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일생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일생
1335년, 이성계 탄생.
태조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체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어릴 때 화령과 함주 사이에서 노니, 북방 사람들로서 매를 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이성계와 같이 뛰어나게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
1356년, 이성계의 나이 22세.
아버지와 함께 고려 왕조의 명을 받들어 쌍성총관부 탈환에 기여하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원나라의 관직을 받았지만, 원이 쇠퇴하자 고려 왕조에 투항하였다. 이후 고려의 벼슬을 받았고, 이성계 부자(父子)는 동북면(함경도)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한편 이성계의 격구 실력은 대단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몹시 놀라면서 그 실력을 칭송하였다.
1361년, 이성계의 나이 27세.
친병 1천 5백여 명을 동원하여 독로강(현 평안북도 강계)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이때 홍건적 20만 군사가 고려의 서북 변경을 침범하자,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왕원수(王元帥) 이하 홍건적 1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1362년, 이성계의 나이 28세.
홍건적 20만 대군이 고려의 수도 개경을 점령하여 여러 달 동안 주둔하며, 개경 백성들을 불태우거나 토막 내서 먹는 등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공민왕은 신하들을 곳곳에 풀어 군대를 모병하게 하였고, 심지어 노비를 해방한다는 명목 하에 20만 대군을 모아 개경 탈환전을 준비했다. 이때 2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걸, 이성계는 불과 2천 가병으로 개경 동대문을 제일 먼저 돌파하여 적장의 목을 베었고, 뒤에서 홍건적 병사 한 명이 창으로 이성계의 오른쪽 귀 뒤를 찌르려고 하자, 이성계는 칼을 빼어 앞에 있는 적 7, 8명을 베고 말을 채찍질해 몸을 피했다. 이성계의 선전에 고려군이 기세를 타고 개경으로 들이닥쳐, 10만 명이 넘는 적병의 목을 베었다.
1363년, 이성계의 나이 29세.
이성계는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큰 군공을 세웠기에, 온 나라 사람들이 이성계를 주목하였다. 이해 2월, 군벌 나하추가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변경을 침범했다. 도지휘사 정휘가 여러 번 싸웠으나 크게 패전하여 이성계를 보내기를 청했으므로, 이성계가 동북면(함경도) 병마사가 되어 출진하였다.
나하추는 1천여 명의 선봉 부대를 출진시켰는데, 이성계는 덕산동 원평에서 이들을 물리쳤고, 차유령과 함관령 고개까지 추격하여 나하추 선봉군을 섬멸했다. 이후 이성계는 6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적들을 추격하였고, 삼국지식 일기토로 붉은 기꼬리 장수 1명을 사살했다. 이어 말을 돌려 두 장수를 쏘아 모두 죽이고, 20여 명의 적군을 죽였고, 기병으로 적병에 들이닥치니, 나하추 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어 패주 하였다.
"내가 본디 고려와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닌데, 백안첩 목아왕(고려 공민왕)이 나이 젊은 이 장군(이성계)을 보내어 나를 쳐서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소. 이 장군(이성계)께서 평안하신가? 나이 젊으면서도 용병함이 신(神)과 같으니 참으로 천재이오! 장차 그대 나라에서 큰일을 맡을 것이오이다!"
『나하추』
1364년, 이성계의 나이 30세.
고려 공민왕이 노골적인 반원 정책을 취하자,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의 왕으로 세우고자, 최유와 덕흥군에게 1만의 원군을 주어 고려로 보냈다. 이때 이성계가 탄 말이 진흙탕에 빠져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힘을 다해 떨쳐 뛰어나왔고, 적장 2-3명을 활로 쏘아 사살했다. 이 기세를 타고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이 돌입하여 적병을 크게 깨부수었다. 또 이해 삼선 - 삼개가 여진족을 이끌고 동북면을 침공하여 함주를 함락시켰는데, 함주는 이성계의 근거지였다. 당시 이성계는 서북면에서 최유군과 싸우고 있었기에 동북면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고려 관군은 여러 번 패전하여 이성계가 오기를 고대했는데, 이성계가 최유의 원나라군을 깨부수고 즉시 동북면으로 달려와 여진족을 깨부수고 화주와 함주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였다. 공민왕은 크게 기뻐하여 이성계를 밀직부사로 삼았고, 단성 양절 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칭호를 내리는 등 크게 우대했다.
1365년, 이성계의 나이 31세.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원나라 명장 조무가 무리를 거느리고 고려 땅 일부를 점거했다. 이에 이성계가 휘하의 군사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종말에 반드시 난리를 일으킬 것이니 이를 그냥 둘 수는 없다!"
