 "일본 장기 신용은행", 줄여서 장신은(長信銀)이라고도 하고 LTCB라고도 한다. 초기에는 단순히 산업이나 상업회사에 장기로 돈을 빌려주는 역할을 했지만, 이후에는 정치가들의 이권이 연결되어 검은돈의 대출을 맡기도 하고 앞뒤 없이 돈을 빌려주는 등, 일본 발 제2 금융 빅뱅을 불러오는 미친놈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가령 이 미친 장신은이라는 놈이 해놓은 짓거리의 일부를 들여다보면 아래와 같다.

1989년 6월, 호리에 테츠야 은행장이 장신은 행장에 취임을 하고, 제6차 장기 사업계획이라는 것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6차 장기 사업계획에 반대한 임원들은 다 추방시켜버리고, 대출 확대를 적극적으로 벌인다. 정치가들이 원하면 빌려주고, 변변찮은 놈도 적당해 보이는 구실만 있으면 돈을 빌려주니 은행에는 부채만 쌓여간다. 거기에 은행 자기 자본금 비율 (BIS ; 은행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신의 돈)따윈 안중에도 없으니 대출은 늘고 늘어 1991년 12월, 호리에 행장은 그룹 전체의 부실 채권이 2조 4천억 엔을 돌파했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이는 버블 붕괴의 서막을 알리는 일이었다.

일본 기업과 자산가, 그리고 은행이 미친 듯이 돈을 빌려주고 부동산을 사는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첫째로, 일본 내부의 부동산 가격의 미칠듯한 오름새에 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장신은행을 비롯한 도시 은행들은 부동산 담보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는 대출을 무조건 해줬다.

일본 도쿄도(23개구)의 토지 가격

위 그래프는 일본 도쿄도(23개 구)의 토지 가격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다. 편의상 93년도까지 잘랐지만 그래프의 미칠듯한 오름폭이 보인다.

이 거래 가격의 단위는 1m^2(1평은 3.3m^2)인데, 버블이 한참 낀 시기에는 0.3평 정도에 260만 엔 정도였다는 것이니 얼마나 큰 버블인지 알만하다.

이제 이 그래프를 보면 납득이 갈지도 모르겠다. 도쿄의 주요 정부기관이 다 모인, 우리로 따지면 세종로와 같은 도쿄도 치요다구의 토지 가격 변화도 이다. 1m^2에 1600만 엔....

이런 시절이 몇 년 지속되다 보니 땅 값이 떨어질 것이라고는 예측할 수가 없었고, 다들 땅을 담보 삼아 돈을 빌리는 게 당연시되었다. 물론 우량 기업일수록 알짜 토지가 많아서 돈을 막 빌려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둘째로, 무작위 대출의 이유로는 주식시장의 광란을 들 수 있다.

일본 닛케이지수

이 그래프는 1985년 말부터 1992년 말까지 일본 닛케이지수(동경 1부)의 지수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다. 버블 꺾인다는 시기인 1990년 직전에 3만 후반을 찍고 하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들 알다시피 주가가 오른다는 것은 기업의 가치가 오른다는 말이다. (그게 진짜로 실적이 좋아서 오르건 작전에 걸려서 오르건.) 기업의 가치가 오른다는 것은 거래은행에서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일본의 주가지수는 우리처럼 1980년을 100으로 잡고 몇 배로 뛰었나 보는 것이 아니라, 동경 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된 주식의 평균 가격을 매겨서 수치로 보여주는 거다. 그런데 하위 주까지 포괄했음에도 한 주에 4만 엔에 가까운 가격을 보여주고 있으니...

여기서 왜 주식 이야기를 하냐면, 사실 일본 기업이나 자산가들은 초기에는 일본 내 토지를 매매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일본 내에서 더 이상 구매할만한 토지가 없게 되자 밖으로 눈을 돌려버린 것이다. 그 대상이 바로 미국의 상업 빌딩이나 일본인들이 자주 놀러 가는 곳의 리조트 건물이었다.

