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신속한 남침과 미국의 참전
한국 전쟁 신속한 남침과 미국의 참전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었다. 우리 10만 명 vs. 북한 20만 명 (팔로군 출신 높은 레벨 5만 명 포함) 화력은 비교 자체가 어렵고, 여기에 자주포 242문은 물론, 장갑차, 항공기까지 준비된 전력을 막아낼까....
전력상 누가 와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 (John Muccio)는 북한의 선전 포고 없는 기습 침략 소식을 즉시 워싱턴으로 전했고 트루먼은 오랜만의 휴가를 즐기다 매우 화를 냈다. 참고로 당시 트루먼은 고향 미주리주에서 휴가 중, 애치슨 국무장관은 메릴랜드의 농장에서 휴가 중이었다.
꿀 같던 휴가에서 즉각 워싱턴으로 복귀한 트루먼은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전보장위원회의 소집을 요청한다. 주미대사 장면 (張勉, John Myeon Jang) 또한 트루먼 대통령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미국 시간으로 6월 25일 오후 2시, 대북 제재 결의문은 찬성 9표, 반대 0표, 기권 1표로 통과된다.
"북한 봄니다... 우리 UN은 너희가 침략을 멈추고 너희를 규탄합니다! 규탄합니다!."
UN에서 추가 상정된 '한국 군사원조 결의안' 은 찬성 7, 반대 1, 기권 2, 불참 1로 통과된다. 불참 1은 소련이다. 남침을 부추겼지만 정작 국제무대인 UN에선 체면 떨어진다고 뒤로 슬그머니 빠진 거다. 북한, 중국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의리 없었던 거다.
"북한 봄니다. 우리 UN은 한국을 돕기로 결의합니다!."
애치슨 선언이라는 정책 때문에 한국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미 극동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일본에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일단 한국으로 날아가 상황을 봅시다"
그럼 잠시 맥아더 장군에 대해 알아보겠다. 중요한 인물이라 꼭 알아봐야 한다. 맥아더 장군은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 육사인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의 1년 선배이기도 하다. 훗날 1차 대전에 준장으로 참전했고, 프랑스에서 복무하며 최연소 사단장도 하고, 전쟁이 끝난 뒤 웨스트포인트 교장도 하고, 루스벨트 시절 미 육군 참모총장도 했다. 이후 필리핀 군사 고문으로 파견되어 육군원수로 활동하다 현역에서 은퇴한다. 아시아 지역에 대한 스페셜티를 가지고 자원입대, 미 극동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대일본 전투에서 80회 이상의 육해공 합동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기세 등등하던 일본을 두 발의 원자탄으로 항복시킨다.
다들 알겠지만, 맥아더는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아낸 주인공이다. 또한 천황이 신인 줄 알고 천황 만세! 를 외치던 일본 국민들을 계몽시켰다. (천황 스스로 "나 천황은 인간이에요"라고 말하게끔 이끌어내 계몽에 힘쓴다)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8.15 해방을 도운 인물이다.
맥아더 장군의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 (Arthur MacArthur. Jr) 도 3성 장군이었다. 당시 필리핀의 초대 군정 총독이던 아서 맥아더는 대한제국 시절 고종 황제를 알현해 향로를 선물 받았고, 이걸 둘째 아들인 맥아더 장군에게 가보로 물려줬다고 한다. 아들은 이 향로를 엄청 아꼈고... (하지만 필리핀에서 육군 원수로 주둔하던 시절 분실)
후일 이승만 대통령이 잃어버린 그 향로의 레플리카를 구해 맥아더 장군에게 선물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보다 다섯 살 형뻘이다.
"아 내가 한국에 랜딩 했다!"
맥아더 장군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등포 옛 오비맥주 공장 자리까지 올라와 전세를 살피는데 다들 수그리~! 수그리~! 하며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이때 유일하게 단단하게 자세를 유지했던 사람이 맥아더였다고 후일 백선엽 장군은 술회한다. 모두 그 대담한 배포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한강 이남을 둘러본 맥아더 장군은 많은 구상을 한다. 그중엔 후일의 인천 상륙작전도 있다는 것이다. 아, 그리고 외모가 뚱뚱해 팻 채 (Fat Chae)라고 부르던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도 잘라버린다.
채병덕 장군은 당시 우리 육군의 대표적인 엑스맨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노는 걸 유독 좋아하던 채 장군은 개념 없는 것에 대표주자였다. 6.25 남침 이후 서울이 쉽게 함락당한 건 채 장군의 책임이 워낙 컸다. 오죽함 채병덕 장군이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음모론도 있다.
6월 21일 전군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6월 24일 전방의 지휘관 인사이동을 단행해 지휘체계를 혼란시키고 같은 날 용산 육군본부에서 장교클럽 건물 완공 (낙성) 파티를 열고 흥청망청 했다. 맥아더 장군은 한강 이남 시찰에서 채병덕 장군에게 질문을 툭하니 던진다.