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쳤으나, 조무가 용맹하고 날랬기에 이성계는 그를 얻고자 했다. 이성계는 고도리전으로 쏘아 수십 번을 맞혔고 이때 조무가 말에서 내려와 절하므로 그를 사로잡았는데, 조무가 마음속으로 이성계에게 복종하여 마침내 시양(천한 일을 하는 하급 병사)이 되어 이성계 군단에서 종신토록 복역하였고, 훗날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1369년, 이성계의 나이 35세.
공민왕은 야심 찬 영토 확장을 꿈꾸며 출정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이성계는 그간의 공로가 인정되어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고려 군부의 실력자로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1370년, 이성계의 나이 36세.
드디어 이성계는 보병 1만 명과 기병 5천 명, 도합 1만 5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요동으로 진군했다.
당시 공민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를 북방에 보냈으니 반드시 그 감응일 것이다."
이성계 군대의 진군에, 이원경이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했고, 이성계는 편전을 사용하여 적병에게 70번을 쏘았는데, 70번 모두 적병의 머리에 명중했다. 이성계는 노련한 지휘로 요동성과 우라산성을 함락시켰고, 요동 고토에 고려의 깃발을 꽂았다. 그러나 군량 창고 방화와 당시 고려의 형편상(재정 문제), 요동 군벌의 추격 등 여러 악재가 겹쳤기에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성계는 고려 땅으로 다시 후퇴했다.
1372년, 이성계의 나이 38세.
왜구가 동북면을 침범하자, 이성계가 화령부윤(和寧府尹)과 원수(元帥) 직을 겸임하여 왜구의 공격으로부터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때 요동성의 장수 처명이 나이가 이미 늙었는데, 이성계를 따라 화령에 가서 사냥하다가 땅이 험하므로 얼음판에 미끄러졌다. 이성계는 즉시 가파른 비탈을 말을 달려 내려와서 큰 곰 3-4마리를 쏘아서 처명을 구하였고, 처명은 탄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지만, 공(公)의 재주는 천하의 제일입니다."
1377년, 이성계의 나이 43세.
왜구가 지리산을 침공했는데, 이때 200보 밖에 있던 왜구가 바지를 벗고 조롱하자, 이성계가 애기살을 쏴서 왜구를 사살했다. 이후 왜구가 절벽으로 도주하자, 이성계가 앞장서 절벽을 오른 후 왜구를 대거 섬멸하였다. 이후 1378년(이성계 44세)에는 왜구가 승천부를 침공하자, 최영과 연합해 왜구를 섬멸하였다.
1380년, 이성계의 나이 46세.
이해 8월에 왜구가 500척의 대선단으로 진포에 침입하였고, 고려 육지 곳곳을 휩쓸며 고려 백성들을 토막 내고 살육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한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경인의 왜구'는 온 산야에 핏빛 잿더미를 선사했고, 해안가에는 사람이 살지 않을 정도의 처참한 상황이었다.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두껍기가 한 자 정도이며, 포로한 자녀(子女)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지나간 곳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2, 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腹]를 쪼개어 깨끗이 씻어서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 지내니, 삼도(三道) 연해(沿海)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게 되었다. 왜적의 침구(侵寇) 이후로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이에 이성계는 자신의 의형제 이지란과 함께 적장 아지발도를 활로 쏘아 사살했고, 이성계는 휘하 부대와 함께 1만여 명의 왜구를 섬멸하여, 겨우 70명의 왜구만이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7일 동안 물을 마실 수 없었으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며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왜구의 보병 : 기병 편제가 3 : 1 정도임을 감안하며, 또 전장에서 죽었을 말의 수량을 헤아리면 1,600여 필의 말을 포획했으니, 엄청나게 많은 왜구가 사살됐음을 알 수 있다(황산 대첩).
최영이 눈물을 흘리여 말하기를,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황산 대첩)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고려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니, 이성계는 감당하지 못하였고, 왕이 금 50냥을 내려 주니, 이성계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인데, 신이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나이까!"
한산군 이색은 시를 지어 이성계를 칭송하였다.
"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 충성은 백일(白日)처럼 빛나매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위엄은 청구(靑丘)에 떨치매 바다에 바람이 없도다. 출목연(出牧筵)의 잔치에서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 능연각(凌煙閣)의 집에서는 영웅을 그리도다. 병든 몸 교외 영접 참가하지 못하고, 신시(新詩)를 지어 읊어 큰 공을 기리네.”
