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자 합의 -일본 버블 경제의 원인
플라자 합의 -일본 버블 경제의 원인
0. 멈출 줄 몰랐던 일본의 성장, 이에 불안감을 느낀 미국
1970년대 소니가 워크맨이라는 카세트를 처음 선보인 이후 일본의 경제성장은 소니를 비롯한 수출기업들이 주축이 되면서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결과적으로 80년대의 고속성장을 알리게 만든 뿌리가 되면서 수많은 외화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일으키게 된다.
특히 전자업계와 자동차 업계는 그 어떤 국가들조차도 따라 잡기 힘들 만큼 엄청난 부를 축적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 업계 기업들은 예상 밖의 기술력과 창의성 그리고 섬세함까지 내세우면서 소비자들을 매료시켰고 소비자들은 앞다투어서 일본산 제품을 열렬히 구매하면서 일본산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쌓게 해 주었다.
외화는 점차 늘면서 일본은 제1의 경제대국인 미국을 노려보았고 그 수준은 미국의 턱밑까지 올 정도로 미국 제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것을 안 것일까? 일본의 맹렬한 추격에 당황한 미국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다른 나라도 아닌 아시아 그것도 원폭 두방 맞고 현자 타임 온 일본이 벌써 지네 턱밑까지 따라왔으니 미국으로써는 지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미국도 일본의 성장을 막기 위해서 더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당시 미국은 70년대 초 경제 불황과 물가상승이 동시에 펼쳐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높은 수준으로 올렸고 이것으로 인해서 달러의 가치가 상당히 오르게 된다, 즉 달러 강세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서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와 대 서독 무역 적자 수준은 점점 증가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재정 적자까지 나타나게 만들면서 80년대 초에 집권한 레이건 행정부에게 '쌍둥이 적자'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된 어퍼컷을 날리게 된다.
(82년도에 금리가 내려갔지만 적자 수준은 여전히 줄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감을 느낀 미국민들은 날로 성장하는 일본제 자동차를 부수면서 격렬한 시위를 보여주었고 레이건 행정부에게 강한 보호주의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말로 쪼아대듯이 압박했고 결국 레이건 행정부는 특단의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1. 플라자 호텔에 모인 G5 경제 수장들.. 세계 경제사의 흐름을 바꾸다.
레이건 행정부가 내린 결정은 바로 선진국인 G5의 경제 수장들을 미국으로 불러다 놓은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경제 해법을 위한 회담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결정은 곧이어서 언론들의 보도로 이어졌고 이윽고 경제 선진국이라 불린 5개국 정부도 이에 동의하면서
각국을 대표하는 경제 수장들은 그렇게 회담이 열리는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로 집결하기로 한다.
지금은 G20으로 늘어났지만 7~80년대,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었던 국가들은 5개 국가들이었고 이들 국가들의 경제력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우위였고 당시로써는 세계 경제력의 중심점에 놓인 국가들이었는데 그런 G5에 해당되는 국가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프랑스
독일
미국(주최국)
영국
그리고 일본
이렇게 구성되었으며 이들 국가들의 공통점이라면 2차 대전에 참전했던 국가라는 점과 종전 직후 과감한 개혁과 경제정책 등을 펼치면서 나와서 선진국 반열에 오른 점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데 어쨌든, 이러한 선진국들의 모임은 단순한 모임을 넘어선 규모였고 80년대의 경제상황이 아닌 앞으로의 경제상황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회담이어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높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수많은 관심 속에서 1985년 9월 22일, G5 경제 수장들은 회담장소인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만나게 된다.
만남을 가진 5개국 경제 수장들은 예정대로 회담을 진행하였고 역사에 길이남을 회담은 플라자 호텔에서 천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2. 세계 경제사에 길이남을 플라자 합의, 합의 직후 바로 반응한 세계 경제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주최국인 미국을 비롯한 나머지 국가들은 달러 강세 해결에 대해서 한 목소리로 제창하면서 나왔다.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 G5 경제 수장들은 달러 문제를 포함한 나머지 문제점에 해결책을 찾았고 언론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되는데 그들이 회담에서 얻어낸 결론들은 다음과 같았다.
