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중국 불법 어선 조업 단속 및 교전 상황
조선 시대, 중국 불법 어선 조업 단속 및 교전 상황
1500년(연산 6) 7월 9일- 백령도 북방 서해안 지점
이날 백령도 인근에서 해상 경비를 뛰고 있었던 조선 수군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십 척의 배가 출몰했다. 그러나 보통 왜선과는 달라 조선 수군은 가까이 다가가 검문 작업을 시작했다.
조선 수군 중 수색 대장 김익광이 외치기를,
"나는 조선국 수군 대장 김익광이다! 너희들이 감히 우리 해상 경계에 침입하였으니, 순순히 검문에 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어선 측에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 수군의 배를 향해 포위 기동을 실시했다. 수군 대장 김익광은 화살을 쏘고 화포를 발사했으며, 수군에서 사용하는 신호용 신기전을 쏘아 주변 수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신호용 신기전을 보고 주변의 조선 수군 중 종사관 성순동, 정극인, 이종인, 김세균 등의 포작선 26척이 출동해 중국인 70명을 사로잡고, 또 인근 무인도의 바위구멍을 수색해 중국인 31명을 사로잡았다. 수색 과정에서 중국 선원이 쏜 화살에 갑사(직업 군인) 평자중이 전사했다. 조선 정부는 평자중의 유족에게 쌀 50석과 비단 10 필을 하사해 위로했다. 사건의 경과를 보고받은 연산군은 분노했다.
"우리나라가 천은(중국의 은혜)을 입고 있으나, 두 나라에 엄연히 육상과 해상에서 경계가 있거늘, 지금 해상의 적들이 거리낌 없이 우리 영해로 침범하니, 이들을 목 베어 죽이는 것이 가하다."
1540년(중종 35)에는 황해도에 중국 어선이 출몰했는데, 조선 수군이 수색 검문 작업을 실시했음에도 응하지 않고 중국말로 지껄였다. 두 나라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수군은 수색 작업을 원활히 할 수 없었고, 이때 중종은 수색 작업을 하는 수군에게도 통역관을 붙이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때 해상에서의 중국 어선 대처 매뉴얼을 세부적으로 지정했다.
성상(중종)께서 명령을 하달하기를,
① 중국인들이 저항하지 않으면 식량과 생필품을 주어 구호한다.
② 중국인들은 천조(명나라)의 인민이므로 함부로 해하지 않는다.
③ 하지만 아군의 수색 검문 작업에 응하지 않으면 체포해서 구금한다.
④ 만약 무기로 저항한다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교전에 응한다.
⑤ 하지만 교전 결과는 반드시 조정과 병조(국방부)에 보고한다.
1544년(중종 39)에는 황당한 보고도 있었다.
좌승지 안현이 성상(중종)께 아뢰기를,
"변방 장수의 첩보에 의하면, 중국 어선들 중 화포 따위로 무장한 배도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들은 반드시 흉악한 마음을 가진 무리들이니, 우리나라 배가 잡아도 무방하겠습니다."
좌승지 안현이 중국 배의 적극적인 나포를 청하자 중종은 허락했다. 당시 수군은 '신량역천(신분은 양인이지만 천한 직종)'으로 분류됐는데, 조선 수군의 피로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선 전기의 수군은 매년 1월부터 7월까지 1만 명 규모의 대규모 해상 기동 훈련을 전개했다. 게다가 중국 어선과 왜선을 대상으로 교대로 해상 경비 출동을 뛰었는데, 각종 노역까지 동원되다 보니깐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선은 태종 때 거북선을 개발한 이래, 대소 함선 700척과 수군 5만 명을 유지했다. 그리고 성종 때에도 수군 48,800명 선을 유지하면서 지방 군의 70% 가까이를 수군으로 운용하였다.
북쪽 변경의 여진족에서는 조선의 전통적인 함경도 기병대가 활약했으나, 남쪽 변경에서는 수군의 오랜 경계 활동으로 피로해지면서 중국 어선과 왜구에 대한 분노감으로 중국 어선 학살 사건도 벌어졌다.
1545년(명종 1) 8월 2일- 조선 수군 남해 해상 경계 지대 (중국 어선 학살 사건)
남해에 수십 척의 중국 어선이 출몰하자 통제영(조선 시대 해군 사령부)을 중심으로 비상경보가 울렸다. 곧바로 인근 수군 기지에서 조선 수군이 출동했다. 조선 수군이 포위 기동을 실시하며 중국 어선을 압박하자, 중국 어선은 인근 섬에 내렸고, 조선 수군도 섬에 정박해 상륙했다.
처음에는 중국 어선 측에서 중국어로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대명(大明)의 백성이요, 식수와 여분의 식량만 주면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날 중국 어선 측에서 본 조선 수군은 뭔가 달랐다. 지금까지는 웃으면서 식량을 달라고 하면 수군에서도 흔쾌히 줬지만, 이날은 조선 수군이 살기를 띠며 칼을 뽑아 들고 천천히 접근했다. 이때 선두에 있던 조선 수군이 장검으로 중국인의 배를 베었고, 내장과 창자가 땅바닥에 쏟아졌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중국 선원이 무릎을 꿇고 중국말로 소리쳤다.
