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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원인, 국가부도의 날

|||||||||||||| 2020. 11. 11.

IMF의 원인, 국가부도의 날

 

외환보유액

우리나라는 국가부도. 즉 모라토리엄은 발생하지 않았다. 외환이 부족하였고 필요 이상의 과도한 IMF 관리를 받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음모론적 시각에 기반하여 반 기업, 재벌 정서 + 반 관료 + 반 미국을 버무려서 IMF를 맞은 것을 제외하곤 전부 가설이니 영화 제목은 잊고 시작한다.

영화 빅쇼트와 국가부도의 날을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빅쇼트는 시장의 버블을 파악, 반대매매를 한 투자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투자 재난 영화라면 국가부도의 날은 그냥 비교대상 급이 아니다. 음모론은 대안이 아니라 비판이며 선동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음모론을 퍼트리는 유명인들이 방송에 출연하고 주목을 받으며 흑백논리를 펼쳐가니 사람들에게 더욱 먹혀들게 된다.

IMF 시절에 대한 기억은 30대 이상, 공부를 좀 한 학식 정도만 어느 정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고민을 하다 그냥 가능한 카더라나 음모론적인 부분은 없애고 알려진 사실만으로 풀어갈까 한다.

위기의 시작

개인적 시각은 각각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한 어긋난 출발은 77년 닉슨 정부에서 준비 없이 넘어간 카터 정부라고 보는데 카터는 이전까지 미국이 가지고 있던 세계 영향력을 하나하나 잃어가고, 오일쇼크로 미국 제조기업들이 무너져갔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일본은 미국의 자동차, 가전산업 등에 영향력을 키워갔다.

결국, 카터는 재선에 실패하고 로널드 레이건이 등장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곧 '레이거노믹스'라는 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세금은 인하, 정부지출 삭감, 규제 철폐, 통화공급 억제 등을 펼치면서 미국 신 부흥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환율 덕분에 그동안 고도성장을 하며 재미를 본 일본이 무역과 미국 산업 영향력에 심각한 점유를 보여 계속된 압박하고, 결국 일본은 85년 '플라자 합의'를 채결해서 엔화 절상을 하게 되었고 엔화 절상은 곧 수출로 커왔던 일본의 경쟁력이 악화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남의 고통은 우리의 행복

일본의 빈자리를 곧 한국과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차지했다. 이 나라들의 경제는 급성장을 하게 되었고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 불렸다. 참고로 저 용어는 일본 언론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렇게 일본의 빈틈을 치고 들어가 미국 시장을 기반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던 성장과 그를 뒷받침한 국민성과 국가정책으로 거의 10여 년간 초고성장을 하면서 국민 절반 이상이 흔히 말하던 중상층, 먹고살만한 서민이란 의식 속에 해외여행이란 것도 좀 산다 싶으면 다니게 되었고 각종 프로스포츠와 문화가 급발전했다. 자고로 경제가 발전해야 문화, 스포츠도 함께 발전을 하는 법이다. 

그와 반대로 플라자 합의 이후 경쟁력 확보를 위해 일본은 자국의 저금리를 이용해, 투자와 산업체를 동남아 지역으로 이동해 갔는데 주요 나라는 태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였고 자국의 저금리를 이용하여 자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 부동산을 사들이며 버블을 키워나갔다. 일본의 분위기에 이어 일본이 하면 뭐든지 따라 하던 소득이 늘어난 우리나라도 빚내어 국내 부동산에 투기를 하기 시작했다. 소비를 받아줄 새로운 곳 즉 홍대, 강남, 압구정, 청담동 등이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으며 오렌지족과 서태지 같은 새로운 세대들이 주류로 탄생했다.

변화의 시기

그렇게 너도 나도 우리도 한번 해보자 각잡던 시절에 세 가지 중요한 변화가 생겨났다. 바로 아래와 같다.

  • 소련의 몰락
  • 미국 대통령에 민주당의 빌 클린턴 당선
  • 우리나라 대통령에 문민정부 김영삼 당선

민주당은 친 IT, 친 월가의 인맥과 정책들로 또 한 번의 미국 경제의 호황을 이끌어 나가는데 여기서 슈퍼 301조 행정 부활과 금리인상을 확 올렸다. 말 그대로 시장 소통 없이 기습인상으로 글로벌 자금의 의도적인 쏠림현상을 만들어 버렸고 94년 멕시코가 바로 IMF 구제 금용을 받게 되었다.

