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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청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 전투 당시의 조선군

|||||||||||||| 2020. 10. 22.

병자호란 당시 청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 전투 당시의 조선군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는 계속되고 있었고, 그동안 소규모 접전에서 조선군은 수십 명의 청군을 사살했다. 청군은 1636년 12월 23일, 1만여 명의 대군을 동원해 남한산성 전체를 포위하며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다.

조선군 장군이 뛰어와 인조에게 아뢰기를,

"전하, 오랑캐의 공세가 재개되었는데,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합니다!"

인조가 이르기를,

"내가 직접 성벽으로 거동해 오랑캐와 싸우는 군사들을 위로하겠다. 융복(임금이 입는 군복)을 가져오라!"

인조는 융복 차림으로 성벽으로 거동했고, 왕이 전장에 몸을 드려내자 조선군은 모두 엎드려 절을 했고, 어떤 조선군은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있었다.

"저희들은 모든 힘을 다해 오랑캐의 목을 베어 반드시 전하께 바칠 것이옵니다!"

청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가해졌고, 조선군은 활과 돌, 조총과 포 사격을 통해 청군의 1차 공격을 막아냈다.

이때 인조는 북문(北門)으로 행차해 장대에 올라가 군사들을 격려하는 북을 쳤고, 이에 감동한 조선군 북문 수비군은 성문을 활짝 열어젖혀 밖으로 출병했다.

이날 북문 밖에서는 조선군과 청군의 백병전이 시작되었는데, 시퍼런 칼날이 곳곳에서 난무하며 치열한 혈투가 진행되었다. 인조가 손수 치고 있는 북의 우렁찬 소리는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고, 이날 북문 외곽에서는 조선군이 청군 200여 명을 도륙하는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조선군 80명 전사).

인조가 이르기를,

"오늘 출전했던 상황은 어떠했는가?"

이귀가 아뢰기를,

"성상(임금을 높이 부르는 말) 전하! 오늘 군사들 중 자원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600명을 내보내어 세 곳에서 교전했는데, 우리나라(조선) 군사는 피살자 4명, 화살에 맞은 사람이 23명이지만, 죽인 적이 매우 많았습니다!"

인조가 이르기를,

"장하도다, 어느 곳이 가장 착실히 싸웠는가?"

이귀가 아뢰기를,

"연주봉 전투에서 우리 군사들이 가장 잘 싸웠습니다! 오랑캐가 진군해 올 때마다 우리 군사들이 한꺼번에 활과 총을 일제히 쏘니, 오랑캐의 유혈이 강을 이룰 정도였나이다!"

인조가 이르기를,

"어떤 병사들이 잘 싸웠는가? 병사들의 이름을 알고 싶구나."

이귀가 아뢰기를,

"이정현이라는 병사는 힘이 장사인데, 오랑캐가 쏜 화살이 어깨를 적중하여 죽을 뻔하였는데, 조양이라는 병사가 칼을 뽑아 오랑캐의 진영에 뛰어 들어가 이정현을 구했나이다."

인조가 이르기를,

"가히 장사로다! 이정현이라는 병사는 상처가 심각한데, 그 병사는 살아날 수 없는가?"

이귀가 아뢰기를,

"성상(임금을 높이 부르는 말)! 이정현이라는 병사의 상처 난 곳을 보니, 화살이 갑옷을 뚫어 살깃까지 들어갔으니, 살아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전하, 만약 우리가 수레를 만들어 일제히 나아가 대포로 서로 싸운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인조가 이르기를,

"좋구나!"

이귀가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성상! 병사들이 매우 굶주리고 있기 때문에 가축을 도살해 병사들에게 호궤 하도록 하였습니다. 오랑캐 군사가 비록 강하다고 한들, 우리나라 군사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송구스러운데, 그저께 화살에 맞은 병사가 어제 결국 죽었나이다. 소신의 부하들 중에서도 죽은 병사가 5명이고, 거의 죽어 가는 자가 2명입니다. 그저께 화살을 맞은 병사는 죽음을 앞두고도 오랑캐에게 욕을 퍼부었으니, 진실로 장사입니다. 그 병사는 연속으로 오랑캐 2명을 쳐 죽였고, 세 번째 오랑캐를 상대하다가 화살에 맞았다고 합니다."

인조가 이르기를,

"그대는 병사들의 이름을 똑똑히 기록했다가, 후일 그들의 가족들과 자손들에게 영원히 은덕을 베풀게 해야 할 것이다!"

이귀가 아뢰기를,

"오늘 전투가 매우 치열하여, 병사들의 이름을 잊었습니다만, 어떤 병사는 연이어 4명의 적을 활로 사살하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인조가 이르기를,

"오늘의 교전에서 피살된 오랑캐는 대략 얼마나 되는가?"

이귀가 아뢰기를,

"대략 150여 명 이상이 피살됐나이다!"

인조가 농담으로 웃으며 이르기를,

"껄껄, 어찌 이처럼 많은가?"

이귀가 아뢰기를,

"우리 장병들이 하물며 그 정도도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날씨가 매우 좋으니, 다행입니다."

하고 물러 나갔다.

