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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북방군의 수장, 이괄의 난 - 1

|||||||||||||| 2021. 3. 3.

한양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양 백성들은 깜짝 놀라 밖을 쳐다보았으며,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창덕궁은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다.

반정군 지휘관 이괄은 말에서 칼을 들고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반정군은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이 반정군의 정체는 누구인가? 바로 능양군(인조)을 지지했던 서인 세력이었다.

하룻밤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광해군은 죄인으로 폐출되었으며, 조선의 새 지존으로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 보내졌으며, 인조는 논공행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겼는데, 큰 공을 세운 이괄은 겨우 2등 공신에 봉해지고 김류와 이귀 등은 서인 세력은 1등 공신에 봉해졌다는 것이다.

조선 16대 인조(仁祖) 이종

이괄은 자신이 2등 공신이 된 것에 불만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김류 그놈! 그놈이 1등 공신이 된 것은 이괄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거사는 김류가 총지휘관이 되어 지휘하는 게 계획이었지만, 김류는 늦장을 부려 늦게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이귀는 이괄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군사를 총지휘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괄

논공행상 자리에서 이귀는 인조에게 아뢰었다.

"이괄을 병조판서(≒ 국방부 장관)로 임명하여 그 공을 인정하소서!"

옆에선 김류 그 자식이 비웃고 있었다. 이괄은 화가 나서 인조와 여러 신하 앞에서 살벌한 말을 뱉어내었다.

"신에게 무슨 공적이 있겠사옵니까! 다만 일에 임하여 회피하지 않았을 뿐이옵니다. 그런데 어제(반정 당시) 대장인 김류가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아서 이귀가 신에게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는데, 김류가 늦게 왔으므로 그를 단칼에 베고자 하였으나! 이귀가 말리므로 시행하지 못했을 뿐이옵니다."

인조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은 경악하였다. 이귀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이괄에게 벌주를 먹여 자리로 돌려보냈으며, 인조는 이괄을 한성판윤(≒ 서울시장)으로 임명하여 위로하였다.

한편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금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명나라 장군 모문룡은 조선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조선은 천조(天朝 : 명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우리 군대를 도우라!"

국경이 위태로웠기에, 인조는 즉각 '준 전시 체제'로 전환하여 군대 양성에 주력하였다. 당시 63세의 노장이었던 장만 장군은 인조와 잦은 군사 토론을 벌였다. 그리하여 군사 10만을 양성한다는 의견도 오갔지만, 그저 오고 가던 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인조는 북방 방어가 절실했으므로, '북방군 창설'을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전라 · 경상 · 충청에서 장정을 선발했으며, 이는 18,000여 명의 대규모 군대였다. 그리고 당시 사기는 매우 충천하여 이런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우리 전하(인조)께오서 몸소 군사를 거느리시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격할 것이다!"

한편 인조는 장만을 도원수로, 이괄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북방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도원수 장만이 사령관격이었지만, 자신은 5,000여 명의 군대를, 이괄은 13,000여 명의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북방군이 국경으로 떠나는 날, 인조는 장수들을 모두 모아 격려했으며, 장만에게 보검을 하사하고, 이괄에게는 손을 잡아 위로하였다. 장수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인조에 절을 하고 국경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괄만은 고개를 숙이며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나를 내쫓아 보내는 것이오! 영감(인조 측근)은 나를 속이지 마시오!!!"

이괄은 인조의 측근 세력들이 자신을 배척하여 변방으로 보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괄 본인의 심기는 불편했지만, 국경에 도착하고 나서는 군사 훈련에 매진하였다. 이괄은 과연 조선에서는 보기 드문, 아니 당시 유일하게 새로운 신개념으로 군사 훈련에 진력하였다. 바로 조선의 전통적인 수성 전략이 아닌, 평지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는 기동대 위주의 군대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활, 조총뿐만 아니라 칼, 창 등 근접 병장기에 익숙해졌으며, 체력 단련을 위해 북방의 험한 산들을 타고 다니며 날로 날로 강해지고 있었다. 이로써 이괄의 북방군 13,000여 명은 하루하루 조선의 최정예 강군으로 일신하고 있었다.