방심한 김영삼 대통령

"마! 내가 군사정권도 끝냈고 보통사람도 끝냈고 어제께도 민주화도 끌어냈고 갱재는 뭐..모르겠고 마 내가 다했어!"

오르지 민주적 정책에 힘쓰다 80년대 말부터 이어져가던 노조 총파업에 정권 안정을 위해 달래기를 하다 보니 말 그대로

노동시장의 조정을 놓치게 되고 취약 + 방만한 운영을 하던 기업이나 금융시장에 자금조달이나 리스크 관리에 허점이

넘쳐났던 은행들과 가계대출은 유동성 위기가 왔을 경우 엄청난 위기가 오는 건 당연한 환경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노력, 전두환과 노태우가 만든 경상수지 흑자에 취해 95년 세계화 선언 후 OECD 가입 후, 선진국 뽕과 자유와 민주국가임을 보여주려다 WTO 자유무역체제에 급 맞추려다 보니 현실과 엇박자가 생겼다.

(사실 95년을 기점으로 사회 여러 곳에서 호황 신호는 끝물)

잔치는 끝났다

당시 정부의 고정환율제는 외환보유고를 급격하게 탕진하게 되는데 금융시장 + 정부, 제2금융인 종금사의 엄청난 단기 외환자금거래 등 쌍팔년도식 방만한 관리와 제도적 허점이 있었다. 국내 30대 기업들은 평균 부채비율 514% 상황에 매출로 대출을 받아내는 식이었고 '상호 채무보증'을 통한 가공의 자본으로 묻지마 성장 위주에 당연시하던 분위기였다. 여기서 외환관리에 큰 허점을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 당시 수출입 관련 일을 했던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수가 미국, 일본 등의 환율, 금리 차이를 이용해 종금사 직원을 끼고 환차익 거래를 너도나도 해왔던 말 그대로 구멍가게 관리 수준이었다.

그러한 것을 정부에선 별다른 관리가 없었기에 경상수지가 적자가 되어도 외환관리에 손을 놓았다는 점이다.

사실 7~80년대의 확장 팽창식 부채 주도 성장이 통하던 시기를 벗어난 시대임에 불구하고 90년대 중반까지 왔다는 게 후진국스러운 모습이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지금도 문제가 심하다. 삐걱거리는 미국과의 관계로 경상수지에 적자지속 사회 각종 큰 사건사고 등 여러 곳에서 큰 사고들이 줄줄이 발생했다. 말 그대로 나라에 적신호가 들어왔던 시기였다. 외화가 갈수록 떨어져 가면서 사실 이쯤에 대기업들 부도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국정관리의 부실

그렇게 주제 모르고 나서다 독도문제, 미국과 고정환율, 교역문제 등등 동맹들에게 뒤통수를 당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언젠가는 시행했어야 하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등 좋은 면도 있었지만 임기 중반 이후 주택경기 활성화와 규제완화를 펼쳤는데 주택 가격과 토지 가격이 연평균 -3% 이상 폭락했다. 심지어 주택건설 예산을 지방자치단체에 부담했으나 예산이 확보되지도 않았고 대안도 없어 전 국토가 투기장으로 변해버리고 난개발이 난무하게 되면서 경기침체 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북한 문제로 해외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는 덤이었다. 나는 외환부족의 위기로 IMF가 왔다라기보다는 높은 부채의 기업들과 허술했던 관리의 정부, 대선을 앞둔 여야의 혼선, 법안 처리의 지연 등등이 있었으나 가장 큰 문제는 구조조정, 노동개혁을 김대중 대통령이 노조 + 좌파들을 결집하여 정책 지연시킨 부분이 크다라고 생각한다. 저때나 지금이나 지지층에 인기를 얻은 뒤 2~3년 뒤 지지층이 제일 피해를 보게 되는 건 마찬가지.

