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전투의 재구성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전투의 재구성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성이며, 조선 시대에는 수도권 일대를 방어하는 중요 요새였다. 1624년(인조 2)에 대대적인 축성 작업이 시작되었고, 1636년(인조 14)에는 수어사 이시백이 1만 2천 7백여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대규모 기동 훈련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門)과 관아와 창고 등이 있었고, 또한 국왕의 임시 처소인 행궁과 함께 군사 훈련을 위한 연무장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경기도 광주의 토지 2천여 결을 남한산성에 배속하게 하여, 수비군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의 둘레는 약 6천여 보(步) 정도라고 한다(기록마다 다 다름).
1636년(인조 14), 드디어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 경내로 침략하였다. 청군은 백마산성의 임경업과 서북계 여러 산성들을 무시하고 파죽지세로 조선의 수도권으로 남하하였다. 당시 조선은 전국에 10만이 넘는군사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신속히 동원되지 못하고 있었다. 청군 선봉대는 순식간에 서울 은평구 일대까지 진출하였고,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하고자 하였지만 청군 선봉대에 막혀 남한산성행을 결정하였다. 왕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수도권 전역에 퍼졌고,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군사들은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 내부에는 대군이 주둔할 군량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이서가 광주목사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전쟁을 대비하여 성 내부에 많은 곡식을 비축했지만, 그 후임자인 한명욱은 산성 외곽에 갑사창을 설치하여 군량의 대부분을 그곳에 비축시켰다. 따라서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에 입성할 당시, 겨우 1만여 명의 조선군이 30~40일 정도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인 쌀 1만 4천 3백여 석, 잡곡 3천 7백여 석, 피곡 5천 8백여 석, 장 220여 독이 비축되어 있을 뿐이었다.
당시 성 내부에는 문무백관과 왕실의 종친, 그리고 군사와 백성, 노비 등 도합 1만 4천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있었다. 따라서 남한산성 내부의 조선 수뇌부가 최대한 군량을 절약한다고 하더라도 오래 지탱하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전투는 임박해졌고, 청군의 선봉대와 함께 후속 부대도 속속 오고 있는 형국이었다. 성은 4면에서 포위되었고, 인조는 전투를 속개하기로 하고 국왕의 명령으로 산성의 방어 부서를 하달하였다.
청군 마푸다 부대는 남한산성에 사자를 보내어 화의 교섭의 진행을 요구하는 한편, 약 100여 기의 기병을 서문으로 접근시켜 화포와 궁시를 쏘면서 소규모의 탐색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문수비대장 이시백은 성문을 굳게 달고 응전하지 않았으므로 청군은 본진으로 물러났다. 이후 조선 진영과 청 진영에서는 교섭이 진행되었지만, 곧 교섭은 무산되고 말았다.
12월 16일, 날카롭게 휘몰아치는 바람만 준동할 뿐, 청군의 공격은 없었다. 인조는 성벽 주변을 순시하며 병사들을 위로하였고, 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리고 북문수비대장 이서가 병이 매우 심한 관계로, 그 후임으로 원두표를 임명하였다. 한편 도원수(都元帥)와 부원수(副元帥)에게 지원병을 요청했고, 이날 유성이 나타나 성벽의 군사들이 이를 구경하였다.
전투는 아직 없었고, 조선 진영과 청 진영의 화의 교섭도 큰 성과는 없었다. 인조는 성벽을 순시하면서 군사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널리 천명하였다.
'청군이 공격해 오면, 내가 몸소 군사를 지휘하여 싸우겠노라!'
한편 계속해서 도원수 김자점과 부원수 신경원에게 교서를 내려보냈다.
'성이 포위되어 군신 상하가 모두 곤경에 처해 있다. 국가의 존망이 절박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대들은 서둘러서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산성의 위급을 구원하라!'
인조는 성벽을 순시하며 병사들을 계속 위로하고 있었고, 성 남문에 거둥하여 문무백관을 보고자 하였다. 그때 전(前) 참봉 심광수가 임금 앞에서 땅에 엎드려 다음과 같이 외쳤다.
"지금 성 안에 화의를 주장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목베어 화의를 끊고 백성들에게 사과할 것을 청합니다!"
심광수가 목베기를 주청하는 대상은 최명길이었다. 인조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내가 덕이 없어 이런 비운을 맞이해 오랑캐가 침략하였다. 지금 군신 상하가 함께 한 성을 지키고 있는데, 화의는 이미 끊어졌으니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문무백관과 국가 장병이 한 힘이 되어 충의심을 분발하고 함께 맹세코 이 오랑캐를 물리쳐 함께 큰 복을 도모하라."
성 내부의 분위기는 싸움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더 이상 누구를 처벌하자, 목베자와 같은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한편 이날, 청군은 소규모의 기병을 보내어 산성 북문을 공격하였다.
