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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조 시기의 화력 활용 사례(feat. 조총 덕후 선조)

|||||||||||||| 2020. 10. 27.

조선시대, 선조 시기의 화력 활용 사례(feat. 조총 덕후 선조)

1592년(선조 25), 조선 8도 전체에서 조선군과 왜군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전쟁 초기에 경상도 전역이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주력은 건재했다. 이때 박진(朴晋)이라는 자가 경주 근방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진격시켰다. 박진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움직인 것이다.

비격진천뢰 단면도
비격진천뢰 구조

박진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 일종의 시한폭탄)를 통해 경주를 탈환하기로 했다. 박진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경상도 경주 근방에 도착하였고, 이어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왜군 진영 안에 떨어뜨렸다.

성 안으로 이상한 쇳덩이라가 날아오자, 왜군은 이게 뭔가 싶어 가까이 다가와 살폈다. 그리하여 자기들끼리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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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592년(선조 25) 9월 1일,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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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20여 명의 왜군이 즉사했고, 왜군은 두려워하여 이튿날 경주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철수했다. 박진을 위시로 한 조선군은 경주에 들어가 곡식 1만여 석(최소 720만 kg)을 획득했고, 경주 탈환이라는 큰 공을 세운 박진은 가선 대부로 승진되었다.

비격진천뢰는 조선의 과학자이자 화포 장인 이장손이 개발했는데, 선조는 다른 건 몰라도 무기 기술 개발에는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이장손은 선조 정권의 보호 아래, 비격진천뢰라는 신무기를 만들었고, 이는 임진왜란 때 경주 수복이라는 큰 군공을 세우게 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선조는 왜군이 사용했던 '조총'이라는 신무기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왜군을 포로로 노획하면, 왜군을 포섭하여 조총 무기 제조술을 반드시 알아내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으며, 포로로 잡은 왜군을 함부로 참수하는 조선군에게 경고를 내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군사(조선군)는 왜군을 포로로 잡으면 무조건 참수한다. 이래서 적을 상대로 어떻게 기술을 배우고 그들의 기재를 배울 수 있겠는가?"

1593년(선조 26), 조총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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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라는 국가의 비상사태 속에서, 선조는 임시 무과 시험의 새로운 규정을 선포했다. 바로 조총 사격 시험을 무과 시험에 추가시킨 것인데,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에겐 금군(임금의 호위병)이 되거나, 막대한 재물을 받을 수 있게 상을 내렸다.

조선군 포수 고증

한편, 선조는 조총술을 배우고자 하는 이는 노비든 양인이든 신분을 막론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 가운데 실력이 뛰어난 자에겐 금군(임금의 호위병)에 제수하기도 하며, 또는 면천(노비가 평민으로 해방)할 수 있게 하였고, 병사의 가족들에게 유공자 혜택을 내려 후하게 대우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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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선조 27), 비변사에서 조총 사용법의 전습, 왜 포로의 귀순 권유 등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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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비변사(임시 국방 회의 기구)에선 포로로 잡은 왜적을 명나라 제독에게 보고하자고 하였지만, 선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명나라 제독에게 보고하는 것을 거부했다.

상(임금, 선조)이 이르기를,

"명나라에게 보고할 필요 없다. 보고하면 반드시 (명나라가) 포로들을 데려갈 것이다. 이 포로가 조총과 염초의 기술을 안다고 하니, 잡아 두고서 우리 군사에게 이 기술을 전습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한편, 조총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선조가 직접 조총을 만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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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징비록』에서의 선조 임금

선조는 자신이 직접 새로운 총을 개발했는데, 선조가 유성룡에게 전교하기를,

"조총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전하기가 쉽지 않아서 혹시라도 선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유성룡)에게 보내니 비치해 놓고 한번 웃기 바란다."

조총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지극하여, 조선군 병종에 있어서 변화 역시 생겼다. 포수가 조선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적으로 증가했고, 임진왜란 중후반기에는 조선군 포수의 활약도 돋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선조는 포수를 북쪽 변방에서 활용하여 변방을 안정시키기도 하였다.

누르하치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 부락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선 조정 일각에선 미리서 군사를 보내 이들의 기세를 꺾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리하여 선조는 북쪽 변방의 포수들을 징집하여 군사를 출동시킬 계획을 구상했고, 수십만 발의 탄환과 수천 정의 조총을 북쪽 변방으로 보내며 변방의 방위를 공고히 했다.

한편, 계속해서 북쪽 변방에 있는 여진 세력의 동향이 심상치 않자, 조선 조정은 '화기와 정예 병사를 보내 여진 한두 부락을 제거'함으로써 그 세력을 약화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기 전에 시급히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야인 오랑캐가 북쪽 변방에서 횡포를 부리니, 토벌을 하지 않으면 변방을 안정시킬 수 없사옵니다. 전하께오서 결단을 내리시오소서!"