"우리는 중국(명나라)에서 온 백성이요, 절대 해적 짓을 하려고 온 게 아니요."
그러나 끔찍한 살육이 벌어졌다.
그동안 오랜 군 생활과 해상 경비로 피곤해졌던 탓이었을까? 이날 조선 수군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중국인을 살육했다.
조선 수군 지휘관 |
중국인 참수 |
소연, 안지 |
91명 |
사도 권관 오세웅 |
108명 |
율현 권관 강희 |
13명 |
유충정 |
184명 |
불명 |
282명(포로) |
총합 |
396명 참수 |
이날 거의 400명 가까운 중국인이 학살당했고, 280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그러나 현지에서도 지나치게 큰 사건인 줄 알았는지, 조정에 보고할 때는 "왜구인 줄 알았다"라고 둘러댔지만, 정황상 왜구로 오인할 수 없었다는 명백한 증거하에 조정에서도 논란이 됐다. 조선 정부는 명나라에 알리지 말고 학살된 중국인에 대해 제사를 지내고 사건에 연루된 장수들 중 책임자 1명에게만 장 50대로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도 중국 어선의 활동은 계속됐고, 조선 수군 3만 명이 남해에서 왜군과 교전하고 있는 틈을 타서 수백 척(실록에서는 최대 700척)의 어선이 서해안에 출몰했다.
당연히 한양에 있던 조정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보내 서해의 어선을 단속하겠다고 했으나, 선조는 수군의 병력이 부족할 것이니 걱정 말고 왜군과 싸우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선조는 기발한 발상을 꾀한다. 당시 중국 어선은 조선 어선을 괴롭히는 것은 물론이요, 배를 나포하거나 조운선이 싣고 가던 군량미를 약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선조는 서해안 조선 수군의 군함을 어선이나 화물선으로 위장해서 중국 어선들을 유인했다.
이에 혹한 명나라 어선은 조선 배에 접근했으나, 이는 선조의 기만 작전이었다. 배 안에는 화포가 장착되어 있었고, 화포로 명나라 어선을 불살랐다. 평소 대명(大明)의 은혜를 강조하던 선조였지만, 명나라 어선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처했는데 선조가 분노하면서 말한 다음과 같은 말을 보면 드러난다.
성상(선조)께서 분노하여 이르기를,
"회초리로 때려 다스릴 만한 중국 도적들마저 오히려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산 송장이지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말하기도 부끄럽다! 내가 체포할 대책을 세우라고 전에 엄히 분부했건만 지금 이 중국 도적들이 여전히 해상을 횡행하고 있고 심지어는 추격에 나선 우리 함선을 빼앗기기까지 하였으니 지극히 통탄스럽고 놀랍다! 군령이 엄하지 않아 흉악한 중국 도적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으니, 너희들을 군법에 의해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 (후략)"
아예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중국 어민들을 '해적', '수적'으로 규정했다. 인조 때에는 연평도와 백령도 부근에 수백 척의 어선이 출몰했고, 인조는 삼남의 수군 1만 명을 동원해 강화도를 사령부로 토벌 작전에 나섰다.
인조는 아예 서해안의 섬을 뒤지면서 수색 작업을 하라고 명하였다. 그 과정에서 섬에 12~13세로 보이는 조선인 출신 아이들도 있었고, 해골과 뼈 무더기도 발견했는데, 조선인의 것으로 추정됐다.
조선 수군은 어린이 수십 명을 구출해 본국으로 데려왔고, 인조는 이들에게 밥을 내려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중국인의 해상 기지였던 해랑도를 토벌하였고, 해랑도의 중국인을 몰아냈다.
숙종 때에는 연평도와 백령도에 중국 어선이 정박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분노한 숙종은 '해안선 경계에 태만한 죄'로 변방 장수 1명을 참수하여 변방 곳곳에 조리돌림 해 경고하였다.
조선 수군의 토벌로 해랑도의 중국인을 몰아낸 결과, 조선 후기 200년 동안 중국 어선의 조선 내에서의 활동을 근절할 수 있었고, 이후 중국 어선은 요동반도와 발해만을 일대로 활동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을 계승한 대한 제국 시대에는 변방에서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중국 의화단의 비적들이 서양 연합군의 토벌에 밀려 대한 제국으로 몰려들었고, 수백 명의 소규모 러시아군과 만주 군벌들까지 대한 제국으로 밀려왔다. 이 과정에서 변방의 대한 제국군과 이 비적들과의 교전이 비일비재했고, 특히 의화단의 비적들이 중국인과 함께 어선을 타고 해상을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 제국 육군 대대장 이하 30명의 병사와 소대장 10명, 제국 해군 승조원 10명이 살해되는 일도 발생했다. 중국 어선은 현재에도 계속 활동 중에 있고, 오늘날 지금도 서해상에서 횡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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