- 첫째. 환율의 현실화
- 둘째. 펀더멘탈(사람으로 따지면 기초체력을 말하는 것으로 경제 기초를 뜻하는 단어) 현상 해결
- 셋째. 엔화 가치는 상승 달러 가치는 하락
- 넷째.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이 필요할 시 달러를 제외한 주요 통화의 평가절상을 유도, 순조롭지 못할 경우 정부 개입으로 목적 달성
이 네 가지 사안들을 포함한 사안들은 곧바로 언론들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발표되었고 이후 G5는 원활히 해결했다는 말과 함께 합의를 이루게 된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플라자 합의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냥 이렇게 가만히 넘어갔을 합의였냐는 게 문제였다.
합의를 이루는 시작점에서부터 해결까지 G5에 대한 말들은 이어졌었다. 특히 가장 말이 많은 부분은 위에 언급한 셋째와 넷째에 대한 말들이었다. 플라자 합의가 일어났던 80년대에는 아까 말했듯이 달러가 강세였고 엔화가 약세였던 시기
달러가 만국 공통화폐인걸 생각하면 달러를 찍는 나라 미국은 합의과정에서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달러의 약세를 유도하려고 가치를 하락시켰고 달러를 제외한 주요 통화의 평가절상을 유도하기 위해서 약세였던 엔화를 상승시키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미국은 세계 최대의 소비대국이자 기축통화국이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일본산 제품들이 미국을 통해서 판매되어야 시장의 상승이 일어났고 기축통화 덕택에 미국 시장을 빨아먹고 있었던 게 일본이었던걸 생각하면 일본에게는 그냥 아닥 하는 꼴이었다.(독일 마르크화도 역시 일본의 엔화처럼 가치를 상승시키었다)
물론 이과정에서 일본이 거듭 항의해서 합의를 이루어내는데 다소 진통은 있었고 주최국인 미국마저도 진땀 흘리게 만들어서 쩔쩔매었다는 부분이 있었지만, 일본에게는 큰 손해를 불러일으키게 만든 합의였으니 거의 말다 한 부분이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어쨌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분위기를 거친 합의가 언론들을 통해 발표가 되자 세계 증시는 바로 효과가 오기 시작하였다.
채택된 지 일주일 후, 독일의 마르크화와 일본의 엔화는 각각 7~8.3% 상승한 반면 달러는 2년 동안 30%로 급락하는 저력(?) 보였고 달러 약세 덕분에 미국의 제조업들은 가격경쟁력을 회복한데 이어서 미국의 대유럽 무역적자도 줄어들게 되면서 효과가 나타나는 인증을 하였지만 정작 대일본 무역적자는 엔화 대비 달러의 가치가 50%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줄지 않아서 큰 해소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미국과의 수출로 인한 타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 수출 위주의 경제를 지탱하고자 저금리 정책을 실시하였고 실시와 함께 주식과 부동산으로의 투기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잘 알려진 버블경제(거품경제)를 나타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달러가 약세인 것을 틈타 미국 자산 사들이기와 고부가가치 상품 생산, 해외여행 붐 등등이 발생하는 등 플라자 합의는 세계 경제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 효과를 나타나게 만들었다.
희대의 돈지랄이 이때부터 나온 것이었다.
3. 모든 것을 뒤바뀐 플라자 합의, 일본의 버블경제 종말과 잃어버린 10년을 부르게 하다.
엔고 현상으로 인한 정부의 무리한 저금리 정책 그리고 이어진 달러 약세에 따른 일본인들의 적극적인 투자 러시 등등 85년 플라자 합의를 전후해서 일본은 모든 면에서 다르게 나오고 있었다. 저금리 정책에 탄력 받은 부동산과 주식시장은
저금리 효과에 따른 투기가 이어졌고 투기는 또 다른 투기를 낳으면서 버블경제를 소환하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었다.