정치보복의 자살골

역대 대통령 중에 정치 보복한 한 사람이나 당한 사람은 항상 있었다. 그만큼 정치 후진국이라는 반증이기도 한데 정치보복을 피하려 대선후보들은 '정치 안 해요 내가 안 해요'를 외치거나 '대선에 도전하지 않겠습니다'를 외쳤다. 혹은, 서로 협력해야 할 판에 과거에 앙심을 잊지 못하고 비자금 등을 수사를 해왔는데 김영삼 대통령도 노태우 비자금을 수사하면서 세금공무원 출신이자 대치동 은마아파트로 큰돈을 벌어 한보철강이란 회사를 만든 정태수를 조사하면서 정관계 로비가 알려지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구속되고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면서 국정운영에 급 내리막을 타게 됐다. 정부의 신뢰가 상실하였으니 금융개혁법을 발표를 하여도 한계였다.

동남아에 시작된 위기

비슷한 시기 동남아시아국들은 수출경쟁력도 없으면서 관광수입이 주요 경제구조인데 일본의 저금리 돈을 끌어다 태국이랑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에서 채권시장 투기와 부동산 개발 등 버블을 일으키며 돈을 쓰면서 소로스를 비롯한 세계 주요 투기꾼들의 이목을 끌게 만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 고베에 대지진이 발생하게 되었고 일본은 엄청난 산업과 경제에 손실을 가져오게 되었다. 곧 일본 금융시장과 부동산 시장은 급속한 유동성 침체에 들어가고 미국과 딜로 역플라자 합의를 하게 되었다. 미국은 국내 무역적자와 새로이 탄생하는 유로화를 대항하기 위해 고 달러를 유지하려 했었고 국내외 여러 문제로 불안했던 일본은 투자금 회수 등을 위해 달러채권을 매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소로스를 비롯한 여러 헤지 펀더들은 든든한 강달러를 믿고 외환보유고는 부족하지만 버블이 생겨난 아시아 국가들의 환율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선공 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악몽의 1997년. 본격 IMF

경상수지의 적자가 급격하게 쌓여가다 97년 1월 한보철강이 6조 원의 빚을 지고 부도가 나버려 이후 삼미, 진로, 대농,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대우 등 차례로 부도 처리되었는데 그중 기아그룹은 10조 원의 부채로 금융권이 급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나중에 파산한 대우는 70조..

심각성을 파악. 최초 외환위기 가능성을 3월 한국은행 통화 운영 국제부장이 보고서를 올렸다. 영화 속 김혜수 역이다. 당연히 국정운영능력이 하락 중이어서 시간만 보냈다. 5월에 태국 시장은 급격한 환투기 세력의 공격에 투자자들은 자금을 달러로 바꿔 빠져나가고 비트화가 폭락했다. 일본 입장에선 가만히 보니 태국을 막지 못하면 동남아시아의 영향력이 날아갈 거 같고, 나머지 국가들도 연쇄적으로 공격당할 거 같아 아시아 통화기금을 새로 설립하려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IMF의 최대주주이자 실질적 권리자인 미 재무부와 당시 미국과 협력하던 새로운 거대시장 중국은 일본의 그러한 시도에 반대를 하게 되고 태국은 그해 8월 IMF를 맞이했다.

당시 강만수는 '여러분 꿈떡마쇼. 한국의 외환은 문제없습니다'를 발표 환투기 형님들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영화의 시작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시작도 이쯤부터 이다. 정의롭고 능력 있는 엘리트 관료 역 김혜수는 외환관리 문제를 발견했다면 왜 보고서만 줄줄 올리고 그 이전 변동환율제 전환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게 한국영화의 고질적 노현실, 노 팩트 단순 클리셔 문제라 생각한다. 거기에 대중들이 좋아하는 선과 악의 대결구도 선은 거대세력에 눌려 악을 이기지 못하는 뻔하고 단순한 영화들.. 영화 속 정의로운 엘리트 관료 역 김혜수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한다지만 결론적으론 '대안'이 될 수 없는 국가부도 선언 주장이었다.