이때 북문수비대장으로 새로 부임한 어영부사 원두표가 조선군 정예병 50여 명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하여 북문 전방에 접근한 청군을 공격하였고, 청군은 당황하여 6명의 전사자와 군마(軍馬), 그리고 무기를 버리고 법화동으로 흩어졌다. 비록 조선군의 소규모 승리였지만, 남한산성 입성 이래의 첫 승리로서 조선군의 사기를 향상시켰다. 이날 인조는 크게 고무되어 공을 세운 병사들을 승진시키는 등 포상하였다.
"국가 장병이 이 추운 엄동 설한에 밤낮으로 성을 지키고 있으니 가상하기 그지없다. 오랑캐를 참수한 공이 없더라도 내가 매우 기쁘니, 적을 이긴 후에는 논공행상을 하겠다!"
12월 19일, 이날은 날씨가 몹시 추웠기에 성벽에 보초를 선 병사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인조는 자신의 장남이었던 세자 이왕(소현세자)과 함께 북문에서 북쪽 곡성(曲城)까지 순시하여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또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성 내부의 거주민은 5년을 기한으로 세금 면제책을 펼쳤으며, 청군과 맞서 두드러지게 수고한 자에게는 천인은 면천하고 양인은 별도로 논공행상을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이날, 청군은 다시 남한산성에 대한 소규모 공격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남문수비대장 구굉은 군관 이성익과 함께 화포로 청군 기마대에게 큰 피해를 주었으며, 성 밖으로 나와 조선 남문수비군은 청군 20여 명을 사살하였고, 즉시 귀환하였다. 이날의 승전으로 조선군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고, 인조는 성벽을 순시하며 장수와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또한 전투 도중에 전사한 병사들에겐 휼전(恤典)을 베풀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소규모 전투로써 전황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청의 후속 부대가 속속 도착함에 따라 산성의 포위망은 계속 조여지고 있었다. 조선의 구원 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조선을 위해 산둥 반도에서 수군을 동원하여 식량을 싣고 조선으로 출진시켰으나, 거센 풍랑이 일어나자 출발을 보류하는 등 소극적인 반응을 보여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명의 원군이 후퇴하고, 청의 포위망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성 내부의 분위기는 매우 침울하였다. 그런데 그때 충청도에서 원병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충청도 원병과 남한산성 내부의 조선군은 서로 화전(火箭)을 통해 연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군 진영에선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인조는 성 밖으로 나가 소규모 공격을 명하였다.
서문수비대에 속했던 어영별장 이기축은 5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출격하였다. 그리하여 청군과 백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청군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동문수비대장 신경진도 100여 명의 군사를 출격시켜 청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고, 무기와 군마를 노획하였다. 12월 22일 아침, 청군 진영에서는 남한산성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계획하였다. 지금까지 조선군에게 번번이 격퇴되었기에 청군은 5천여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동서남북문에 걸쳐 4대 문에 병력을 나누어 일제히 공격했다.
청군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함성을내지르며 성벽 가까이 진군하고 조선군에 포를 쏘았다. 조선군은 청군의 공세에 맞서 화포와 돌, 그리고 활을 통해 청군의 공격을 저지시켰고, 결국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오후 무렵까지 계속되어, 청군은 수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진영으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북문에서는 원두표가 청군 20여 명을 사살했으며, 동문에서는 신경진이 청군 30여 명을 사살했다. 그리고 조선군이 퇴각하는 청군을 추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고, 청군은 100여 명이 사망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조선군의 피해는 사상자 모두 10여 명이었다.
한편 이날 전투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협수사 유백증은 담당 방어 부서에 늦게 도착한 군사 5명을 태형에 처했고, 퇴각하는 청군을 추격하여 군사들과 함께 청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한편 성 안에서는 선비 윤지원이 철편을 들고 성 밖으로 나가 청군 기병 2명을 때려 눕혔고, 선비의 용기에 조선군은 경의를 표하였다. 인조는 이날의 전투에서 매우기뻐하여 대청(大廳)에 나아가 군사들을 위로하고 상을 내렸다.
청군 진영에서는 크게 분노하여 다시 대공격을 계획하였고, 12월 23일에 청군은 1만여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 4대문을 향해 산발적인 공세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화포와 활 사격으로 청군을 저지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인조가 직접 북문(北門)의 장대에 올라 북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왕의 독려와 함께 북문수비군은 큰 감동을 받아 일제히 성 밖으로 나가 청군과 백병전을 벌였고, 청군 200여 명을 전사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조선군은 80여 명이 전사하였다.
다른 동서남문의 수비군도 성공적인 방어전을 통해 청군을 격퇴하였고, 이날의 전투는 매우 치열하여 병사들은 성벽에 기대며 깊은 휴식을 취하였다. 한편 인조는 문무백관과 함께 명나라 황제를 향해 망궐례를 행하였다.