물론 일본에게는 경제 성장이란 이유로 그늘에 가려져있었지만 일본의 마치 고삐 풀린 미친소처럼 계속 돌진해있었고
80년대 후반까지 일본은 미국을 따라잡기 직전이라 하면서 승리의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1990년 새해, 일본의 주식시장은 새해 첫날을 기점으로 부동산을 필두로 한 각종 버블경제가 한꺼번에 꺼지기 시작하였고 이는 곧 상승세였던 일본의 경제력을 완전히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완전히 꺼지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다 따라잡을 것처럼 미국을 위협하던 일본은 연쇄적으로 꺼져가는 버블처럼 사라졌고 일본은 그렇게 유례없는 상승세를 허무하게 끝내고 잃어버린 10년이란 이름으로 최악의 경제 상황을 겪게 된다. 그 이후는.. 우리들이 생각한 일본의 모습을 보이게 만들었다.
지금도 경제 학자들은 플라자 합의로 인해서 일본의 전성기와 종말이 동시에 찾아오게 만든 결과물이라 하면서 한때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의 추락은 이 플라자 합의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할 정도로 플라자 합의에 따른 일본의 모습에 말들을 이어가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들
1. 여담으로 1989년 미쓰비시는 미국 뉴욕에 위치한 록펠러 센터를 약 2000억 엔으로 구입하였다. 이때 구입하기까지의 과정이 뉴스를 통해서 언론에 보도하자 미국은 보도가 나온 그다음 날 표지를 이렇게 장식하였다.
'제2의 진주만 공격이다' , '미국의 심장을 사무라이들이 도려내었다'
이런 식의 제목이 나올 정도로 미국민들의 존심을 건드리는 등의 위엄을 나타냈지만 후에 버블경제가 나타난 걸 알고는 2000억 엔의 거품이라는 얘기를 하는 등 비웃음으로 전락하게 만들었지만 록펠러 센터 구입은 일본 기업의 국외 부동산 구매의 상징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물론 당시였지만..
2. 협의 당시 일본은 크게 항의했었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협상과정에서 쟁점이었던 엔 달러 환율을 어느 정도 선까지 정하느냐 과정에서 일본이 미국에 항의했던 것, 원래 엔 달러 환율 가격은 1달러에 250엔이었지만 일본 측은 이런 미국의 주장에 거듭 항의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일본은 냅킨에다가 숫자 125라고 적은 채 먼저 회담장을 나왔고 이렇게 되면서 합의를 보았다는 일화를 낳기도 했다.
- 협의 당시에는 미국으로 시작해서 미국으로 끝나는 협의였다. 일본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아닥 한 이유도 위에 언급한 미국 덕분에 일본 경제가 성장한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미국의 협박에 가까운 협의 분위기라는 점에서 일본으로써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4. 엔화 강세와 저금리 정책으로 인해서 부동산 가격은 투기붐과 함께 버블 경제를 형성하게 하였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도쿄의 집값이 일본 평균 집값을 가격이 미친 듯이 높았고 도쿄에서 집 사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 할 정도로 집값이 비쌌었다. 그래서 생긴말이
'도쿄 땅을 다 팔면 미국 영토를 살 수가 있다.'
5. 이때 우리나라는 이러한 플라자 합의 덕분에 역사상 가장 경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플라자 합의에 따른 달러 약세로 인한 저달러와 석유 파동 이후 안정화되었던 저유가와 여기에 저금리까지 이어지면서 이른바 '3 저현상'으로 최고의 호황기를 보내게 된다. 이러한 전성기 시절 때 우리나라는 무려 10%의 고공 성장으로 최전성기를 맞았고 이는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불멸의 기록을 가지게 된다.
6. 아까 플라자 합의에서 이뤄낸 내용 중 넷째란에 적힌 내용은 일본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준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자국 화폐 단위를 절상 그것도 2배나 절상한 데다가 제조업으로 연명하는 나라라는 점에서 이런 것은 힘든 노릇이었는데
이해가 안 된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나라 원달러 환율이 500원대인 상황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제품은 오히려 더 잘 팔렸고 그딴 거 뭐냐는 식으로 플라자 합의를 우습게 보면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더불어서 달러 약세를 너무 지나치게 한다는 이유로 1987년에는 루브르 합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7. 버블경제 시절 일본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강 감이 안 올 텐데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일본의 취업준비생이 면접 볼 때 각 기업에서 주는 차비를 모아서 차를 샀었고 이후 더 모아서 집까지 살 정도의 형편이 되었다고 한다. 근데 그런 기업들이 준 차비 평균 금액이 3~5만 엔 수준이었다는 점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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