하였다. 전 삼사 좌사(三司左使) 김구용(金九容)은 이를 화답하기를,
“적의 기세 꺾기를 우레처럼 하니, 군사의 지휘가 모두 공(公)에게서 나왔네. 상서로운 안개 퍼져 나가 독한 안개를 없애고, 서리 바람 매서워서 위엄 바람 도왔도다. 섬 오랑캐 간담이 떨어지매 군용(軍容)이 성대하고, 이웃나라가 마음이 선뜩하매 사기(士氣)가 웅장하네. 온 나라 의관(衣冠)이 다투어 배하(拜賀) 하니, 삼한 만세에 태평의 공이네.”
라 하였다. 성균 좨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이 이를 화답하기를,
“3천 신하 마음과 덕이 모두 다 같은데, 군율(軍律)은 지금에 와서 모두 공에게 있도다. 나라 위한 충성은 밝기가 태양과 같고, 적을 꺾은 용맹은 늠름히 바람이 나도다. 동궁(彤弓)은 빛나서 은영(恩榮)이 무겁고, 백우전(白羽箭)은 높다랗게 기세가 웅장하다. 한번 개선(凱旋)하매 종사(宗社)가 안정되니, 마상(馬上)에서 기공(奇功) 있을 것을 이미 알겠네.”
하였다.
1382년, 이성계의 나이 48세.
호바투가 4만여 명의 기병 군단을 이끌고 이성계의 근거지인 동북면을 침공했다. 당시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은 모친상으로 인해 동북면에 없었던 상황인데, 이 위급한 상황에서 이성계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지란을 불렸다.
"국가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상복을 입고 집에 있을 수가 없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라오라!"
國家事急, 子不可持服在家, 其脫衰從我
4만의 기병이란 수치는 이지란신도비에서 나오는 언급이지만, 정황상 분명 과장된 수치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매우 심각했고, 이성계는 자신의 뛰어난 용병술로 호바투의 기병 군단을 격파했다.
1383년, 이성계의 나이 49세.
후대, 조선이라는 새 나라의 왕이 될 수 있게 해 준 정도전과의 첫 만남.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영을 방문하여, 호령이 엄숙하고 잘 정돈된 이성계 군대를 보고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이성계가 말하기를,
"무엇을 이름인가?"
이에 정도전이 말하기를,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1384년, 이성계의 나이 50세.
이해 왜구가 이성계의 근거지인 함주를 침공했는데, 이성계는 자신의 가병 군단을 이끌고 왜구를 격파했다.
1388년, 이성계의 나이 54세.
요동 정벌을 위해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출병,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고 이런 악재 속에서 회군을 결심했다. 이들은 고려 왕조에 칼끝을 돌리며 개경으로 들이닥쳐 정권을 장악했다. 요동 정벌을 주장한 최영은 처형당했고, 왕좌도 바뀌게 되었다. 이성계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 등을 기용하여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등 세력을 키웠고,
자신의 무(武)와 신진 사대부의 사상적 기반을 바탕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1392년, 이성계의 나이 58세.
이성계 일파와 조정 신하들은 이성계를 왕위에 올리고자 하였다.
"폐주 정창군 요(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는 나와서 왕대비 마마의 교지(임금을 폐함)를 받아라!"
공양왕은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겠습니까..."
폐위된 왕은 강원도로 옮겨졌고, 1392년 7월 16일 왕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졌다. 백관들은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 집을 찾았고, 몇 시간째 이성계에게 다음과 같이 외쳐댔다.
"억조창생이 한결같이 바라는 바, 공(公)께서 부디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어주소서!"
그러나 이성계는 사양의 뜻인지는 몰라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신하들은 마침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마당을 점령하고 옥새를 대청에 놓았다. 이성계는 시종의 부축을 받아 마지못해 나왔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드디어 이성계가 문무백관의 추대를 받아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조선 제1대 군주 태조(太祖) 이성계이다. 바로 국호를 바꾼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명나라에게 화령이냐, 조선이냐를 둘러싸고 국호 결정을 의논했고, 그리하여 조선이 채택되자, 정식 국명을 '조선'이라 하였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고려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그리하여 왕씨 세력을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목을 참수하였다. 드디어 조선의 시대가 열린 것이리라.
1395년, 태조의 나이 61세.
태조가 정도전 등 조선의 개국 공신을 불러 술을 마시고 풍악을 잡혔다. 분위기가 한창 달아오르자, 태조가 정도전과 조선의 개국 공신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경 등의 힘이니,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만대에까지 이르기를 기약함이 옳을 것이다."
이에 정도전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중략) 신이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말 위에서 떨어지셨을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역시 항쇄 했을 때를 잊지 않으면, 자손만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웃으며 이르기를, 사람을 시켜서 문덕곡을 노래하게 하였고, 정도전에게 눈을 껌벅이면서 하는 말이,
"이 노래는 경(정도전)이 작곡했으니, 경이 일어나서 춤을 추라!"
