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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 2020. 9. 1.

830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1.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려 했던 이유는 뭘까?

 왜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웠는지 한번 그 배경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다.

 

 바야흐로 삼한이 신라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다. 이때부터를 소위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최근엔 사진에도 나오는 것처럼 발해도 우리 한민족의 나라인데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가 과연 합당한가?라는 논리가 생겨났다.  이제는 거의 대부분 통일신라와 발해를 아우르는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라고 불린다. 어쨌든, 이 사진이 왜 나오느냐면 바로 이때 섬나라 일본이 신라를 침공해야 한다고 운운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는 결국 신라의 통일로 마무리가 되었다. 지금이야 우리가 당시 삼국을 같은 조상이라고 취급하지만 당시의 삼국은 그저 남의 나라라고 여겼다. 그래서 신라는 급격히 넓어진 영토와 다른 양식의 백제, 고구려의 백성들을 품으려고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럴 때에 바다 건너 섬나라인 일본에서는 "저기 신라와 당나라가 혹시 우리를 쳐들어오지 않겠어" 라면서 신라와 당이 혹시 우리를 침공하지는 않을까 하고 극도의 불안과 공포심을 나타났다. 그래서 당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주요 루트 중 하나인 규슈지역에 축성을 하면서 동시에 도읍을 옮기니 많이 하는 불안감을 보였다.

 참고로 역사에 관심 많은 사람들은 잘 아는 일본의 신공 왕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의 프로파간다가 이 시기에 생겨났다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신라가 통일을 한 여세를 몰아 가뜩이나 우리가 백제 구원한다고 병력을 보냈었는데 그걸 꼬투리 잡아 우리를 조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이 신공 왕후라는 가공의 통치자를 만들어 신라에 대한 공포감을 이겨내었다는 논리였다. 이렇게 일본은 신라가 무서워 벌벌대는 이러한 때에 신라 또한 일본을 썩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면 신라와 일본 모두가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 또는 위대한 나라라고 여긴 상태에서 독자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외교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원래 당시부터도 되지도 않는 국력 가지고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정신 승리하면서 천황이라는 칭호를 써가면서 본인들을 과대 포장했었다. 하지만 신라 역시 스스로를 큰 나라라고 여기면서 외교관계를 진행시켜 나갔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하기 전까지는 국호를 그저 "신라"라고만 표기를 했다.

하지만 삼국통일을 한 이후에 신라는 대놓고 스스로의 국호를 대신라(大新羅)라고 칭했다. 동양권 국가들의 세계에서 큰 대 (大)라는 한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국가 모두 주변 국가들을 번국(藩國) 취급하면서 외교를 진행시켜 나가는 방식이 두 국가의 외교관계에서 끊임없이 양국 간 갈등을 초래하게 되는 사태로 발전했다.

 또 다른 참고사항으로 심지어 일본은 자신들보다 국력이 강한 발해를 상대하면서도 정신승리를 써먹으면서 발해를 제후국 취급했다. 발해가 먼저 보내야 일본은 답사를 보내는 수준이었으니 말 다했다. 발해 입장에서도 미개한 섬나라 잡것들이 고구려의 후손이자 하늘의 후손 즉 천손(天孫) 사상 가지고 있는 우리를 계속 아래 놈 취급하니까 아니꼬웠지만 당시 건국 초기 사방이 적국이었던 발해는 가뜩이나 외교적으로는 고립이었다.

문무왕 표준 영정

 

경덕왕

이러한 동북아의 상황 속에서 신라의 입장은 발해는 왜놈들에게 굽히지만 신라는 발해와는 달랐다. 즉, 신라는 일본의 비위를 맞춰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왜냐면 나당전쟁(羅唐戰爭) 이후 다시금 신라가 당나라와 관계를 회복하면서 동시에 당나라 제후 서열 1위에 해당할 만큼 외교적 입지가 매우 단단할 뿐만 아니라 위에 사진에 나오는 통일 군주인 문무왕 이후부터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 효성왕, 경덕왕에 이르는 왕의 라인이 이어지며 국력신장이 지속되며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때에 신라가 굳이 꿇릴 게 없는데 왜노국 족속들에게 아쉬운 게 없으니 기어 들어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신라와 일본 사이에 지속된 갈등이 감정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734년 왕성국(王城國) 사건이다. 성덕왕 때에 왜구가 쳐들어오게 되는데 그걸 격퇴한 뒤 직후 신라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게 되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신라는 그동안 써오던 신라라는 국호를 국서에 쓰지 않고 왕성국이라는 이름을 국서에 기입했다. 왕성국은 한국의 사서에선 별로 등장하지는 않는데 여기서 왕성국이 뭐냐면 유가의 5경 중 하나인 서경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서경에서는 황제국과 번국간 주종관계를 명시해놓은 글이 있었는데 그 글에서 최고의 개념이 바로 왕성국이다. 즉 성덕왕 때에 취했던 입장은 신라는 왕성국이고 일본은 번국. 즉, 제후국이라는 입장이었다. 일본 입장에선 "우리들의 두목님을 놔두고 지들이 최고라고 하다니, 이게 뭐하는 짓이냐?" 라며 사신을 문전박대했다.