외환위기 속에 김영삼 대통령의 큰 실책을 저지르는 게 경제수석을 교체한 것이다. 김인호 경제수석과 강경식 경제부총리에서 김영석 경제수석, 임창열 경제부총리로 교체하는데 나빠진 여론과 대선을 앞두고 책임 떠넘기기였다. 그리고 앞 두 사람은 이후 구속됐다. 컨트롤 타워가 공석이 되면서 아까운 시간만 낭비가 되었다. 이후 IMF와의 협상은 속전속결로 진행됐고 영화와 당연히 다르게 컨트롤타워의 공석 기간 이후 재경원은 대안을 검토하느라 IMF행을 미루었고 일본 재무성에 굽신굽신 돈 빌리러 갔다가 문전박대당하고 한국은행 총재 뜻대로 IMF행을 타게 되었다.

고난의 행군

97년 12월. OECD 가입 1년 만에 결국 우리나라도 IMF에 관리를 받게 되었다. 12월 실업률 3.1%는 다음 해 2월에 8.7%로 폭등하고 기업들은 3,300여 개가 넘게 폐업을 했다.

충분히 5년 이전부터 고쳐나갈 수 있는 시간과 부분들을 놓쳐버리고 IMF라는 고통 속에 자살공화국이던 시대가 되었고 IMF에서도 외환위기를 재정위기로 오판, 과도한 개혁 처방으로 필요 이상의 과도한 정책을 사용한 부분도 있었다. 자살률의 급증, 이혼과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결과론적이지만 사회인식 등 우리나라의 많은 부분이 체질 자체가 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IMF가 요구한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시중금리는 연 29.5% 까지 올렸고 이전의 부채 주도 성장은 사라지고 국제결제은행 제도를 도입하여 연결재무제표의 도입과 대출의 조건이 부채비율 200% 이내 자기 자본금 8% 충당비율로 만들어지고 당연시되던 어음결제 관행이 사라졌다. 이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기업의 빅딜과 금융시장의 개방에 일본 사채 사업이 국내에 진출하게 되었고 이후 카드 공화국이 탄생 각종 공기업들이 민영화와 함께 인원이 감축되면서 평생직장 중산층이 하루아침에 저소득층이 되는 세상으로 변했다.

외쳐라 눈물의 국뽕

그렇게 오늘내일하던 상황에 박정희의 의리남이자 신뢰의 부하 박태준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과의 채무연장을 이끌어내어 해외 대출의 연장을 받아내게 되면서 안정을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경제는 물론, SOC와 국방, 대중문화에도 큰 타격이 오고 이때 딴지일보 같은 아님 말고식 막장 저질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과도한 IMF처방을 우리나라가 최초로 단기간에 벗어났다. 나라가 망한 거 같은 분위기 속에 IMF 1년 만에 처음으로 상환을 시작했고 소로스 등 잔인한 해외 환투기인들 조차 한국인들 대다수가 줄 서서 금반지 등을 헐값에 팔던 예상치 못한 국민성에 깜짝 놀랐다.

다시 시작

그렇게 국민들 다수가 고통을 받은 뒤 99년도부터 국가 신용등급이 상승과 동시 수많은 알자 기업들이 해외로 팔려나가거나 통폐합되고 박세리와 박찬호 등 스포츠 영웅들이 해외서에 국위선양을 하는 등, 국뽕 버프를 받으며 00년 12월 국제통화기금의 차관을 상환하고 IMF 위기에 최초로 벗어났다. 이후 다음 해 8월 구제금융 차입금 전액을 상환하며 IMF 관리체제를 벗어났다. 

그리고 이틈 해 2002년 월드컵을 개최를 했다.

이렇게 아시아의 4마리용과 나머지 도마뱀들이 쓰러져가고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걸어가는 동안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국이 일어서게 되었고 최근까지 미국과 으르렁하는 사이가 되었다.

영화의 끝에는 가계부채 폭탄 때문에 또다시 경제위기론이 나오지만 현실은 가계부채 연체율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가계부채는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채무자의 건전한 상환능력이 핵심인데 현재는 DSR비율을 급 올려 버려 경제를 악화시키고 고용을 축소시키는 현상을 만들게 되었다. 선진국 어느냐라도 100% 자기 자산으로 시작하는 곳은 드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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