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다부동 전투
한국 전쟁 다부동 전투
우리 국군은 7월 25일까지 하동, 거창, 김천, 함안, 안동 등에서 적을 저지했으나 병력도 부족하고 후퇴하면서 방어 진지를 구축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공간을 내주며 시간을 벌었다. 시간을 벌어야 부산항으로 병사와 무기 그리고 군수물자를 보충할 수 있었다. 당시 분위기를 알려주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50년 8월, 다부동 전장에서 병사들끼리 나누던 이야기다.
"맥아더는 막아라 막아라!! 며 야단이고 워커는 웍웍! 소리만 지르며 화를 내고 딘은 대전에서 띵~하고 갔다."
참 해학이 넘치는 이야기다.
그러면 당시 8군 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에 대해 잠시 알아보겠다.
워커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시 조지 패튼의 제3군 예하 20 군단장으로 ‘워커 불독’(Walker Bulldog) 이란 별명을 가진 용감하고 적극적인 전술가였다. 그는 '닥공' 작전의 권위자로 명성이 높았고 한국전에서도 이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지금은 무지하게 나이스 해진 광진구 광장동의 워커힐(Walker Hill)이다. 워커 장군을 기려 '워커 힐'이라는 이름이 붙였다. 1963년, 주한미군의 휴양시설과 국립호텔용으로 지어진 곳인데 나중에 선경 개발 (현 SK그룹)에서 인수해 '쉐라톤 워커힐 호텔'로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워커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 최신형 탱크인 M-41에도 '워커 불독' 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리고, '캠프 워커'라고 미군부대 하나 있는데 물론 여기도의 워커도 워커 장군을 기념하는 것이다.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도봉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한국전에 참전한 아들 샘 워커 대위의 은성 무공훈장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트럭과 충돌... 향년 61세) 아무튼 워커 중장은 7월 26일 전선을 정리하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 명령을 내린다.
낙동강 방어선이다. 미 25사단, 미 2사단, 영국 27사단, 미 1 기병사단이 낙동강 세로축을 맡고 국군 1사단, 6사단, 8 사단, 수도사단, 3사단이 낙동강 가로축을 맡았다. 짤 윗부분 회색 계란 무늬로 마크된 지역이 바로 오늘 이야기하게 될 다부동 전투의 현장이다. 낙동강 방어선을 '워커 라인'이라고도 부르는데, 7월 29일 워커 중장이 "Last Ditch Stand" (최종 방어선 사수) 명령을 내리며 이 라인을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Ditch는 대충 '도랑' 혹은 '참호' 란 뜻이다. 중세 유럽 시절 난공불락의 요새를 공격할 때 성 주변에 참호 용도의 도랑을 겹겹이 파 놓고 한 단계씩 진군했다.
한 단계씩 전진해 성벽에 매달려 침투하면 좋은데, 성 안에서 돌을 던지고 화살 쏴서 저항하면 실패할 수도 있고 그러면 다시 도랑으로 도망가는 거다. 성 안에서 밖으로 더 맹공을 퍼부으면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한 단계씩 뒤로 후퇴하고, 그때 마지막 파놓은 도랑에서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이야기다. (참고로 중간쯤에 점선으로 있는 데이비드슨선은 마산 - 밀양 - 울산을 가로지르는 2차 방어선인데 유사시 이 라인 아래로 후퇴하고 우리 정부를 제주도나 일본으로 옮길 후속 플랜을 만들어 놨다고 한다)
7월 27일 맥아더 장군은 대구에 급조된 미 8군 사령부를 방문하고 이 말을 남긴다.
"더 이상의 철수는 없다!"
그의 머릿속에선 인천 상륙작전이라는 바이패스 공격 플랜도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대구는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고 (7.16부터 8.18까지 대구였고, 이후 부산으로 옮겼다.) 미 8군 사령부도 여기 있는지라 모든 면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따라서 북한군의 목표는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이 목표였으나 저항에 부딪혀 대구로 수정하게 된다) 한편, 낙동강 방어선에서 우리 국군의 병력과 보급 상황은 나아졌다. 8월 초 적과 아군의 전투력을 비교할 때 아군이 다소 우세할 정도였다. 지난 30일간 공간을 내어준 대가로 소중한 시간을 벌었지. 북한군은 병력 보충과 보급이 어려워 한계점에 이르고 있었고 우리는 미군의 항공 전력으로 북한의 보급 라인을 괴롭히고 부산항을 통해 부지런히 병력과 군수품을 보충했다.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부대 배치를 보여주는 그림인데 아래 보기 더 쉽게 정리했다.