"채 장군, 이 상황에서 귀관의 전략은 무엇이오?"
"암튼요.. 우리 200만 청년들을 징집해 훈련시켜 투입해 까부시면 됩니다!"
"오우 나이스, 채 장군 암튼 좋은 전략이오"
일반적인 미국 사람들이 그렇듯, 맥아더 장군은 앞에선 나이스 하게 대해줬지만, 사람 볼 줄 아는 이 예리한 베테랑 노장군은 채병덕 장군의 횡설수설에 매우 화났다. 그리고 옆에서 채 장군을 침 튀기며 껄껄껄 칭찬하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조용히 말한다.
"저 친구 당장 갈아치우시오"
그래서 바로 다음날인 6월 30일, 육군 참모총장은 정일권 장군으로 교체됐다. 채병덕 장군은 경남 지구의 지잡 사령관으로 강등당했다.
바로 다음 날, 맥아더 장군의 상황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미 지상군의 한국전 투입을 승인하고 7월 17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다. (참고로 당시 천조국은 경제 상승세라 활력 넘치고 분위기 좋았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고 아주 먼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일은 미국민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이번 북한의 침략은 모든 자유국가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또한 이번 행위는 인류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유국가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는 우리에 대한 도전으로 미국도 정면으로 대처할 것입니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 코리아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던 자국민에게 참전의 당위성을 호소하던 연설인데 지금 봐도 결과적으로 틀린 말이 없다. 당시 미국 수뇌부의 저런 액션이 없었으면 우린 지금 수령님 배지 달고 깊은 배고픔의 속에 강성대국의 태양신 김부자 일가를 찬양하며 살았을 거다.
애당초 우리 힘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한 것이 이유가 되는 거다. 미중소일이 복잡하게 얽힌 지정학적인 배경과 역사 속에서 당시 강대국의 간섭 없이 우리 힘으로의 민족적 통일을 이룬다는 건 이상주의자들의 환상인 것이고,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마오쩌둥의 중국이 가만있었을까? 온 국민이 중국 공산당원이 되어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장개석이 이겼으면?? 그래도 최소한 중국 찬양하면서 조공은 바쳐야 하지 했을 것이다. 그게 이 반도 국가의 흔했던 지정학적 배경이요, 역사라는 것이다.
다시 6.25로 돌아와서 미국은 첫 번째 파병으로 일본 규수에 주둔하던 미 8군 24사단 21 연대 1대대, 일명 스미스 부대 (Task Force Smith)를 한반도로 보낸다.
스미스 부대는 부산으로 입항해 기차로 대전역에 도착한다. 540명으로 구성된 나름 보병 특공대라지만 표면적으로는 간지 나는 부대 이름만큼의 성과를 못 이루었다. 당시 이 부대의 최고 지휘관은 미 8군 24 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Dean)' 소장이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
"딘 소장, 자네의 임무는 북한군의 대전지역 남하 지연일세, 후방에서 준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벌게"
미 8군 24 사단장 딘 소장
"옛썰, 우리 미국의 힘을 보여주겠습니다"
그러나 오산으로 올라가서 남진하던 북한군과 조우한 스미스 부대는 36대의 T-34 탱크를 앞세운 화력과 배후에 몰려오는 사단급 병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실상 궤멸되고 만다.
그때 파괴된 T-34 탱크 기념사진이다. 탱크에 쓰여 있는 글을 보면 알겠지만, "딘 사단장이 지휘하는 우리가 7월 20일 이놈을 파괴했다"인데, 그저 당시 36대의 T-34 탱크 중 4대만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해치 열고 튀어나오는 전차병 잡아가면서 대전차용 바주카포로 공격했는데 소용이 없길래 후방의 105mm 포병 지원을 받지만 대부분의 T-34 탱크는 미군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그렇게 지나가던 탱크를 바라보며 당시 스미스 부대원들이 나눈 이야기가 전설이다.
"야 그래도 쟤들이 우리 미군을 봤으면 겁먹고 돌아갔을 텐데?"
"아마 우리가 미군인지 몰라서 지나갔을 거야"
아무튼 스미스 부대는 첫 미군 사망자는 물론 많은 사망자와 포로를 남기고 후방으로 내려오게 된다. 전략적으로는 미군이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퇴각했지만 성공한 것은 북한에게 메시지를 주었다는 것. 즉 미군이 직접 참전했음을 알린 거다.
이것만으로도 북한을 충분히 긴장하게 만든 전술적인 효과는 있었다. 다음은 당시 미 8군 24사단 장인 윌리엄 딘 장군의 이야기다.
