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튼 워커 장군 - 한국전쟁의 영웅
윌튼 워커 장군 - 한국전쟁의 영웅
워커 장군을 이름은 들어본 사람들은 많겠지만 아마도 그건 워커힐 호텔 때문 일 것이다. 맞다. 워커힐(Walker Hill)은 워커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거다. 흔히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만 기억하지 워커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다.
워커 장군(1889 ~ 1950)의 정식 이름은 Walton Harris Walker이다.
그나마 워커 장군을 아는 사람들도 워커힐의 이름이 워커 장군이 전사한 곳이 워커힐 부근이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워커 장군이 전사한 곳은 현재 서울 도봉동 도봉역 2번 출구 자리이다.
워커 장군은 1912년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기관총 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하면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제3 야전군 산하의 20 군단장으로 참전했는데 빠른 기동성과 활약으로 '유령 군단'이라고 불릴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은 1948년 미 8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인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후인 1950년 7월에 대구 사령부로 취임을 했다.
때는 우리 대한민국이 상당히 위험한 시기였다. 백선엽 장군과 항공 시찰을 통해 낙동강 전선의 중요성을 확실히 인식한 그는 중장이라는 계급에도 불구, 전선을 직접 지휘하며 국군장병에게 "내가 오늘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고 하며 그 유명한'지키거나 죽거나(Stand or Die)'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는 지금 시간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북한군이 먼저 부산을 점령하느냐, 아니면 맥아더 원수가 보내기로 한 증원 병력이 먼저 도착하느냐가 문제이다. 지금부터는 더 이상의 철수나 후퇴는 있을 수 없으며,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부산까지 후퇴한다는 것은 사상 최대의 살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포로가 되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 한 치의 땅이라도 적에게 양보하는 일은 수천 명에 달하는 전우의 죽음에 대해 보답하는 길이 못 된다."
이에 한 부하가 반론을 제기하자 옆에 있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말로 워커 중장을 치켜세워주기도 했다.
당시 한국전 참전에 회의적이던 미의회는 워커 장군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맥아더 장군이 워커 장군의 손을 들어줬다. 보통 미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미국의 정치적 이익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은데,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빈약하다. 낙동강 전선이 밀릴 지경이었을 때는 이미 미국은 정치적으로 이 전쟁을 유지할 의미가 없었다. 그 예로 UN군 전체 철수를 주장했고, 맥아더도 전면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New Korea Plan을 '미국 단독'으로 세우고, 서사모아 망명정부에 한국인 62만 명을 이주시키는 것으로 전쟁을 종전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이대로 실현되었다면 지금 우리는 인공기를 흔들고 있거나 선택된 일부는 서사모아에서 물고기나 잡고 살았을 것이다.
암튼 불멸의 워커 장군은 낙동강 전선을 현장 방문하고 덜 위급한 지역의 병력을 빼서 위급한 곳에 투입하는 '돌려막기' 전술을 썼다. 한정된 병력의 효율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렇게 낙동강을 사수하는 동안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던 거다. 워커 장군도 인천 작전에 참전했다.
그는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롭던 신생 대한민국을 죽음의 나락에서 건져 올린 제1 수훈갑이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전세가 중공군들의 '인해전술' 때문에 수세로 전환한 1950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이틀 앞둔 그날. 그는 중국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수훈을 세운 자신의 외아들 Sam Walker 대위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수여하는 은성 무공훈장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 지프를 타고 가다가 한국군 운전병이 운전하는 트럭에 받혀(피하다가..라는 말도 있으나 쨌든) 낭떠러지로 차가 굴러서 전사를 했다. 당시 운전병과 부관은 차 밖으로 튕겨 나와 살았는데 워커 장군은 그 자리에서 즉사... 향년 61세.
이에 격노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 운전병을 당장 사형시키라고 노발대발했으나 워커 장군의 아들을 비롯한 유가족의 탄원, 여러 미 8군 관계자의 만류로 징역 3년에 처해졌다. 그리고 장군은 중장에서 대장으로 추서 되고 웰링턴 국립묘지에서 영면을 하시게 됐다.
한편 아들 S. 워커는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미군 역사상 가장 빠른 나이에 대장까지 진급했고 또한 미군 역사상 최초로 부자가 대장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 아들 샘 워커는 1970년대 후반 차기 미 육군 참모총장으로있을 때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입장에 반대하다가 예편됐다.
1963년 주한미군이 휴가 때 일본으로 가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던 박정희 대통령께선 광장동에 미군용 휴양시설 건립을 지시하시고 그 언덕의 이름을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Walker Hill)’로 이름 지어 그를 기리게 된다.
지금은 SK가 운영하는 고급 호텔이 들어섰다.
그런데 워커힐에 장군의 추모비가 들어선 건 전쟁이 끝난 한참 뒤인 1987년이다. 그만큼 우리가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것도 대기업이나 정부가 한 것도 아니고 김리진이라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위관급 노병의 숨은 노력 덕분이었다.
다음은 신문기사.
김리진 선생이 말을 이었다. “정부나 대기업 누구도 나서지 않아 30년 동안 추모기념사업회를 혼자 해왔다.” 눈에는 서글픔이 가득. 김 선생은 6·25 때 위관으로 참전했지만 워커 사령관과는 일면식도 없었다. 애국심, 무섭고 지독하다. 1979년부터 도봉산 능선을 수십 차례 헤매며 사고 현장을 찾기 시작. 종군기자의 전설 지갑종으로부터 당시 사고 현장을 찍은 빛바랜 사진도 구했다. 7년 만인 1986년, 사고 현장을 ‘서울 도봉구 도봉1동 596-5번지’로 확인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하고자 하는 노력이다”라고 했던가? 그 노인이 김리진 선생. 1987년엔 워커힐 호텔 마당에 ‘워커 대장 추모 기념비’를 세웠다. 워커 사령관의 아들 샘 워커는 한국전쟁 때 최전방에서 대위로 참전했다.
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아들 워커는 김 선생에게 감사의 뜻으로 아버지가 차던 3성(星) 계급장을 감사패에 심어 선물했다. 그 계급장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찼던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차 군단장 조지 패튼 장군에게 기념으로 주었다가 패튼이 워커 사령관에게 선물했고, 아들 워커가 보관하고 있었다.
기사 인용 끝. 원본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428010338371750020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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