"이번 거사는 포수를 동원하지 않으면 거사 자체가 불가능하다!"

1600년(선조 33) 4월, 세종 대왕이 개척한 조선의 북쪽 변방인 회령과 종성에서 번호(조선에 투항한 여진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세종 대왕이 개척한 조선 왕조의 4군 6진 국경선

그리하여 선조는 평안도와 황해도, 함경도의 경포수와 정예병들을 동원해 토벌을 명했고,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5천여 명의 조선군 부대가 북쪽 국경의 여진 부락을 상대로 대대적인 토벌전을 전개했다.

조선군 경포수는 진격하면서 여진 기병을 공격해 그들의 진격을 제어했고, 장주 부락에서 마을 외 부락까지 여진족의 거주지 1천여 집을 전부 불태웠다. 조선군의 진군 소식에 여진족들은 산 위로 올라가 조선군의 만행을 지켜봤으며, 남녀노소가 모두 흩어져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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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선조 33), 함경도 관찰사 윤승훈이 오랑캐를 토벌한 시말과 전과를 보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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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움 속에 묻은 여진족의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고,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아버렸고, 성채 역시 다 불태웠으며, 강물에 독을 풀어 영영 마실 수 없게 만들었다. 심지어 여진족은 조선군의 공격으로부터 도피할 때, 집에 흙을 발라 불에 타지 않게 하였지만, 조선군 중 건장한 병사들이 도끼를 들고 다 때려 부수고 포수들은 하늘을 향해 총포를 쏘며 승전 의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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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일 동안의 토벌전에서 300여 리의 여진 부락이 송두리째 사라졌으며, 사망한 여진족의 숫자만 무려 '1만여 명'이라는 소식이 북쪽 변방에 소문이 파다했고, 조선군의 전사자는 7명(포수 4명 포함)이었다. 이 토벌전에서 조선군이 1천여 채의 여진족 집을 불태웠으니, 수천여 명의 여진족이 생계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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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선조 연간, 선조는 조총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국왕의 조총 사랑은 조선군 병종에 있어서 포수 비율의 상승이라는 군제의 변화 역시 수반하게 되었다. 한편, 무기 기술 개발도 이 시기 획기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총구가 3개인 삼안총이란 것이 개발되었다. 선조는 승정원(국왕 비서 기관)에 삼안총의 훈련과 포상을 전교했으며, 왜군과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세웠다.

삼안총

임진왜란 기간에 있었던 행주 대첩에선, 흔히 아녀자들이 돌멩이를 날려 활약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지만, 사실상 행주 대첩은 조선군이 맹렬한 화력을 통해 3만여 명의 왜군으로부터 성을 지켜낸 싸움이었다.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그리고 대포 등을 통해 물밀듯이 진군하는 왜군에게 막대한 화력을 퍼부었고, 특히 왜군은 1군이 거의 궤멸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조선의 신기전(화차)

조선 초, 세종 대왕부터 문종 대왕까지 조선군의 무기 연구가 활발해져, 신기전이라는 조선의 새로운 신무기가 개발되었는데, 이는 조선이 전통적으로 여진 토벌에서 쓰여왔다. 세조 때 있었던 건주 여진 토벌에서는 조선군 1만여 명이 작전에 동원되었는데, 신기전 덕분에 수백여 리의 여진 부락이 지리멸렬해졌고, 이후의 여진 토벌에서도 조선군은 재미를 봤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화포의 제원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큰 전과를 세울 수 있었던 배경에도 각종 화포에 기인한 바가 큰데, 이순신 장군 역시 화포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여 수만여 명의 왜군을 상대로 한국 역대 해전사에서 길이 남는 큰 위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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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92년(선조 24)
    • 5월 7일(옥포 해전) : 적선 26척 격침
    • 5월 7일(합포 해전) : 적선 5척 격침
    • 5월 8일(적진포 해전) : 적선 11척 격침
    • 5월 29일(사천 해전) : 적선 13척 격침
    • 6월 2일(당포 해전) : 적선 21척 격침 [구루시마 전사]
    • 6월 5일(1차 당항포 해전) : 적선 26척 격침
    • 6월 7일(율포 해전) : 적선 3척 격침, 적선 4척 포획
    • 7월 8일(한산도 해전) : 적선 59척 격침, 적선 14척 나포 [와키자카 사베에 · 와타나베 시치에몬 · 미나베 전사]
    • 7월 10일(안골포 해전) : 적선 42척 격침 [일본군 4천여 명 전사]
    • 8월 29일(장림포 해전) : 적선 6척 격침
    • 9월 1일(화준구미 해전) : 적선 5척 격침
    • 9월 1일(서평포 해전) : 적선 8척 격침
    • 9월 1일(절영도 해전) : 적선 9척 격침
    • 9월 1일(초량목 해전) : 적선 4척 격침
    • 9월 1일(부산포 해전) : 적선 128척 격침 [일본군 4천여 명 전사]
  • 1593년(선조 25)
    • 2월 10일~3월 6일(1차 웅포 해전) : 적선 51척 격침 [구와나 지카카쓰 전사, 일본군 2천 5백여 명 전사]
    • 5월 2일(2차 웅포 해전) : ?
  • 1594년(선조 26)
    • 3월 4일(2차 당항포 해전) : 적선 31척 격침
    • 9월 29일(1차 장문포 해전) : 적선 2척 격침
    • 10월 1일(영등포 해전) : ?
    • 0월 4일(2차 장문포 해전) : ?
  • 1597년(선조 30)
    • 2월 10일(부산포 해전) : ?
    • 9월 16일(명량 해전) : 적선 31척 격침 [도도 다카토라 · 구루시마 미치후사 · 하타 노부토키 전사]
  • 1598년(선조 31)
    • 7월 19일(절이도 해전) : 적선 50척 격침
    • 9월 20일~10월 7일(왜교성 전투) : 적선 30척 격침, 적선 11척 나포 [일본군 3천여 명 전사]
    • 1월 19일(노량 해전) : 적선 200척 격침, 적선 100척 나포, 적선 150척 반파 [일본군 2~3만여 명 전사]
  • 조선 수군의 전과(이순신 장군의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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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지속적으로 북쪽 변방과 남쪽 변방에 염초와 조총, 화포 보급을 위해 신경을 세웠으며, 이는 조선군이 왜군과 전투를 치르는 데 있어서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논외로, 선조가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쓰지 못한 점, 또한 원균 기용과 같은 부분에 있어선 아쉬움이 남는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이 구절은, 선조가 화포와 화력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그 열의가 잘 드러난다.