일본 기업 사장이라고 생각해보면, 일본 내 토지 광풍과 주식 폭등으로 회사 자산은 2배로 늘었어, 게다가 플라자 합의로 달러도 반토막 나서 260엔 하던 게 130엔이 되어버려, 그럼 달러로 엔화를 바꾸면 옛날에 비해 4배가 되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 같은 화폐경제의 거품질과 환율 조작으로 인해 일본 기업들은 해외로, 해외로 몰려나갔고 이게 자기네 목을 졸라올 줄 몰랐던 것이다.

2. 재주는 원숭이가 부리고, 돈은 누가?

돈을 맘대로 찍어내고, 내 돈이 줄지 않고 불어만 나는 태평성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런 세상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이야기다.

1989년 12월, 동경 증권거래소의 직원들은 이상한 낌새를 느껴.

하늘 모르고 치솟던 닛케이 225 지수가 슬슬 떨어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말 랠리에 힘입어 1989년 12월 29일 38,916엔이라는 희대의 대기록을 세우고 일본 증시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새해부터 주가는 떨어지기 시작한다.

1년 후인 1990년 12월 28일, 닛케이 225는 1년 전 대비 1.5만 엔 이상 떨어진 23,849엔으로 한 해를 마무리한다. 이게 끝이 아니지, 닛케이만 빠진 게 아니라 부동산 가격도 대거 빠지면서 은행들은 자금 회수에 들어갔고, 일본 경기는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은 이래저래 버틸만했지만 은행에서 돈을 끌어온 개인 자산가나 소규모 흥산들은 은행의 자금 회수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1. 일본 국내의 토지를 소유한 경우

    • 일본 국내의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었고 하락 추세이므로 1등급 토지(도심 상업지)가 아닌 이상 거의 팔리지 않는다.

    • 팔리더라도 상투 잡은 놈은 어이없는 수준의 가격으로 팔아야 겨우 대출을 갚는다.

    1. 해외의 토지를 판다.
    • 해외 토지를 팔아도 급매이다 보니 제 값을 다 받을 수 없고, 애당초 사무라이 머니가 모여 만든 버블이라 현지에선 그 가격에 사겠다는 놈이 없다.

    • 눈물을 여름철 장맛비 오듯 흘리며 급매를 하는 수밖에 없다.

    • 근데 환율은 경제가 병신이 되어가는데도 엔화 강세가 이어져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한다.

    그나마 국내 토지의 경우는 팔린 돈이 국내에서 도니까 다행이라고 쳐도 해외 부동산을 잡은 사람은 가격은 가격대로 떨어지고 환차손(환전 손해)은 환차손대로 보고 돈은 현지인만 버는 재주는 원숭이가 넘고 돈은 미국이 챙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근데 일본 대기업은 이 상황에서 멀쩡했을까? 위에선 '버틸만하다'라고 했지 멀쩡하다고는 안 했다.

    'Spirit of America'를 산 미츠비시는 버블 터지고 몇 년 뒤인 1995년, 미국 연방법원에 현지 운영법인 파산 신청을 내고

록펠러 센터의 14개 동 중에 12개 동을 매각시켜버렸다.

그리고 그 보다 작았던 아오키 건설은 1990년 후반,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웨스틴 호텔 주식을 전부 판매, 운영을 포기해버렸다.

인터컨티넨털을 인수했다는 세종이라는 기업은 어디 갔는지 찾아볼 수도 없고..

당대 대기업이던 미츠비시가 몇 년 버티다가 뱉어낸 마당에 은행과 사채를 낀 소규모 투자가들이 멀쩡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일본 기업은 대마불사, 불패라고 믿었던 부동산 시장에서 뒤통수를 맞고 미국에 이중으로 돈만 바치고 물러났다.

근데 기업은 더 골치 아픈 일이 있었다. 부동산은 처분했다고 해도 엔-달러 환율은 계속 엔화 강세라 부동산을 판 달러를

일본으로 가지고 올 수가 없었다.

아까 위에서 땅값 2배, 환율 1/2(260엔->130엔), 곱이 4배!

근데 이젠 역으로 땅값은 1/2토막, 환율은 엔화 강세, 내 돈은 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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