사진 왼쪽, 즉 낙동강 서쪽은 다 북한인 거다. 낙동강 좌측의 지금 구미 1 공단 자리는 그야말로 북한군 본진이었고, 북쪽인 해평 쪽도 다 빼앗겨 버린 상황이었다. 특히 구미, 의성 등 북한에 점령당한 지역 사람들은 1950년 7월부터 9월에 이르는 북한 강점기에 부역이나 의용군으로 차출되는 등 잠시 북한 인민 생활을 했던 흑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북한군의 목적은 이 라인을 뚫고 대구를 접수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북한군은 5개 사단을 낙동강 방어선에 몰빵 한다. 북한군 1군단의 10사단, 3사단, 그리고 2군단 15사단, 13사단, 1사단 들이다.
이에 맞서 우리는, 좌측 세로축선에 미 제1 기병사단 (사단장 호버트 게이, Hobart Gay) 가로축선 가운데에 국군 제1사단 (사단장 백선엽) 가로축선 우측에 국군 제6사단을 배치한다.(사단장 김종오)
미 제1 기병사단 (1st Cavalry Division)은 미국 육군의 탄생과 동시에 창설된 전통 있는 부대인데 옛날엔 카우보이 모자 쓰고 다니는 기마 기병대였다. 2차 대전 때 보병사단으로 바뀌었음에도 그놈의 전통이 워낙 자랑스러워 여전히 기병사단이라는 호칭을 쓴다. 미국이 전쟁 발발 국가에 첫 번째로 투입하는 상징적인 부대이다. (베트남전에도 가장 먼저 파병됐다) 후일 얘들도 북한군의 공세에 피해가 막심했지만 구미에서 왜관에 이르는 낙동강 쪽 세로축 방어 라인을 잘 커버한다.
국군 제1사단도 낙동강 방어선 안에서 전투력을 간신히 갖춘다. 개인화기도 일본제 구구식 소총에서 칼빈이나 M1 소총으로 바꾸고 최신형 대전차 무기인 3.5인치 슈퍼 바주카포와 57미리 무반동총도 보급받았다. 그리고, 11 연대, 12 연대, 13 연대의 편제가 만들어졌다. (13 연대는 나중에 15 연대로 부대명칭이 바뀐다) 사실 우리나라 군인 이래 봐야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출신인데 전국 각 도별로 연대를 창설해 장병들이 자기 출신 연대에 대한 애착심이 컸다. 때문에 부대 재편성을 하며 '문화 컬처'의 차이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국군 제1사단에 보급된 3.5인치 슈퍼 바주카포를 살펴보자.
미국에서 급파된 3.5인치 M20 슈퍼 바주카포는 T-34 탱크 킬러였다. 기존의 2.36인치 바주카포로 북한군의 T-34를 파괴하기 어렵자 미국에서 개발이 막 완료된 신제품을 한국으로 급파했다. 성능이 강화된 3.5인치 M20 슈퍼 바주카포가 우리 군에 보급되면서 T-34 탱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한편 국군 제1사단과 더불어 다부동 전투에 참여한 국군 제6사단은 6.25 발발 시 춘천 일대에서 T-34 전차로 무장한 북한군 제2사단을 저지해 공격 계획에 차질을 준 부대이다. 개전 초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건재한 부대였다. 다부동 북동쪽을 맡았다.
저 콧수염 인상이 서글서글한 최영희 연대장은 나중에 국방부 장관이 되고, 전역 후 정치에 진출해 3선 의원이 된다.
다부동은 어떤 곳인가?
