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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세조) -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 시킨 역적

|||||||||||||| 2020. 11. 13.

수양대군(세조) -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 시킨 역적

수양대군(세조) -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 시킨 역적 

조선왕조실록 中 

문종이 수양 대군(문종의 동생, 세조)과 함께 부국강병에 대해 논하다

문종 대왕이 말하기를, 

"수양 대군(문종의 동생) 같은 사람을 병조 판서(국방부 장관)로 삼는다면 과인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세종 말년에 10년 넘게 국가의 정사를 대리 처리할 정도로 의욕을 쏟았던 문종. 얼굴이 잘 생기고 어린 나이에 외교적 예법에도 능해 중국 사신들이 탐낼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세자 시절 때 세종 말년 동안 너무 의욕적으로 일을 한 탓일까? 문종은 재위 2년 3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당했고, 그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집권했다(단종). 

"내가 영의정 부사와 병조 · 이조판서, 내외 병마 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겸직할 것이니, 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수양 대군은 자신을 따르는 무사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켰고, 조정의 군사권 · 행정권 · 인사권을 송두리째 장악했다. 

조정에서는 피바람이 불었고, 세조에게 따르지 않는 자는 죽임을 면치 못했다. 

어린 단종은 유배되었고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문종의 군사력 정비와 논쟁 (문종 vs 세조 킹메이커 신숙주)

1451년(문종 1) 6월 19일- <신진법>을 완성하다

문종은 병약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군사력'에 굉장히 관심을 가졌다. 심지어 군사와 병기에 너무나도 집착한 나머지, 세조의 킹메이커였던 신숙주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세조의 킹메이커 신숙주가 말하기를, 

"궁궐 내에 무기 공장이 너무 많은데, 청컨대 없애소서!

성상(문종)께서 이르기를, 

"군사 무기를 만드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이니, 그만둘 수 없다."

이에 신숙주는 문종의 면전에서 위와 같이 길게 반박했다. 다 읽지는 말고, 대충 요약하면

"그러니깐 중지하라고." 

성상(문종)께서 이르기를, 

"송나라가 문치주의를 택한 이래, 매일 오랑캐의 우환이 있었다. 군사 조련은 진실로 닦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나라를 위하여서 과인이 한 가지 일도 하지 않기를 바라는가?" 

신숙주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하기를, 

"아닙니다. 하지만 군왕이 직접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작은 이로움만을 보고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문종도 목소리를 높이며, 

"어찌 크게 이로운 것이 아닌 줄 아느냐?" 

신숙주가 받아치기를, 

"비록 크게 이로움이 있을지라도, 의리에 견주면, (무기 정비는) 역시 가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둘이 논쟁하는 내용이 길어서 요약했는데, 문종은 끝까지 신숙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종은 서운했는지, 신숙주가 나가고 나서 주변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문(文)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군사를 훈련하고 학문을 흥작 하는 것이 또한 옳은 일이다. 지금 언론에서 궁궐 내에 군사 무기를 보수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는데, 비록 환관을 시켜서 감독하게 하더라도 무엇이 해로울 것인가? 이건 나의 뜻을 몰라주는 것이다." 

문종은 조선을 건국한 시조인 태조 이성계를 존경해왔다. 태조는 "편안할 때에도 군사 조련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고 얼마 후에 사망했는데, 문종은 우리나라(조선)가 태조의 유훈을 받들어 항상 군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종의 노력으로 조선의 화약 기술은 더 발달했고, <신진법>을 통해 조선 중앙군의 진법을 체계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5위 제도의 중앙군을 정비하여 그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문종의 아들을 몰아낸 세조는, 자신의 형인 문종이 정비한 조선의 중앙군을 축소하거나 약화시키는 반항적인 정책을 취하게 된다.

1. 조선 중앙군 - 팽배수(중보병) 

팽배수는 주로 환도(조선 시대 검)와 방패로 무장했는데, 조선 전기 중앙군의 대표적인 보병 집단이었다. 주로 산지가 많은 함경도 등지에서 여진족 토벌에서 산악전을 전개했다. 

팽배수는 총통과 함께 전투에 반드시 투입했으며, 적이 접근하면 창을 던지고(투창) 검과 방패로 아군을 보호했다. 

당연히 창을 던지고 방패를 들었기 때문에 힘과 악력이 굉장히 강했다. 조선 전성기 때 팽배수의 최대 규모는 1만여 명에 달했는데, 세조 때 4천 명을 감축하여 6천 명이 되었고,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이 중앙군 중보병 부대들을 '토목 공사'나 '노역'에 동원했다.

팽배수는 천시받게 되었고, 팽배수의 사기 또한 떨어졌다. 이는 나중에 큰 타격이 되는데, 이 전통이 이어지면서 조선은 근접전 병기를 다루는 군사가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활을 쏘다가 왜적이 접근하면, 활을 버리고 도망친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세조 때 관행이 쭉 이어진 것이다.

2. 조선 중앙군 - 총통수(화기 부대)


 

조선은 화약 무기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태종 때 화약 무기의 원료가 되는 염초의 보유량이 고작 10근도 되지 않았는데,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의 노력으로 '7천 근'까지 증가시켰다. 

게다가 태종은 총통위라는 화기 부대를 설치했는데, 태종 말년에는 총통위의 규모가 무려 '1만 명'까지 증가했다. 그리고 세종 때에는 여러 화포가 활발하게 개발되었고, 세종 · 문종 때에는 신기전이 개발되었다. 