정도전은 즉시 일어나 춤을 추었고, 태조가 정도전에게 윗옷을 전부 벗고 춤을 추라 하자, 정도전은 웃통을 모두 벗어 춤을 추며 태조를 향한 자신의 충심을 드러내었다. 정도전은 태조를 위해서라면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고, 태조가 여리거나 안쓰럽게 보일 땐, 눈물을 흘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398년, 태조의 나이 64세.
세자 문제 등 여러 문제 등으로 인해 이방원과 정도전의 관계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성계의 5번째 아들이었던 왕자 이방원이 정도전을 살해했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과 함께 세자 이방석을 지지해줬고,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세자 교육까지 시키게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자신의 이복동생인 이방석과 함께 정도전을 죽여버렸다(제1차 왕자의 난). 그렇게 조선의 개국 공신이자, 태조가 아꼈던 정도전을 생을 마감했다. 이 소식을 접한 태조는 큰 충격을 받았고, 몸에 힘을 잃었고 토하고자 하였으나 토하지 못하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이방원 일파는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권력을 공고히 했고, 아들 이방원 일파의 압력으로부터 이성계는 왕위를 물려주었다(정종 즉위). 그러나 정종은 2년 동안 하다가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겼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3대 왕 태종(太宗) 이방원이다. 이성계는 스스로 태상왕(太上王) 자리에 머물렀다.
1402년, 태상왕의 나이 68세.
태상왕(太上王) 이성계는 명나라 사신 온전에게 잔치를 베풀었고, 태종 이방원은 별시위 부대를 보내어 태상왕을 호위하게 하였다. 이때 잔치가 끝나자, 태종은 궁궐로 입궐했고, 태상왕 이성계는 별시위를 거느리고 자신의 피와 땀이 서린, 조선 왕조의 창업지인 동북면(함경도)에 행차하려고 하였다.
이때 별시위 부대가 아뢰기를, 멀리 행차하는 것은 주상 전하(태종 이방원)의 뜻에 위배되기에, 그것은 아니 된다고 하자, 태상왕 이성계가 별시위 부대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내가 기른 군사인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느냐!"
이에 별시위 부대들은 태상왕 이성계의 눈물을 보고 마지못해 따랐으며, 태종 이방원은 즉각 사람을 보내 태상왕의 행차를 추적했다.
1406년, 태상왕의 나이 72세.
태종이 태상왕과 조선의 신하들, 여러 왕자들에게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태상왕 이성계는 심히 즐거워하였고, 태종이 크게 취하여 여러 번 술잔을 올리니, 태상왕은 번번이 마시며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 어찌 오늘날(조선 개국)이 있을 줄 알았으랴. 다만 오래 살기를 원하였더니, 이제 70이 지났는데도 아직 죽지 않는다."
하며 신하들에게 또 말하기를,
"경들은 사냥에 있어선 반드시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만일 배우고 싶다면, 내가 마땅히 가르쳐 주리다."
1408년, 태상왕의 나이 74세.
태상왕 이성계의 병이 위독하였기에, 태종 이방원은 친히 덕수궁에 나아갔다. 그리고 상왕(上王) 이방과(조선 2대 왕 정종)이 덕수궁에 나아가서 병환을 물었으나 들어가 뵙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돌아갔다. 이날 태상왕의 병이 심히 위독했기에, 태종은 조선 8도 전국에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이해 5월 24일 아침, 큰비가 계속 쏟아졌다. 그리고 태상왕 이성계의 병이 위급함이 의원에 의해 알려졌고, 태종은 왕의 행차는 집어던지고 맨발로 빨리 달려와 청심원을 드렸으나, 태상왕 이성계가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2번 쳐다보고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상왕(上王) 이방과(조선 2대 왕 정종) 역시 단기로 빨리 달려왔고, 태종은 아버지의 죽음에 가슴을 두드리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으니 소리가 밖에까지 진동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경외(京外)의 음악(音樂)을 정지하고, 도살(屠殺)·가취(嫁娶)를 금지하고, 대소례(大小禮)와 조시(朝市) 1266)를 정지하고, 제3일에 이르러 대신(大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에 고하소서.”
이방원은 잠시 슬픔에 잠기고, 3일 후에 상왕(上王)께서 빈전에 전을 베풀자, 비로소 나물 반찬으로 식사하며 밥을 먹었다. 이성계는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산전수전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고, 그가 평생 꿈도 꾸지 못한 왕 자리에 오르는 등 큰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아들 이방원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 암암리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아들 이방원에 의해 자신이 사랑했던 측근들과 친족들을 잃자 아들과 대놓고 갈등 노선을 벌이기도 하였다. 태상왕 자리에 물러나고 나서는 조용히 곳곳을 유람하며 말년을 보냈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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