다부동은, 일단 6.25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평생 모르고 지냈을 그런 조용한 산골 마을이다. 당시 논농사 밭농사로 근근이 살던 마을 사람들이 워낙 궁핍해 잘 살게 해달라고 다부동(多富洞)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조용했던 30여 호의 산촌 마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부동 주변의 지형을 살펴보자. 좌측 正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흘러 육로를 차단하고, 좌측 북서쪽으로 유학산 (839m), 우측 동쪽으로 가산 (902m), 이 두 개가 병풍처럼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게다가 대구까지 탱크가 진출할 수 있는 주도로를 끼고 있다. 여기가 뚫리면 남쪽의 도덕산(660m)까지 철수해야 하니 대구가 완전히 지상 포격 사정권에 들어간다. 다부동 유학산에서 대구까지 직선거리는 불과 25Km라서 유학산을 점령당해도 대구는 포격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다부동이 뚫렸을 때 추가적인 함정은 지금의 북대구쪽이 세로 계곡으로 파인 지형이라는 것이다. 아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파란색 화살표를 넣었다. 북한군 동무 어서오세요~ 하면서 반갑게 맞아주는 지형이다. 여기엔 유학산처럼 가로 방향으로 막아 세우는 지형지물이 없어서 방어가 더욱더 불리해지고 적군은 일사천리로 진격할 수 있다.
다부동 근처의 지형을 확대해보자. 우뚝 솟은 바위산인 유학산은 가로로 쭉 뻗어 천혜의 방패가 되어주고 남쪽 아랫 공간은 방어 진지를 만들기에 유리하다. 따라서 이러한 지형의 이점을 활용한 주저항선에서 우리 국군과 급히 파병된 미군은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한국전쟁사 중 가장 중요하고 처절한 전투를 치른다.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낙동강, 왜관, 다부동 인근에 산재한 70여 개의 고지에서 약 2개월간 치열하게 진행된 이 전투에 참전한 군인은 아군 약 15,000명, 적군 약 30,000명이다. 사망자는 약 34,000명으로 집계되며 참전 군인 중 약 75%가 전사했다. 투입과 전사 결과가 제대로 집계되지 않은 무명용사들의 희생까지 모두 집계하면 실제 사망률은 이보다 더 높았을 것이라 본다. 결국 다부동 전투는 참전 사망률 약 8할의 무시무시한 전투였다.
다부동 전투는 크게 아래 4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 8.1-8.12 낙동강을 도하한 이후 주저항선까지의 지연전 (국군 1사단)
2단계: 8.13-8.30 주저항선에서의 공방전 (국군 1사단)
3단계: 8.31-9.15 전투 지대 재조정 및 주저항선에서의 철수 (미 1 기병사단)
4단계: 9.16-9.24 반격을 위한 적 방어선 돌파 (한미 연합)
8월 3일, 미 기병 1사단은 김천에서 왜관으로 퇴각하면서 북한군이 낙동강을 넘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왜관철교를 폭파시킨다.
그리고 낙동강 동쪽 라인에 진지를 구축한 뒤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한다.
당시 낙동강 상황이다. 강 건너 구미 쪽에선 피난민들이 건너오지 못해 발버둥 치는 상황이다. 뒤에선 북한군이 밀고 들어오고 있고 용감한 피난민은 강을 건너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못 넘어왔다. 피난민 입장에서 얼마나 급했냐면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둘이서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 채 목숨을 걸고 함께 강을 건너온 케이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북한군은 피난민으로 위장해서 무기를 소지하고 침투해 게릴라 전술로 아군을 괴롭힌다.
피난민으로 위장한 게릴라에게 극딜 당한 아군의 대책이다. 목숨을 걸고 낙동강을 건너온 사람들은 헌병의 검문검색을 받은 뒤 통과되었다.
낙동강 건너 구미 쪽의 북한군과 인동 쪽의 국군은 이렇게 마주 보며 대치상황에 있었고,
낙동강 남쪽 방어선을 담당하던 미 제1 기병사단도 왜관 쪽에서 북한군의 도하 침투를 막는데 주력했다.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도 못 가고 저기도 못 가는 외톨이 신세를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한다. 이 말이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나왔다.
8월 4일, 의성 낙정리 쪽으로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는 적에게 우리 국군은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때마침 지원 사격 나온 아군기 F-80 2대에게 예광탄을 쏘아 적의 위치를 알려주니 전투기는 알았다는 듯 날개를 흔들고 네이팜탄을 퍼부어 적의 공격대기 지점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때 12 연대 11중 대장 강영걸 대위가 도하를 시도하던 적들이 강물에 쓰러지는 모양을 바라보다 큰 소리로 외친다.
