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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때, 북한의 남침을 예상 못한 미국

|||||||||||||| 2020. 9. 23.

한국 전쟁 때, 북한의 남침을 예상 못한 미국

이건 1950년 1월에 보고 된 CIA의 한국정세보고서다. 지금은 비밀이 해제돼서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
번역하면 대충 이런 뜻이다.
"최근 확대되고 있는 북한군의 38 선 남하 움직임은 아마도 공격적 성향을 지닌 한국군에 대한 방어 목적이 라 판단됩니다. 또한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에 의해 잘 훈련된 유입 종자가 북한군에 추가되었는데 얘들은 북한군의 인력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실질적인 전투 잠재력을 강화시킬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북한군은 38 선 인접부대에 탱크와 야포를 배치하고 있으며 공군력을 개발해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북한 애들의 힘이 강해짐에도 불구하고, 점점 효율성이 높아지는 한국 육군에 대한 확실한 우위를 개발하지 않는 한, 남침 가능성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38선에 소련제 탱크와 야포 배치가 늘어나는 걸 뻔히 알면서 어쩌면 저런 오판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당시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던 한국 육군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말은 더욱 이해가 안 된다. 참 한심스러운 당시 CIA.

마찬가지로 이것도 CIA가 본국으로 보고한 북한 체제 현황 리포트인데 전쟁이 발발 하기 일주일쯤 전인 1950년 6월 19일 짜이다. 소련의 대북 군사력 지원이 중국과의 지배력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저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남한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CIA 요원들이란....
어디에도 침략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것들은 CIA의 역대 유명한 오판 사례로 꼽힌다.

당시 세계적인 상황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이 유럽에서 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만들었다. 공산주의를 앞세운 소련이 동구권을 씨 벌겋게 만드니 이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연합이다. 이에 소련이라는 공산진영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만들어 맞대응해야 했고, 그래서 스탈린도 유럽에서 바빴고, 미국 도전 후 유럽의 복구에 매진하며 NATO라는라는 동맹까지 관리해야 하니 엄청 정신없는 시기였던 것은 맞다.
이러한 배경이 애치슨 라인이 선언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기회는 찬수라우! 내래 이찬수를 놓치지 않겠어요..."

하지만 모두 스탈린과 김일성의 기만전술에 녹아난 것이다. 김일성은 남쪽을 향해 화해 제스처 전략을 한동안 구사하기도 했고, 어쨌건, 남쪽을 점령해 붉은 조선의 왕이 되겠다고 결심한 김일성은 모두 가기 억 하는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개시했다. 한편 최근 밝혀지는 중국 내부정보에 의하면 김일성의 남침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대로했다고 한다.

"뭐? 김일성이 남침을 개시했다고? 나한테 보고도 없이... 괘씸한 놈!"
김일성이 전쟁 개시 일정에 대한 사전보고 없이 일을 저질러 마오쩌둥이 의자를 집어던지며 화를 냈다고 한다.
모두가 국제정세를 간 보며 갈등하던 시기에 김일성이 큰 형님들 컨펌 완료라 자신하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수를 던져버린 것이다.


마오쩌둥은 대만을 치려고 핵심 군대를 푸젠성으로 이동시켰었다. 푸젠성이 어디냐면 바로 대만 코앞이다. 마오쩌뚱은 자신의 큰 전략을 배려하지 않고 그냥 저질러버린 김일성이 미웠을 것이다.

지도의 빨간 부분이 바로 푸젠성이다. 이미 중국 내부에선 곧 대만을 친다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에 트루먼은 힘의 균형을 위해 태평양 제7함대를 저 동네로 보냈고 대만한테 니들 꼼짝 말고 가만있어!라고 경고했다. 행여 대만이 중국으로 도발이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테니...
당시 미국은 힘의 균형을 만들어 전쟁을 억제하는데 주력했다. 이렇게 중국과 미국이 보이지 않는 경합을 벌이고 있을 때 김일성은 6.25 남침을 일으킨다.