인조의 명령으로 소수의 조선군은 계속해서 정찰과 외곽 경비에 주력했고, 한편 인조는 날을 잡아 조선군을 열병하고 대대적인 호궤(포상)와 함께 병사들을 위로했다. 또한 병사들의 이름을 장부에 기록해 상을 아끼지 않았고, 가족들에게 유공자 혜택을 내리기로 약속했는데, 실제로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인조는 전사한 병사들의 가족들에게 어마어마한 유공자 혜택을 부여하였다.

12월 24일 새벽, 이날 진눈깨비가 내렸고 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인조는 신하들과 사관을 거느리고 밖으로 나와 향을 피우고 거적 자리를 깔고 땅에 엎드려 빌기를,

"이 고립된 성에 들어와서 믿는 것은 하늘뿐인데, 겨울비가 갑자기 내리니 모두 흠뻑 젖어 죽고 말 것입니다. 내 한 몸이야 죽어도 애석하지 않지만, 문무백관과 만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날이 개도록 하여 우리 신민을 살려 주소서!"

하고는 그대로 땅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울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며 수 시간이나 계속 울어댔다.

인조가 입고 있는 옷이 흠뻑 젖고, 피부까지 젖었음에도 울면서 기도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자, 옆에 있던 승지 등이 나아가 엎드려 일어나기를 간청했으나, 인조는 여전히 1시간 넘게 눈비를 맞으며 울어댔다. 이때 신하들이 울면서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은 위대하신 성상 전하만을 믿고 있는데, 저녁 내내 비를 무릅쓰고 계시니, 옥체가 크게 손상되어 병이라도 생긴다면 다시 소망이 없어질 것입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멀리서 전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몸이 비에 젖어 얼어붙는 것을 염려하지 않고 오직 전하의 옥체가 손상될까 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제발 바라옵건대, 성상 전하께 우선 속히 안으로 들어가시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그러나 인조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이 모습을 구경하던 병사들과 금군(임금 호위병)들은 모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지 않는 자가 없었고, 이때 이도장이 김류에게 일러 말하기를,

"저러다가 전하의 옥체가 손상될까 걱정입니다! 부디 대감께오서 나아가 어의(왕의 옷)를 잡아당겨 굳이 청하소서!"

신하들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 인조의 옷을 강제로 끌어당기며 울면서 청하자, 잠시 뒤에 인조가 비로소 일어나 기도하고 물러 나왔는데, 눈물이 양 볼에 흘러내리니, 이를 보고 있던 금군(임금 호위병)과 신하들의 눈가에서 눈물이 줄줄 흘려 나왔다. 인조는 내관을 보내어 병사들을 위로하게 하였고, 고기와 소금을 병사들에게 포상하였다.

12월 25일, 성벽 위의 군사 가운데 부상당한 자를 급히 여염집으로 수송해 치료하게끔 명했는데, 부상당한 병사들이 말하기를,

"소신들은 마음과 몸이 고달파 술을 마시고 싶사옵니다."

그리하여 조선 수뇌부들은 의원들에게 부상당한 병사들이 술을 마셔도 되냐고 물으니, 의관들이 그것은 안 된다고 하자,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녹두죽을 먹였다. 한편 인조의 배려로 활에 맞은 병사들을 온돌방으로 데려와 치료하게끔 명했고, 고기반찬을 내려주는 등 성심성의껏 대접해줬다.

12월 24일 오후, 인조가 중대청(中大廳)에 친히 거동해, 곧 성 밖으로 출전할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인조가 출전하는 병사들을 보며 이르기를,

"너희들은 어디 소속 병사들인가?"

 

이경증이 아뢰기를,

"저희는 체부(사령부)의 자원군입니다!"

인조가 이르기를,

"너희들이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남한산성에 물자가 없어 포상도 뜻대로 할 수가 없으니 매우 부끄럽다. 너희들이 종시토록 온 힘을 다해 싸워 큰 공을 이룬다면, 중한 상을 내려 보답하도록 하겠다."

이때 장립이라는 한 병사가 대열에서 이탈해 땅에 엎드려 청하기를,

"성상 전하! 소인이 소지한 조총이 매우 좋지 못합니다. 좋은 품질의 총으로 바꾸어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실제 남한산성 전역에서 조선군은 청군을 상대로 백병전이든, 수성전이든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이유는 바로, 당시 남한산성으로 입성한 조선군 1만 2천여 명의 대부분은 수도권 일대를 방어하는 조선의 경군(京軍 : 중앙군)이었고, 경기도 광주 등 이 지역 근방의 진관병이었기에 그렇다. 또한 정묘호란 이후로 칼과 창 등을 다루는 백병전 훈련도 중앙군을 상대로 진행되어, 조선 중앙군은 청군을 상대로 백병전에서도 밀리지 않고 잘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부족한 군량'에 있었다. 조선군은 10만이 넘는 청군을 상대로 40일 이상 수성에서 잘 버텼으며, 심지어 조선군 사령부는 적극적인 출성(성 밖으로 나감) 공격을 행하며 청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보다 부족한 군량과 혹독한 기후는 조선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약화시켰다. 인조의 수라상에 닭고기가 올라오자, 인조가 닭고기를 올리지 말라고 한 일화는, 일국의 왕조차도 닭고기를 먹지 못할 정도의 열악한 상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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