"야 낙동강에 오리알 떨어진다!"
이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모두 같이 외쳤다.
"이야 낙동강에 오리알 떨어진다!!"
지원 사격에 적이 오도 가도 못하고 강에서 나자빠지니 얼마나 고소했을까. 아무튼 그때 우렁찬 함성과 함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지만 8월 7일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끝없는 급속 도하 저지를 막지 못한다.
결국 8월 8일, 북한군은 T-34 탱크 9대를 앞세워 2개 대대의 도하를 성공시키고 석적읍 포남리의 낙동강변에 위치한 369 고지를 점령한다. 369 고지는 인근 328 고지와 함께 오른쪽의 숲데미산(수암산) - 유학산 - 백운산으로 연결된 고지 전선의 서쪽 끝이라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유학산을 포함한 다부동 인근 고지가 모두 그렇지만 369 고지도 바위 투성이인 돌산이라 참호를 팔 수 없었다. 적이건 아군이건 상대의 포탄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 때문에 서로의 피해가 무지막지했고 특히 북한군은 겁을 먹고 낙동강으로 퇴각하는 자기네 병사를 향해 직사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이후 우리 군이 369 고지를 점령해보니 사망한 북한군 기관총 사수의 손이 방아쇠 손잡이에 철사로 묶여 있었다고 한다. 우리 선임병들도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잔혹함이었다고 한다. 나중엔 두 발을 칡뿌리로 묶어놓은 기관총 사수도 발견하게 되는데 이건 사수가 두려움에 도망가지 못하게, 그냥 쏘다 죽게 만든 거라고 한다.
이념과 노선의 목적 쟁취를 위해서라면 사람이 죽고 피 흘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종교보다 더한 믿음을 강요하고 선동하며 개인의 피와 죽음을 요구하는 그 사상, 북한군의 비인간적인 전법은 모두 소련군에게서 배워온 것이며 한국식으로 더 지독하게 변해 6.25 전쟁에서 나타났다.
이것 말고도 더 잔인한 전술이 많은데, 차차 설명한다.
하루는 국군이 낙동강변에서 북한군과 교전을 마치고 그들을 퇴각시킨 뒤 혼자 울고 있는 북한군 병사를 목격했다. 17-18세 정도의 소년병이 양 무릎에 관통상을 입고 있는 상황, 무장도 안된 버려진 병사라 안쓰러워 지혈을 해주니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야기를 해주는 거다.
"부모님이 해방 직후 월남하고 혼자 이북에 남아있었는데 갑자기 징병되어 15사단에 보충되어 끌려왔습니다"
사실 이런 케이스가 워낙 흔했던 시절이었다. 북한군도 보충병이 부족하자 16세 이상의 소년병을 마구 데리고 오던 시절이다. 그런데 조금 전 자기네 소대장이 퇴각하면서
"이 새끼는 성분이 나쁜 놈이니 현지에서 이탈할 것이다" 라며 양 무릎을 모아 놓게 하고 총을 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 소대원들은 그들의 비인간적인 병사 관리에 깊은 분노를 느끼고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이 와중에 8월 9일, 11 연대 1대대에선 주먹밥 수류탄으로 적을 제압하는 전설이 등장한다. 구미 해평 지역에서 취사병 2명이 노무자 8명을 인솔해 아침밥을 추진하던 중 논바닥에 엎드린 북한군을 목격한 거다. 노무자 1명이 엉겁결에 김으로 말은 주먹밥을 들고 "손들엇!" 하고 소리치니 5-6명이 동시에 손을 들고 투항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쌀 수류탄의 파괴력에 취해버린 취사병과 노무자들은 북한군이 발견되는 즉시 같은 방법으로 적을 사로잡는다. 중대에 도착하니 사로잡은 전체 포로가 40여 명이었다고 한다. 전투에 패한 무기력한 낙오병과 주먹밥 수류탄만으로도 용기백배한 취사병과 노무자의 정신력 차이였던 것이다.