이는 1593년, 전쟁 초년의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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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번번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은 오로지 화포가 있기 때문이고, 중국군(명나라군)이 적을 진압할 수 있는 까닭도 화포에 있으니, 우리나라(조선)의 약점은 바로 화포를 사용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제 마땅히 전라, 충청, 평안, 황해 등에 도회를 설치하고 화약을 많이 구워내는 한편, 사람들에게 방포를 가르치되 한 사람이 열 사람을 가르치면 그 열 사람은 또 백 사람을 가르치고, 그 백 사람은 천 사람을 가르치며, 천 사람은 만 사람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몇 해 지나지 않아 모두 훌륭한 포수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만 안일주의로만 나간다면 이는 이른바 제비가 불타오르는 집에서 지저귀는 것과 같다. 아울러 지금 내가 한 이 말을 여러 승지들이 기억하여 잊지 아니하면, 후일에 반드시 내 말을 알아주는 이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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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조의 새로운 기술 개발 및 조총에 대한 관심 등 무기 개발은, 여러 양반 사대부들과 사관의 비판을 강하게 받기도 하였다. 조선은 실사구시에 대해서 인색한 경향이 강한데, 왕이 직접 무기를 만들 정도였으니, 이에 대해서 사관은 강력하게 비판했다.

선조가 총을 만들었다는 소식(위 내용 참고)을 들은 사관은 충격을 받으며, 신랄하게 선조를 비판해댔다.

"조총이 적을 막는데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본말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통탄스럽구나!"

심지어 양반 사대부들과 선비들 역시 선조를 비판해댔다.

"조총으로 병사를 교련함은 무엇하는 짓인가? 모두 쓸데없는 기술이다!"

선조가 1593년에 처음으로 직접 조총에 대해 가르치자, 양반 사대부들과 선비들은 모두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고 비웃었고, 또 조총을 배우는 일을 천하고 비루하게 여겼다. 심지어 선조는 피난길에 조총과 화포의 훈련에 대하여 극력 주장했는데, 당시 양반 사대부들과 선비들은 이렇게 말하며 비웃었다.

"조총을 배우는 것은 천한 놈들이나 하는 것이옵니다. 만약 전하께오서 저희들이 조총을 배우는 것을 원하신다면,

난리(임진왜란)가 끝나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배우겠사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선조는 개탄을 금치 못하였지만, 조총에 관심이 있는 신하들에겐 따로 명을 내려 적극적으로 포수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라고 명을 내렸으며, 화포 무기 개발에도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줬다. 또한 너무 총을 잘 쏘는 자에게만 대우가 편중될까 봐,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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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선조 27), 군사 교련을 권장하기 위해 칼과 창을 잘 쓰는 자에게 요미를 지급하도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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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선조는 조총과 화력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무기 개발과 실전 활용 등을 통해 그 위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당시 양반 사대부들과 선비들은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인색한 모습을 보였고, 이후 조선 후기 때에는 무기 개발 등에 소홀해지는 모습 등을 보였다. 선조 때 진주 대첩과 경주 수복에 활약했던 비격진천뢰의 보수와 무기 개발 역시 그 뒤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조선의 국방력은 이후로 현저히 약화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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