 왕성국 사건 이후 일본은 2년이 지난 후 신라에 관계 개선 또는 왕성국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을 하려고 하는 사신을 파견하게 되지만 신라는 사신의 입국을 불허했고 서로의 송곳니를 더욱 드러내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서기에 따르면 철저히 외교적 수사에 따른 과거의 외교기록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일전의 예의를 잃었다"라고 표현하며 일본은 격앙하였고 심지어 신궁에 신라의 무례함을 고하면서 신라를 치자는 여론이 궁중 내부에 생겨났다. 심지어 일본의 입장에서 조공품인 신라의 선물이 신라 측은 토산품이라고 쓰면서 왜 조공이라 쓰지 않냐 하며 따지기 시작했고 신라는 이를 위해 방문하는 일본 측 사신에게 연달아 "너희들은 오만하고 불손하다!"라고 하며 쫓아내게 되고

오만하고 불손하다는 이유로 거진 3차례가 넘는 사신들이 쫓겨나게 되자 일본은 드디어 폭발을 하게 되고 "신라에게 우리 위대한 일본의 힘을 보여줘야 해!" 라며 드디어 신라 침공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2. 일본의 본격적인 침공 준비

 

 

 758년 일본의 정사(正使) 오노노 다모리(小野田守)가 발해에 국사로 파견되었다. 위에도 언급되었는데 발해는 당시 동아시아 상황으로 인해 국력이 약한 일본의 지들만의 하늘의 황제인 왜노국 우두머리의 비위를 맞춰주며 외교를 진행했고 이에 만족한 당시 일본은 자연스레 발해를 하대했고 발해가 사신을 보내야 자신들이 답사를 보내던 방식에서 이렇게 일본이 먼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발해와 일본은 사이가 나빠 사실상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었다. 왜냐면 752년에 발생된 발해 국서의 단어 하나가 없다고 일본이 난리법석을 떤 것 때문이었다.

 

 752년 발해의 3대 가독부인 문왕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그 사신이 전해준 발해의 국서에 발해가 왜국 우두머리의 "신하(臣下)"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또한 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해에 답사를 보내 "왜 너희는 우리의 신하가 아니냐?"라며 따졌고 그러자 외교 고립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한수 접어주고 들어갔던 발해의 내부에선 일본의 어이없는 주장에 이제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라는 의견과 함께 발해가 가지고 있던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입장 즉, 하늘의 후손이라는 천손의식에 큰 금을 가게 만들었다.

 이러한 일본의 오만함은 발해를 화나게 만들고 결국 발해는 "우리는 고구려의 자손인데 뭘 니들 신하야" 라며 격앙했고

결국 일본이 먼저 보내는 사신이 도달하기 전까지 6여 년간이나 사신 교류가 없을 만큼 상태가 틀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사신을 먼저 발해에 보낸 이유가 있었다. 주제답게 일본은 신라를 먼저 침공하려고 시도했고 이때 발해의 참여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잘난 신라라도 양쪽에서 침공하면 먼저 항복을 하지 않겠냐는 마인드였다. 발해는 이런 일본의 주장에 대해 겉으로는 찬성하며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발해가 겉으로 찬성하자 일본 조정은 759년 갑자기 전국적으로 500여 척의 배를 만들라는 명령을 일본 전토에 하달하게 되고 구체적으로 만들 배의 척수를 지역별로 할당했고 이를 완수할 기한을 3년을 줬다.

 또한 761년 "미노"와 "무사시" 지역의 소년들을 선발해 신라어를 배우게 했다. 참고로 신라어는 현재 한국어의 원어가 되었다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현재 한국의 자료에서는 신라어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힘든데 남아 있는 게 바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어 한 문장이다. 그곳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왜군이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왜의 장수가 줄행랑을 치자 신라 장수가 추격을 했다. 하지만 그때 왜장은 비교적 좋은 말을 타고 있어 추격을 뿌리치게 되는데 이때 신라의 장수가 탄식하며 "구 수니 자리(久須尼自利)"라고 말했던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신라어를 그대로 적은 것인데 뜻은 모른다"라고 부연되어 있다. 당시의 상황이나 문맥 상 아쉬움을 토로하는 표현 같지만 다른 말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순 없다.

 

 그리고 762년 규슈에 위치한 신공 왕후를 모신 신사 향추묘에 신라를 침공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3. 말만 끝난 침공계획

 

 신공 왕후에게 기도하면서 762년 신라를 친다는 계획은 결국 위로 붕 뜨게 되고 흐지부지되어버렸다. 위에서 설명했듯 500척에 달하는 배는 물론이고 소년들에게 신라어를 가르치던 의욕적인 행보와는 달리 결국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물론 학자마다 다르다. 하지만 주된 이유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발해가 겉으로는 찬성하며 좋소좋소 해서 일본이 침공을 진행했지만 막상 침공하려 하니 발해는 그게 실질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발해는 겉으로만 찬성하며 상황을 봤는데 일본이 진짜 신라 침공 시도를 하자 곧바로 뒤통수를 시전 했었던 것이다. 발해가 판단하기에는 일본의 신라 침공을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고 판단했고 여차하다가는 동북아의 세력균형이 깨어질 우려가 있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신라도 이러한 이상 징후에 대비를 하는 과정, 특히 발해의 침공에 대비해 신라의 경덕왕은 현재의 황해도 평산 (그때는 대곡성) 주위로 6개의 성을 축조하게 되었고 전형적인 대(對) 발해용 성임을 안 발해는 더욱 이 되지도 않는 계획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게다가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요동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고 신라가 대비 잔뜩 해놓은 상태에서 약한 일본이 같이 침공하자고 했을 때 곁다리 걸쳤다가 빈 요동에 당나라의 반란역도 안녹산이 난을 잃으키자 발해는 발해 입장에선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에서 신라 침공을 주도하던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세상을 떠나며 일본에서도 신라를 침공하겠다는 계획은 무산됐다. 또는 나카마로가 실제로 신라를 치는 것을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선 효종 때의 북벌 정책처럼 자국 내 여론 반전을 위해 그 지랄을 떨었다고도 해석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렇게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지만 그 이후의 임진왜란도 그렇고 식민지배도 그렇고 일본의 대(對) 한반도 정책에서는 필연적으로 무력을 수반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고 이것에 대해서 우리 한국민들은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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