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티고지 전투 - 한국전쟁의 신화적인 전투
베티고지 전투 - 한국전쟁의 신화적인 전투
베티고지 전투는 다른 전투들에 비해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을 테지만 한국전쟁 중에 가장 신화적인 전투라고 칭송받는 전투이다. 김만술 대위가 이끄는 30명의 국군이 중공군 800명을 궤멸시킨 전설적인 전적을 올린 전투이다.
47년 상사로 입대하여 중화기 중대에서 근무하시다가 임관시험을 보시고 소위로 임관하셨다. 1931년 10월 28일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시고 1991년 5월 18일 날 돌아가셔서 현재는 국립묘지에서 안장되어 계신다. 1953년 제1사단 제11연대 제7중대 제2소대장이 되셨고, 소대장으로 임관하던 날, 소대원들 얼굴도 제대로 모르고 바로 베티고지로 투입됐다.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옆에 위치해 있다.
국군 전진부대는 한국전쟁 개전 초기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 개전 초부터 대단한 전과를 올렸었고 지금도 대한민국 휴전선 근처에 주둔하여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만술 대위가 임관되기 2일 전에 중공군은 이미 우리 국군이 점령 중인 베티고지에 총력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고지를 점령한다면 국군 1사단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국군 제2군단의 돌출되어 있는 방어선을 제거하여 2군단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만약 이 고지를 빼앗긴다는 것은 2군단 방어선을 중공군에게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만큼 베티고지는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
베티고지는 당시 제1 보병사단 최주종 대령의 11 보병연대 2대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급작스러운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이에 국군은 김봉건 대령의 제2대대는 김만술 대위가 임관하기 전까지 2일에 걸쳐 중공군을 겨우 격퇴하였으나
각 소대는 병력을 절반 이상 잃어 전투가 시작될 때마다 다시 군을 재편성해야 했다. 당시에는 병력이 많았던 중공군이 사실상 유리했었고 국군은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그 피해가 매우 커서 1사단에게는 죽음의 고지였다고 한다.
장마철이라서 탱크 기동에도 큰 방해가 되었고 화력운용에도 차질이 있었다. 수로 밀어붙이는 중공군에게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김만술 대위의 소대가 베티고지에 투입되었을 당시에 3개의 봉우리 중 중앙과 동쪽은 제1 보병사단이 사수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서봉은 중공군에게 빼앗겼다. 여기서 사실상 1개 소대로 그 수많은 중공군을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으나 김만술 대위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항상 공격에 급급했던 중공군은 예측하지 못한 공격에 당황하여 중공군 5명이 사살당하고 8부 능선을 돌파하여 서봉을 탈환했다.
서봉을 탈환 후에 김만술 대위는 바로 소대원들에게 방어선 구축을 명령하고 19시 30분 중공군은 서봉 재탈환을 위하여 2개 중대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전설적인 베티고지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 중대는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을 받았으나 김만술 대위는 상부에 포격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그마저도 포격으로 인해 통신두절이 되어버렸다. 소총과 수류탄으로 대항하던 김만술 대위의 소대는 중공군이 다가오자 백병전을 시작했다. 이때 김만술 대위는 병사 한 명을 보내어 자신들의 위치는 개의치 말고 진지로 포격을 요청하라고 시켰다.
중공군 2개 중대는 선봉에 불과했고 뒤에는 더 많은 병력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아마 그 소대원 수보다 몇 배는 많았을 것이다. 이를 들은 제1 보병사단은 M36 탱크를 이용하여 서봉에 90mm포와 중기관총을 퍼부었다. 그로 인해 많은 중공군이 사살당하였으나 이는 새발에 피에 불과했다. 2개 중대가 박살 나자 화가 난 중공군은 2개 대대를 투입해, 대략 800명 정도 되는 인원이었다. 김만술 대위는 소대원들에게 참호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고 상부에는 진지에 계속해서 포격을 요청했다.
김만술 대위의 소대는 소총과 수류탄이 모자라자 철모와 야전삽 , 개머리판 손에 닥치는 대로 무기가 되는 것을 집어서 중공군을 사살했다. 이 전투는 19시 30분에 시작되어 13시간 동안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식으로 4차례의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300명 이상의 전사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를 내고 대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소대원 34명 중 24명이 전사하지만......
베티고지 전투가 끝나자 김만술 대위는 베티고지에서 내려오고 열세의 상황에서 결사 항전하여 베티고지를 사수한 김만술 대위의 소대의 공을 인정하여 7월 23일 소대 생존자 중 이강로 하사에게 충무무공훈장이, 김순구 중사와 김흥규 중사는 각각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되었고 김만술 대위는 이 보다 늦은 1954년 2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UN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에게 미국 의회가 내리는 최고의 훈장인 십자훈장과 9월 25일 태극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김만술 대위의 소대가 목숨을 바쳐 막은 베티고지는 휴전협정 중에 북측으로 넘어갔다. 베티고지는 지금은 북측에게 넘어갔지만 당시에는 2군단의 방어선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였고 중공군에게 수백의 사상자를 내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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