조선 인조 시기, 국경 배치 상황(군사)

참고로 이괄은 군사적 부문에서 미리 인정을 받아, 광해군대에 하급 무관에서 북병사(변방 총감독 직급)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한편 인조와 신료들은 변방 방위 체계에 대해서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 그 결과 대신들은 평안도 제2의 도시인 안주성에 군사 13,000여 명을 주둔시켜 수성 위주의 전략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동대 위주의 군대를 선호하는 이괄에게는 수성은 맞지 않았다. 곧 이괄은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수성전은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후금군이 국경을 넘는다면, 소신이 그때그때 상황에 알맞게 적의 측방과 배후를 공격해 유린할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괄의 전략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이괄의 상관이었던 도원수 장만만이 이해해줬을 뿐. 게다가 이괄에게는 병력, 무기, 장비, 화약은 충분했지만, 정작 식량이 부족해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전라, 충청도에서 군량을 실어오게 하였지만, 보급은 제때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군사 교대도 잘 이루어지지 않아 여러 혼란이 있었다. 겨우 전라도 군사만이 교대가 원활히 진행되었으며, 다른 지역의 군대는 그 피로가 누적되었다. 게다가 북방의 기후는 매우 매섭고 추웠기에, 전라, 충청, 경상도로 대부분 구성된 이 북방군은 현지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투리도 각양각색이라 이괄은 이를 통제하기가 어려웠고, 지역별로 군의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하지만 이괄은 엄한 군령으로 이들을 통제하였으며, 병사들은 맹훈련을 통해 여러 어려움(식량, 기후)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하여 이들은 지역은 달라도, '정예군'이라는 일체감을 가지고 점점 더욱 단련되게 된다.

1624년(인조 2) 1월 17일, 역모 고변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 역모 사건의 주동자로 이괄과 이전(이괄의 아들)의 이름도 있었다. 물론 이괄은 이와 관계가 없었으며, 전부 무고였다. 그리고 이 역모 사건에는 변방 출신의 장수들 대부분이 언급되어 있었다.

"저놈들은 후금군과 강홍립과 연락을 취해 광해군을 복위시킬 것이다!"

인조는 한양 내부의 주동자들만 체포하게 하였으며, 이괄과 변방 장수들은 혐의를 두지 말고 넘어가라고 명한다. 그러나 서인 세력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고, 이괄을 변호했던 이귀가 먼저 이괄의 소환 조사를 요구했다.

이귀 : 이괄이 몰래 다른 뜻을 품고 강한 군사를 손에 쥐었으니, 기선에 제압해야 합니다!

인조(王) : 이괄은 충성스러운 사람인데, 어찌 반역할 생각을 가졌겠는가?

이귀 : 이괄의 반역 모의는 신이 잘 모를지라도, 그 아들 이전이 반역을 꾀한 것은 알고 있나이다.

인조(王) : 사람들이 경이 반역한다고 무고한다면 내가 믿겠는가?

인조가 강력히 거부하기에, 결국 서인 세력들은 이전(이괄의 아들)만은 소환해서 조사하라고 요구한다.

인조 : 이괄은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이거늘, 그가 아니면 누가 오랑캐로부터 변방을 방어하리오!

금부도사는 즉각 이전(이괄의 아들)을 잡기 위해 이괄의 부임지로 왔다. 이괄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였다.

이괄은 즉시 자신의 측근 장수인 이수백, 기익헌, 최덕문, 이정배를 부르고 소리쳤다.

이괄 : 나에게는 오직 아들 한 명 밖에 없는데, 그 애가 잡혀가서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니 어찌 아비인 내가 온전하리오? 어찌 능히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받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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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익헌 : 부원수 대감께오선 거병하실 것이라면, 정부에서 보낸 금부도사의 목을 베어 군을 통제하십시오!

곧 여러 북방군 장수들이 이괄의 명을 받고 군영에 집결하였다. 이괄은 자신의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고 장수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다른 북방군 장수들은 이괄의 살벌한 기세에 '예, 예' 거릴 뿐이었다.

이괄 : 감히 어기는 자 있으면 내 단칼로 너희들의 목을 베리라!

이괄은 검객을 보내 즉각 정부에서 파견한 금부도사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금부도사의 잘린 목을 들어 북방군 장수와 병사들 앞에 내보였다. 이어 자신의 정예 북방군 13,000여 명과, 이괄을 따르는 항왜 130명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항왜(조선에게 투항한 일본군)는 이후 관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는데, 칼과 조총을 잘 다루는 병사들이다.

1624년(인조 2) 1월 24일의 일이었다. 조선 왕조를 지키기 위해 육성된 최정예 북방 수비군이, 그것도 뛰어난 명장 이괄 휘하에서 그 칼끝을 조선 왕조를 향해 돌린 것이었다. 설마 이들이 한양을 접수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후 전투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들은 야전에서 우수한 전략을 통해 관군을 모조리 격파하고 보기 드문 전략을 내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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