이어 성벽을 순시하며 병사들을 위로하였고,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너희들이 힘을 합해 오랑캐를 죽였으니 참으로 가상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성에 물자가 부족하여 호궤(포상) 역시 넉넉하게 하지 못하니, 과인이 한스럽게 여긴다. 너희들은 마음을 다하여 적을 초멸하도록 하라."
12월 24일, 남한산성 내부에서 다시 청군을 공격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가기로 하였다. 출발에 앞서 인조는 병사들을 격려하였는데, 그때 한 병사가 대열을 이탈하며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전하! 비단옷 입은 사람을 장수로 정하면 자기는 성밑에 앉아 있으면서 우리 군사만 나가 싸우게 하니, 대열에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을 장수로 정하여 출전하도록 하소서!"
즉 문관복을 입은 문신의 지휘를 받지 아니하겠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비단옷 입은 문관에게 청하라 하였고, 이날 조선군 400여 명이 출전하여 청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군은 청군 100여 명을 죽였고, 흐른 피가 땅에 가득하다고 하였다. 또한 전장터에서 호전 104개, 호궁 4개, 검 1자루, 궁대 1부, 갑주 1부, 양구 1벌을 노획하였다. 과장된 말을 다 믿을 수 없으나, 큰 성과임은 분명했다. 이날의 승리로 조선군의 사기는 충천했으나, 진눈깨비가 크게 몰아쳐 병사들이 괴로워하였다. 왕은 세자(소현세자)와 사관, 그리고 신하와 함께 후원으로 나와 날씨가 개이기를 빌었고, 향을 사르고 사배하고 기원하였다.
"이 고립된 성에 들어와서 믿는 것은 하늘뿐인데, 찬 비가 갑자기 내려 모두 흠뻑 젖었으니 끝내는 반드시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내 한몸이야 죽어도 애석하지 않지만, 백관과 우리 만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날을 개게 하여 우리 백성을 살려 주소서, 살려 주소서!"
하고, 그대로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울면서 기도하는 사이에 왕의 옷이 다 젖었는데도 그만두지 않았다. 좌우의 문무백관 신하들과 병사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지 않는 자가 없었다. 3정승 등 여러 재상들이 왕의 옷을 잡아당기며 일어나기를 청하자, 인조가 잠시 뒤에 일어나 사배하고 물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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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부(體府)의 청에 따라, 인조는 성안의 야윈 말을 잡아서 병사들에게 주었다. 한편 12월 26일, 강원도에서 소집된 수천여 명의근왕병이 양근까지 진출하였으나, 청군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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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공청감사 정세규가 이끈 군대는 험천에서 전군이 패몰하였다. 한양에서는 유도대장 심기원이 270명의 군사로 500~600명의 청군과 맞서 싸워 화공(火功)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소식이 남한산성에 전해지자 군사들의 사기가 배가 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에서 도체찰사 김류는 북문 밖으로 출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12월 29일, 도체찰사 김류는 남한산성 북문 맞은편의 법화동 방면의 청군 진영이 취약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당시 청군은 일부러 노약병과 취약한 군사를 남겨두는 기만책을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류는 그곳으로의 출전을 명령하였고, 많은 장수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청군의 책략을 예측할 수 없으므로 함부로 출격해서는 아니되오!'
그러나 김류는 방비장 유호를 시켜 성 밖으로 나가기를 주저하는 장병 몇 명을 참수하였다.
결국 조선군 300여 명이 출성하였고, 청군은 계곡 양면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청군 진영에 도착하여 포로와 우마를 거두고 있었고, 그때 청군이 조선군을 포위하여 튀어나왔다. 조선군의 위기로 김류는깃발을 휘둘러 퇴각을 명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신성립· 지학해 · 이원길 등 300여 명의 조선군이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 조양출을 비롯한 장수 일부는 청군 수십 명의 목을 베며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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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전투는 드디어 중반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도 근왕병이 모집되어 남한산성으로 북상하고 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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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근왕 명령을 받은 전라도에선, 전라감사 이시방이 6천여 명의 전라도 근왕병을 징집했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 구례의 화엄사에서 승려인 벽암과 각성이 각각 1천여 명의 승병들로 구성된 항마군을 이끌고 전라도 근왕병의 대열에 합류하여 그 수효가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전라감사 이시방과 전라병사 김준용은 1월 1일에 직산까지 진출하였고, 남한산성에 전라도 근왕병이 올라가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한편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이 이끈 수천여 명의 군사는 황해 감사와 함께 병사를 나누어 청군을 요격해 동선(洞仙)에서 크게 깨부셨다. 경상도에서는 민영과 허완이 이끈 어영군 8천과 경상도 군대 수만여 명이 쌍령 지역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전라도와 경상도 근왕병의 출전, 동선 전투의 승리로 남한산성 내부는 잠시 활기를 찾았지만, 성 내부에서는 식량이 점점 떨어지면서 더욱 곤궁해지게 되었고, 청군의 포위망 압박 속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직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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