한편, 8월 11일, 11 연대 수색대대는 가산 근처의 적진 깊숙이 침투했다. 수색대는 주로 밤에 활동을 하는지라 주인 없는 민가에 숨어들어 보초를 세워놓고 잠을 청했다. 망을 보는 보초에겐 위급상황 시 총을 한 발 쏘라고 이야기해 놓고, 그런데 총소리가 울려 퍼지는 거다. 잠에서 깨 다급해진 대원들은 마루 밑에 숨고, 옆집으로 피신하고, 곧이어 북한군은 생포된 보초를 앞세워 민가로 들어온다. 그리곤 온 집안을 뒤진 뒤 아무도 없자 대원들이 숨은 곳을 말하라며 보초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 협박을 했다. 마루 밑에 숨은 대원들의 이마엔 진땀이 흘렀다. 하지만 보초는 능청스럽게 아무도 없는 안방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친다.
"대장님예~ 인민군이 나오라 캅니더!"
그리곤 어떤 반응도 없자 마루 근처로 다가와 숨어있는 소색 대원들의 간을 철렁하게 만든 뒤
"없는 모양입니더~"
라고 매우 투박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 보초는 북한군에게 맞은 뒤 밖으로 끌려나가고 (이후 생사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수색대장 이하 12명의 대원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전원 무사히 원대복귀에 성공한다. 그 대원의 기지와 '의리'가 12명의 대원을 살렸다.
아무튼 우리의 방어선이던 낙동강 라인이 뚫리면서 위에서 언급한 포남리 369 고지를 비롯한 우리의 방어 진지는 하나씩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몰려오는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며 서서히 주저항선으로 설정된 다부동 인근으로 후퇴한다.
다부동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바로 유학산 일대였다. 북한군이 이 고지를 장악하면 대구를 공격하는 발판이 되는지라 다부동 결전장의 승패를 가늠하는 요지 중의 요지였다. 유학산의 북쪽면은 경사가 완만해 정상에 오르기 쉽고 남쪽면은 매우 가파르고 50m 높이의 암벽이 펼쳐져 등산조차도 어려운 구조다. 정상을 한 번 뺏기면 탈환하기 정말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를 주는 셈 었다.
국군은 주저항선인 다부동으로 후퇴하면서 1사단 15 연대는 포남리 328 고지에 배치하고 12 연대는 수암산과 유학산 주봉인 839 고지에 배치시키는 데 어이없게도 12 연대 1대대가 부대 재배치를 위해 고지를 비우고 잠시 사령부로 내려온 사이 837 고지와 674 고지를 북한군이 찜한다. 이 때문에 국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고지마다 주인이 10번 이상 바뀌던 게 당시 상황이었는데, 한 번 뺏기고 다시 탈환할 때마다 엄청난 희생이 요구됐다.
이 유학산에서 8월 13일 - 17일까지 매일 평균 600명이 전사한다. 백병전이 최고조에 이른 8월 18일 - 22일 사이엔 매일 800명 전사했다. 수암산 - 유학산 라인을 목표로 공격 중인 12 연대의 손실이 가장 심했고 나중엔 행정병도 모두 올려 보내게 되어 행정의 기본인 일보 작성도 못했다. 전사자 명단과 병력수도 파악 안 되는 상황에서 전투를 치른 거다. 때문에 다부동 전투에서는 수많은 무명용사가 발생했다.
무명용사는 대부분이 경상도 출신 장정들로 자원입대한 학도병, 징집된 18세 이상의 학도병과 14-17세의 어린 소년병, 그리고 마을이나 피난촌에서 징집된 젊은 장정들이었고,
이들은 1주일 미만의 기초훈련을 받고 다부동 전투에 보충병으로 투입됐다. 정작 실전에서는 M1 소총의 실탄 장전도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한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나면 스킬이 늘고, 이들은 우직스러울 만큼 명령에 절대복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건 죽음의 고지전이었다.
