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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난4

최고 북방군의 수장, 이괄의 난 - 4 이괄이 한양으로 입성하자, 한양에 남아있던 하급 관리들은 관복을 차려입고 나와 영접했다. 한양 주민 일부는 길을 닦고 황토를 뿌려 이괄의 군대를 환영했다. 그리고 이괄이 한양으로 왔던 흥안군(선조의 10번째 아들)을 새 왕으로 옹립하니, 조선 천하에 2명의 왕이 양립한 것이었다. 이괄은 자신이 옹립한 새 왕인 흥안군의 이름으로 한양 인근 고을에 선전관을 파견했다. 한양 인근 고을은 크게 혼란에 빠졌으며, 때마침 인조가 보낸 선전관도 한양 고을에 도착하였다. '한양은 역적에게 넘어갔다. 한양에서 오는 선전관은 모두 목을 베어라!' 인조는 있는 힘을 다해 충청도 경계로 들어갔으며, 이때 충청병사 이완(이순신 장군의 조카)이 인조를 맞이하였다. '전하께오서 역적 무리의 화를 당하셔 이리 고초를 겪으시니... .. 역사 2021. 3. 9.
최고 북방군의 수장, 이괄의 난 - 3 이괄이 이끈 반란군은 순식간에 대동강을 넘어 황해도로 진입했으며, 정충신과의 황주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괄의 군대는 예성강 방어선을 뚫기 위해 계속 전진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황주 전투에서 패전했던 정충신이 추격하고 있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정충신은 이괄을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 정충신이 아닌, 이중로를 주목해보자! 내가 첨부한 위 지도를 보면, 이중로의 군대는 예성강 방어선에 주둔하고 있다. 이중로는 조총에 관심이 많아 직접 사격술을 배웠다고 하며, 인조반정 때에는 인조를 도와 3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때 이중로는 예성강 방어의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그가 거느린 황해도 관군은 급히 동원되었기에 군사의 질이 매우 떨어졌다. 게다가 이중로는 예성강 방어에 부임하기 .. 역사 2021. 3. 7.
최고 북방군의 수장, 이괄의 난 - 2 1624년(인조 2) 1월 24일, 조선을 지켜야 할 최정예 북방군 13,000여 명은 이괄의 지휘 하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괄은 국경에 오래 일했었기에 국경 지역의 지리와 관군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괄 자신은 뛰어난 무장이었으며, 그 휘하의 북방군은 누차 언급했지만 조선의 최정예군이었다. 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괄의 본영이 위치한 영변 지역은 한양과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영변과 한양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인위적(성, 요새) · 자연적(대동, 예성, 임진강) 장애물이 있었다. 특히 평양성에는 도원수 장만이 5,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으며, 평양성은 인조 때 대대적인 보수로 인해 강력한 요새가 되었다. 따라서 이괄은 피해를 최소화하고 단기전으로 끝내기 위해서 주요 .. 역사 2021. 3. 5.
최고 북방군의 수장, 이괄의 난 - 1 한양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양 백성들은 깜짝 놀라 밖을 쳐다보았으며,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창덕궁은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다. 반정군 지휘관 이괄은 말에서 칼을 들고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반정군은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이 반정군의 정체는 누구인가? 바로 능양군(인조)을 지지했던 서인 세력이었다. 하룻밤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광해군은 죄인으로 폐출되었으며, 조선의 새 지존으로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 보내졌으며, 인조는 논공행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겼는데, 큰 공을 세운 이괄은 겨우 2등 공신에 봉해지고 김류와 이귀 등은 서인 세력은 1등 공신에 봉해졌다는 것이다. 이괄은 자.. 역사 2021.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