딘 소장은 과거 우리나라 해방 직후 미 군정 시절 군정청의 우두머리인 군정장관이었고, 이번 참전에선 별을 두 개나 단 사단장이었지만 스미스 부대를 자빠뜨리고 대전까지 내려온 T-34 탱크에 직접 바주카포를 들고 공격하며 싸웠다. 총 지휘관 입장에서 사기도 높여야 했고, 그만큼 상황도 안 좋았고, 하지만 북한군의 엄청난 전력에 밀려 미 24사단은 대전을 버리고 퇴각하게 된다.
한편, 딘 소장은 지프차로 퇴각하다 부상병을 발견했다. 부하 사랑하는 마음에 부상병을 지프차에 태우고 본인은 걸었다고 한다. 그러다 부상병 마실 물 구해주러 다니다 대열에서 벗어난다. 여기서 딘 소장의 스토리가 시작되는데...
혼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는 부산 쪽 방향을 잘못 잡아 무주 근처에서 헤매게 된다. 쉽게 말하면, 경상도로 가야 하는데 전라도로 간 거다. 그 와중에 절벽에서 실족학도, 실신도 하고.... 마침내 무주에 당도한 딘 소장은 무주군 적성면 방이리 산골 마을에서 박종구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3일간 체류하고 떠날 때 고마움의 표시로 손목시계를 선물한다. (나중에 딘 소장 아들도 공군으로 한국에 복무하는데 다시 찾아가 이 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아무튼 다시 길을 나선 딘 소장은 한두규, 최천봉이라는 마을 청년을 만난다. 이들은 그간 우익 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데 공산당이 마을을 점령해 세상이 뒤집어진 상황에서 자진 신고하면 목숨만은 살려준다 해서 진안읍으로 소위 자진 납세하러 가는 길이었다. 딘 소장은 이들에게 대구로 가는 길을 물어보고 길을 안내해주면 사례를 꼭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길을 가던 중 잠시 쉬라고 해 놓고 어디서 인민군을 떼로 데려와 딘 소장을 넘겨버린다. 한두규 최천봉은 인당 약 5달러 (당시 돈 3000원)의 포상금을 받았는데 공산당애들한테 큰 일 했다고 칭찬하고 우익 과거도 눈감아줬다. 별 두 개를 단돈 5달러에 넘긴 거다. 물론 그땐 별 인지도 몰랐다. 그냥 미군으로 알고 그랬다. (정전 후 한두규는 '밀고죄'로 옥살이를 하고 후일 마음씨 고운 딘 소장의 선처 요구로 석방되지만 평생 마을에서 빨갱이로 욕 쳐 먹으며 산다)
북한군은 사단장이자 과거 군정장관인 거물을 잡았으니 횡재했다. 딘 소장은 정보 누설을 우려해 자살을 실행했으나 실패했고, 미군은 딘 장군을 위한 구출작전을 실행했으나 실패했다. 딘 소장은 북한으로 올라가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며 갖은 고생을 다 한다.
그리고 이렇게 북한의 선전물에 등장하게 된다. 인민군과 장기도 두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쓰고, 딘 장군은 북한의 포로수용소에서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소일거리로 3년간 총 40만 마리의 파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잡은 파리의 수를 통계로 기록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파리 잡는 도를 터득하고 후일 술회한다.
"파리는 앞발을 비비고 있을 때 잡아야 합니다. 네 발을 벽에 붙이고 있으면 날 준비를 마친 거라 성공 확률이 떨어집니다"
결국 딘 소장은 정전 협정 이후 포로 맞교환에 의해 풀려난다.
고국으로 돌아가 중장으로 예편한 그는 평생 김치 맛을 잊지 못해 직접 김치를 담가 먹었다고 한다. 주변에 한국 사람들 있으면 나눠주고 그랬다고 한다. 한국이란 나라와 참 사연이 많은 딘 소장.
평생 한국을 기억하며 살아간 그는 지금 이렇게 샌프란시스코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한편 딘 소장의 미 24사단을 자빠뜨리며 진격한 북한군은 전라도 지역으로 거침없이 내려왔으며 국군과 미군은 산발적인 저항을 하며 내려온다. 계속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데 주력한 거다.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북쪽을 접수한 북한군이 점점 5시 방향으로 내려오자 UN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대한 몸빵으로 시간을 번 뒤 부산항을 통해 병력과 군수를 보충하고 총 반격할 구상을 하게 되는데....
한편 딘 소장의 미 24사단을 자빠뜨리며 진격한 북한군은 전라도 지역으로 거침없이 내려왔으며 국군과 미군은 산발적인 저항을 하며 내려온다. 계속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데 주력한 거다.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북쪽을 접수한 북한군이 점점 5시 방향으로 내려오자 UN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대한 몸빵으로 시간을 번 뒤 부산항을 통해 병력과 군수를 보충하고 총 반격할 구상을 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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