"우리나라(조선)의 총통위는 보병 중에서 가장 강한데, 이제 갑자기 없애버리니 소신들은 의심스럽습니다." 양성지 상소문 中 

세조는 다시 부활시키긴 하지만, 총통위를 없애는 발상부터가 그의 사고방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시애의 난을 경험하고 나서는 아예 화약 무기의 개발과 생산을 자신들의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조선 시대 세종 · 문종 때 개발된 신기전 · 총통 발사 시범 동영상

이후 세조 때 조선의 화약 무기 개발이 끊기면서 명종 때까지 무기 개발은 정체되었다. 그리고 그때에는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다.

3. 조선 중앙군 - 창수(창병)


 


 


 

조선 전기 창수(창병)는 3m 길이의 장창으로 방진을 형성하고 적과 대치했다. 

팽배수가 적의 충격을 막고, 총통수가 엄호 사격을 하면, 창수가 뒤에서 앞으로 전진해 창으로 방진을 형성해 적과 교전했다. 세조는 팽배수와 창수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이들을 궁수(활)로 전환하거나 그 인원을 감축했다. 중앙군의 백병전 능력, 아니 조선 왕조 내내 조선군의 백병전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이상치 않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창과 조총으로 조선 왕국을 유린한 것을 보면, 창의 중요성은 16세기에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세조는 백병전 병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감축하는 우를 범한다.

4. 조선 중앙군 - 사수(활) 

세조는 백병전 병종을 소홀히 대하고, 오히려 사수를 늘려버린다. 우리가 보통 조선에 대해서 '활'을 먼저 떠오르는데, 세조는 사수의 비중을 대폭 늘려버린다. 임진왜란 때는 사수들이 활을 쏘다가 적이 육박하면 도망친다는 기록이 비일비재하고, 이를 엄호하는 백병전 병종이 없어 전투에 자꾸 패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수는 주로 후방에서 엄호 사격을 해준다. 세조의 사수 편재 정책으로, 세조의 군사 정책(총통위 폐지)을 비판했던 양성지는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 정예한 병졸이 10만 명, 용감한 군사가 3만 명"

당시 양성지는 세조의 군사 정책을 비판하고 줄곧 군사 개혁 상소를 올렸는데, 저 상소문은 세조의 군사 정책을 돌려까면서 비판하고 있다. 앞뒤 문맥을 고려했을 때 국왕의 사수 몰빵 정책으로 전투에서 쓸 만한 군사는 고작 "3만 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5. 조선 중앙군 - 도수(장검)


 

도수는 주로 장검을 다루며 팽배수와 더불어 백병전에 특화된 병종이었다. 세조는 전투에서 장검의 활약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팽배수와 창수와 더불어 이 병종도 절반을 감축해버린다.  

"절강과 일본은 검으로 천하를 평정했는데, 검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조선)는 검술을 소홀히 하여..." / 인조 시대 상소문 

그리고 도수 역시 팽배수와 더불어 각종 노역에 동원돼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고, 그 규모가 꾸준히 감축되었으며, 강무 때에도 보병의 동원 규모가 급격하게 감소한다.

6. 조선 중앙군 - 갑사(기병)

그리고 세조 최대의 실책은.


 조선 전기의 핵심 전력인 기병에서, '창기병'을 대부분 '궁기병'으로 전환해버린다. 갑사는 중무장해야 해서 경제력이 강한 사람만이 입대할 수 있었는데, 갑사의 최대 규모는 2만여 명에 달했다. 세조 때부터 궁기병으로 전환하면서 함경도에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불리해졌고, 조선 전기 때 우위를 점했던 기병이 쇠퇴하게 되었다. 그나마 선조 때 5천의 기병과 수백여 명의 포수가 여진족 노토 부락 1만여 명을 사살했지만, 선조 때 군사 개혁의 차원으로 창기병과 포수병을 적절히 운용해서 세운 성과였다. 

세조의 창기병 축소와 총통위의 폐지, 화약 무기의 개발 축소와 중앙군의 쇠퇴는 조선 전기의 군사력 약화에 있어서 한몫했다. 그리고 세조의 측근이었던 공신 세력들이 경제력을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국가 재정이 어려워졌고, 성종 때에는 감축을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태조 때에 20만 8백 명의 군사를, 태종 초기에는 30만 명까지 증가했다. 예비 전력까지 합하면 100만 명 가까이 되는 군역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조선 전기에는 체제가 건전해서 잘 돌아갈 수 있었던 탓이다. 

한편 세조가 점점 축소해가던 중앙군은, 성종 집권기에 중앙군과 지방 군 수만 명이 감축된다. 그래서 조선군 전체 수효가 21만 3천 명까지 축소되었다. 

조선은 전기 때 수군만 5만 명 가까지 유지하면서 유지했으나, 그 외 다른 병종들은 대부분 감축했고, 성종 21년에는 15만 명 선까지 감소했다. 

그리고 성종 때부터 "군사 훈련이 게을리 실시", "무기가 녹이 슬어 허술함" 등의 상소가 올라왔고, 중종 때에는 장부상 병력과 실제 병력이 맞지 않는 등 군사 장부의 관리도 소홀해졌고, 선조 때에는 13만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나오지만, 실제 동원할 수 있는 군사가 1만도 안 된다는 등 여러 문제점이 올라오고 있었다.

세조는 철저하게 조선 전기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조의 군사력 강화 정책에 위배되는 방향으로 갔고, 공신 세력들이 군사력을 남용하고 군비를 빼돌리는 등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조선이 약하게 된 원인을 찾으라면 세조는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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