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H. 부시의 삶
조지 H.W. 부시
미국 41대 대통령의 풀네임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그의 장남 이름은 '조지 워커 부시'이다)이다. 아들이 George W. Bush로 불리기 때문에 아버지는 Bush Sr., Bush 41, 혹은 그냥 George Bush, 아니면 정식으로 George H.W. Bush로 불리기도 한다.
순박하며 약간 띨빵 한 '텍사스인'의 대명사와도 같은 인물 조지 W 부시와 달리 그의 아버지 조지 H.W. 부시는 메사추세츠 출신이다. 부시 가문은 동해안 지역의 성공한 사업가 집안이었고 1924년 태어난 조지는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하던 소년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운동으로 강인한 체력을 길렀는데 이것이 94세의 엄청난 장수를 누린 비결이 아닌가 싶다.
해군 입대
일본제국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부시도 해군에 입대하였다. 해군에서 그는 폭격기 조종 훈련을 받았고 실제 전투에도 참가하여 일본군에게 공습을 가하는 등, 전쟁영웅으로 불리기에 충분한 활약을 쌓았다. 일본군의 대공 포격을 받고 불시착했으나 숨어있다가 구출하러 온 미군에게 무사히 구조되는 등, 남다른 체력과 강운의 편린을 이미 보였다.
1945년 1월, 미국의 승리가 거의 확정적이 되자 부시도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는 일은 없어졌다. 여유가 생긴 그는 어릴 때부터 사귀었고 결혼을 약속한 high school sweetheart인 바바라 피어스와 결혼하였다. 2018년 4월에 바바라 부시 여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지와 바바라 부부는 무려 73년의 결혼생활을 유지했고 이것은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최장 결혼 기록이다.
예일대 재학 및 석유 사업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부시는 예일대학교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는 한편 야구부 주장으로 활동하였다. 188cm의 당당한 체격의 소유자였던 부시는 야구부에서는 1루수 주포로 활약했다. 1946년, 예일 재학 중에 그의 첫아들 조지 W 부시가 태어났다. (텍사스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지 W 부시의 출생지는 예일대가 위치한 코네티컷주이다)
경제학 학사 학위를 따고 졸업한 부시는 뜻한 바 있어 가족을 데리고 텍사스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텍사스에서 석유 산업에 투신하였다. 처음에는 석유 채굴에 필요한 장비를 팔다가 나중에는 석유 채굴에 직접 뛰어들었다. 당시 석유는 블루오션 시장인 데다가 그의 가문이 가진 인맥의 힘도 있어서 석유 산업은 순조롭게 성장하였고 부시는 1960년대에는 이미 한 재산 쌓아 올린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정계 진출
성공한 사업가에 전쟁 영웅이라는 탁월한 경력까지 갖춘 인물을 내버려 둘 리 없다. 공화당의 러브콜을 받은 부시는 1963년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였다. 하지만 첫 상원 선거에서 (아마도 그의 생애 최초의 실패가 될)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그 후, 부시는 소위 '컨트리클럽 공화당'으로 통하는 그만의 인맥 구축에 나섰다. 민주당이 흑인 민권 운동의 여파로 분열하고 있을 때, 부시는 골프를 통해 분열하고 있던 공화당원들에게 민주당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단결시켰다. 그리고 1966년 하원 선거에서 승리하며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그의 정치가 골프장 정치라는 야유를 받았지만 부시는 소신 있는 정치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는 보수적인 인물이었으나 흑인 민권 운동에 찬성했고 당시 미국의 징병제(draft)에 반대했다. 더구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놀랍게도 낙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즉, 그는 정치인으로서 일관되게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고, 연방 정부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국제무대에서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미국의 도덕적인 역할을 중요하게 여겨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 파병에 찬성하기도 했다.
뛰어난 재력과 소신이 있는 인물에게 사람이 몰리는 현상은 드물지 않다. 부시는 하원 선거에서 또다시 승리하면서 공화당의 중진으로 떠올랐고 닉슨 행정부는 부시의 두 번째 하원 임기가 다 하자 UN대사의 자리를 맡겼다. 이 경력은 하원 의원만 경험한 부시에게 상원 의원을 경험하지 않고도 국제무대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왔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발하고 닉슨의 정치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닉슨은 공화당 중앙위원회의 의장 자리를 부시에게 맡겼다. 그만큼 부시를 신임했다는 의미. 부시는 처음에는 닉슨을 변호했고, 닉슨이 사임하게 되자 공화당을 열심히 변호했다. 자신의 개인 인기 하락을 신경 쓰지 않고 소속 정당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통해 부시의 공화당 내에서의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닉슨의 뒤를 이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부시를 자신의 부통령으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런데 포드 대통령에게 조지 H.W. 부시를 부통령으로 삼지 않는 게 좋겠다고 건의한 포드의 비서실장이 바로 훗날 부시의 아들 밑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내게 되는 도널드 럼스펠드였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제럴드 포드는 1975년, 비서실장이던 럼스펠드를 자신의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럼스펠드 밑에서 일하던 비서관을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그 새로운 비서실장이 바로 딕 체니이다. 그리고 딕 체니는 조지 H.W. 부시 밑에서 국방부 장관을, 조지 W 부시 밑에서 부통령을 맡게 된다.