당시 북한군 각사단에 전달된 전투명령 1호 문서다. 당시 작전명은 "폭풍"이었다."Operation Storm."
작전명에서 속전속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동무들! 개시하세요"
남침 작전은 치밀한 준비하에 시행했다. 비록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대놓고 지원을 하지 않았다지만 그건 미국에 책잡히지 않으려고 그런 거고 뒷구멍으로 다 퍼줬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전설의 T-34 탱크, SU-76 자주포, 122mm 곡사포와 비행기로 한국군을 압도할 정도의 충분한 무장을 마쳤고, 게다가 개인화기로 PPSh-41가 정식 명칭인 따발총까지 보유했었다. 물론 이건 공짜가 아니었고, 소련이 제공한 2억 루블의 차관과 북한의 풍부한 광산물로 대금을 결제했다. 또 중국으로부터 만주에서 잘 훈련된 팔로군 출신 조선인 병력 5만 명을 인계받았다. 중국은 국공내전이 끝나 얘네들 용도폐기에 고민이었는데 잘된 것이었다. 병력이 필요한 북한과 용도폐기에 고민이던 중국에게 서로 윈윈이었다. 특히 이 5만 명의 전투력이 최고라 남침 시 큰 도움을 받았다.


한편 남한엔 스탈린까지 혹하게 만들었던 '남조선노동당 (남로당)'을 심어놨으며,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그들은 북한군이 내려가는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해 멀티로 작전이 수행될 거라 확신했다.

그동안 국지전 도발을 서서히 해오던 북한은 국군부대의 막사를 향한 야포 조준사격으로 옹진반도, 개성, 춘천, 강릉 등 38선 주변 도시를 모두 때리기 시작했다. 당시 변변한 무기 하나 없던 우리 국군은 속수무책 당했다.
그럼 우린 왜 무기가 없었느냐? 배경을 알아보자.
1949년 6월, 미군은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놓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애치슨 선언이 전부터 이미 발을 빼는 분위기였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지원을 간청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너네 미군이 빠져나간 후 우리 화력은 이틀 치 탄약 이전 부요. 무기 지원을 부탁하오"

"감당 못할 군사력이 왜 필요하오? 경제재건에나 신경 쓰시오"
(속마음:무기 줬다가 북침이라도 하면 3차 대전 발발이다. 일단 무시하자)

"절대로 북한으로 선제공격 안 할 테니 지원 요청하오. 만일 북한 이남 침하면 어쩔 거요?"

"그러면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도움을 청하시오"

"아쫌!!!"

"더 이상의 명분도, 예산도 없소. 그쪽에서 2,000만 불 군사원조를 요청했다던데 1,000만 불 지원해볼 테니 그만하시오"
하지만이 만불 군사원조는 무기가 아닌 통신장비와 통신케이블로 들어온다. 행여 무기라도 줬다간 무슨 사고가 날지 몰라서 걱정했던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때가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라 3차 대전에 대한 두드러기가 있었다. 그건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력에서 둘의 배경은 너무 다르다. 이승만은 일본의 식민지인 가난한 조선에서 미국으로 유학, 조지워싱턴대 학사- 프린스턴대 석사-하버드 박사학위 취득. 웬만한 미국인도 이루기 힘든 대단한 학력이었다.
한편 트루먼은 미주리 주시 골 출신, 집이 가난해 대학을 포기하고 포병에 입대 후 정치인으로 자수성가, 국회에 진출, 승승장구해서 미국의 부통령까지 올라갔는데 선대 대통령인 루스벨트가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해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

아무튼 북한군은 거침없이 진격을 거듭해 6월 28일, 남침 4일 만에 싱겁게 서울을 점령한다.
위 사진으로 당시 북한이 가진 탱크가 215대가 넘는 걸 반증한다. 아무튼 북한은 200대 남짓한 소련 제 T34탱크를 실전에 투입, 신속한 남침을 수행한다.
당시 탱크가 얼마나 첨단무기였냐면, 일 단모 든 사람들이 처음 접하는 신무기이기도 했지만, 우리 국군이 가진 바주카포나 대전차포로 아무리 명중시켜 봐야 불꽃만 번쩍이고 잠시 후 다시 움직였다.

이게 전설의 T34탱크야이다.

T34탱크는 4인승인데, 당시 탱크병들이 조선인 얼굴을 한 소련연방의 교포들이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비교하면 머리 검은 외국인이 다. 한국말을 못 알아 들었다고 한다. 탱크를 조종하려면 숙련된 스킬이 필요한 데스 탈린은 소련이 개입한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꼼수를 썼던 것 같다.
아무튼, 김일성은 도저히 적수가 되지 않는 우리 국군을 밀고 나가며 6.25 남침을 예상대로 신속하게 마치리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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