하지만 포드 대통령은 부시를 끝까지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결국 포드 대통령은 부시를 CIA 국장에 임명한다. 비록 실질적으로 CIA의 국장으로 일한 기간은 2년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경력을 쌓은 것은 부시의 큰 강점이 되었다. 1977년 민주당 출신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자 부시도 워싱턴 DC를 떠나 텍사스로 돌아갔다.
공화당 경선 도전
지미 카터는 빠르게 인기를 잃었고 (결국 그는 재선에 실패했다) 공화당에서는 카터의 연임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 당시 부시는 공직을 맡은 것은 아니었으나 닉슨과 포드 행정부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을 내세우며 큰 인기를 모았다. 그의 경쟁자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적수는 탁월한 웅변술을 갖춘 캘리포니아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부시는 공화당 경선에서 처음에는 우세를 보였지만 결국 레이건의 카리스마에 밀려 경선에서 낙선했다. 직함이 없는 상태에서 대선에서 실패한 부시도 이대로 은퇴가 예상되었으나 레이건은 부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목하며 부시 지지세력을 흡수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부통령은 대통령의 최후의 아군으로 분류되지만 레이건의 경우는 경선에서 경쟁하던 적수를 부통령으로 임명한 것이니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건은 부시를 신임했고 부시도 레이건을 충실히 보좌했다. 부시에게는 권력을 위한 이전투구는 벌이지 않는 미국 정계 중진다운 품위가 있었다.
사실 작은 정부, 기독교적 사상, 국제무대에서의 미국의 도덕적 책무 등, 많은 면에서 레이건과 부시는 이념적으로 공통점이 많았다. 80년대 미국의 경제 호황과 소련을 압도하는 강력한 군사력 덕분에 공화당의 인기는 치솟았고 자연스럽게 레이건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부시가 출마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그는 어렵지 않게 경선에서 승리했다. 부시는 댄 퀘일을 부통령으로 지목하고 1988년 대선에 임했다. 상대는 공교롭게도 부시의 고향인 메사추세츠의 주지사 마이클 두카키스였다.
41대 대통령 당선
이때 부시는 선거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긴다.
"내 말 똑똑히 들으세요. 새로운 세금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공화당 지지자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부시는 넉넉히 승리를 거두고 4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다만 부시의 낮은 세금 정책을 추진하기에는 미국 정부의 지출이 지나치게 많았다. 경제는 서서히 둔화되어 독일, 일본, 한국 같은 신흥 경쟁국들의 추격을 받았고 전쟁으로 인한 지출이 다시 늘어났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부시는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웨이트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기 위해 많은 군비를 지출했다. 미국 경제가 악화되면서 결국 민주당 빌 클린턴의 집권으로 이어지게 된다.
부시의 정책들 중 찬반양론이 심한 NAFTA 체결. 이것이 미국 내 실업률 증가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부시 시니어에게 쥐어터지고 아들 부시에게 당한 후세인과 미누엘 노리에가.
힘의 외교는 현실주의이기도 하다.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빽이 없는 나라는 아무리 허풍을 쳐도 오래가지 못한다. 북한 배후에는 중국이라도 있지만 파나마 주변에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강대국은 하나도 없었다.
대통령 임기 후의 삶
부시는 아들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정치에는 직접 나서지 않았다. 장수를 누린 만큼 부시는 레이건, 포드 등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거의 모든 후임 대통령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아들 젭 부시를 가혹하게 비판했던) 트럼프와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부통령 마이크 펜스와는 친한 관계를 가졌다.
부시의 건강은 91세 때, 집에서 넘어지면서 목뼈 골절의 중상을 입으면서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90대 영감님이 목뼈가 부러졌는데 살아남은 게 더 대단한데) 하반신이 마비된 부시 전 대통령은 부인 바바라 여사의 간호를 받았다.
2015년, 휴스턴에서 시구식에 참여한 부시 부부. 바바라 여사도 거동이 많이 불편한데 보행기에 (당시 대선 출마를 표명했던) 아들 젭 부시를 지지하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어머니의 마음은 어느 나라나 한결같은 것 같다.
그러나 바바라 부시 여사가 2018년 4월에 세상을 떠나고 나서 부시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부인의 죽음에 정신적인 충격이 컸을 것이다.
70대에 접어든 맏아들이 90대의 아버지를 간호하는 모습은 아들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부시 부자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사실까지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부시 가문은 암투가 많을 것 같은 상류층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가족 간의 정이 남달리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망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은 2018년 11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트럼프의 인기를 뒷받침하는 80년대 공화당에 대한 향수를 이루어낸 부시 시니어는 "낮은 세금, 강한 미국, 그리고 가정적인 공화당원"의 모습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앙일보는 부시 시니어가 내세운 '강한 미국'이 미화되는 것을 경계해서인지 몰라도 미국 내 듣보잡 좌파 언론을 인용하며 부시 시니어가 전쟁범죄자라는 과격한 주장을 소개하기도 하였으나 부시 정권 때의 미군은 베트남전의 교훈을 살려 최단시간에 단숨에 적을 제압하는 전술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도 미군은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행정부와 펜타곤의 호흡이 잘 맞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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