당시 육군본부는 모든 보급을 1사단 요구에 우선해 지원했으나 수류탄 투척 위주의 근접전이 워낙 치열하여 수류탄만큼은 늘 부족했다고 한다. 당시 신병으로 투입된 무명용사들의 전투 패턴을 보면, 통상 자정쯤의 어두운 밤에 보충병이 산으로 올라오면 중대장이 병력을 정렬시키고 손전등으로 중대장 자신의 얼굴을 비추며 자기소개, 그다음 소대장을 각 소대 앞에 서게 하고 소대장도 자신의 얼굴을 보여줌, 소대장은 "중졸 이상 나오세요" - 해서 분대장 임명, 나머지에겐 분대 번호 부여. 여기까지가 현장에서의 부대 재편성이고, 이후 중대장은 적 상황과 아군 현황, 그리고 부상 발생 시 구호소 위치를 알려준다. 1개 소대씩 일렬횡대로 적 진지를 향해 산개시켜 전투를 준비한다. 만일 전투가 시작되면 적을 향해 M1 소총 실탄 8발을 사격하고 수류탄 2-3발을 던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M1 소총 실탄 한 클립을 다 쏘고 실탄 장전을 할 줄 몰라 소대장이나 분대장을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전투 방법 지시가 완료되면 각자 화랑 담배 껍질에 소대원 명단을 기입하고 간직한다. (하지만 이 소대원 명단은
하루 전투가 끝나면 땀에 젖어 너덜너덜해져 그냥 버려졌다) 이후 분대 단위로 서로 통성명을 마치면 새벽 3시가 지나고
시신 썩는 악취와 모기떼에 잠 못 이루고 새벽이 밝아오면 전투 시작. 그러면 지난밤에 보충된 신병의 90%가 희생된다.
이것이 죽음의 행진인 것이다. 고지로 돌진하면 적이 박격포와 수류탄으로 공격해 전멸, 또 다른 분대 투입, 또 전멸, 다음날 자정에 새로운 신병을 다시 보충받고 이런 패턴이 무한루프처럼 반복된다.
특히 북한군이 점령했던 유학산 837 고지에서는 이런 패턴으로 매일 수백 명의 신병이 보충되고 그대로 죽어나갔다. 어이없게 뺏겨버린 837 고지를 되찾기 위해 8월 16일부터 고지 탈환 작전을 시작했는데 바위를 기어 고지로 올라가다 적진 50m 거리에 도달하면 바위 위에서 수류탄을 던지는 북한군의 공격에 공격할 틈도 없이 바로 전사했던 거다. 투입된 분대가 궤멸당하면 또 다른 분대 투입, 어떠한 수단도 전법도 없었다. 이런 결과가 10회나 되풀이되면 근접로에는 시신이 수북하게 쌓이고, 나중엔 화나서 중대본부요원이 모두 올라가 적의 수류탄 투척을 무시하고 돌진, 그래 봐야 적의 수류탄 투척에 또 전멸되고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고지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어느 대대 작전장교가 보충된 신병 중에서 충북 영동에서 온 고향 마을 중학생 2명을 우연히 만났다. 반가워하고 손을 흔들며 전송했으나 그다음 날 모두 전사자 명단에 있는 거다. 국군은 피해가 너무 커지니 안 되겠다 싶어 장교로 구성된 정찰대를 편성해서 고지 근처로 올려 보냈는데 837 고지 정상을 지키던 북한군들의 대화를 듣게 됐다
"서울은 내놓을 망정 유학산은 어림도 없다"
그만큼 유학산은 북한군에게 중요한 거점이었다.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지 못해 유학산으로 자기 위안 중였던 거다.
은밀하게 정찰을 마친 대원들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837 고지로 지원 포격을 요청하고 결국 8월 20일 아군의 지원 포격이 시작되나 당시 포병 사격지휘가 보족해 실패했다. 대충 눈대중으로 끼릭끼릭 조정해 다시 포격했으나 실패했다. 정확한 사격지휘 없인 돌산 정상에 명중시키기 어려웠다. 결국 남는 신병과 기존 병력 일부를 차출해 150명 수준의 결사대를 편성했다. 이번엔 경사면이 가파른 837 고지로 직접 접근하지 않고 우회해서 조용히 790 고지를 탈취한 뒤 837 고지로 측면 접근을 시도했는데 북한군은 그동안 고지 아래로 수류탄 떨어뜨리며 큰 힘 안 들이며 재미를 보던 중이라 측면 공격에 대한 대비가 없어 우리의 우회 공격에 속수무책 당했다. 국군은 여세를 몰아붙여 837 고지는 물론, 서쪽의 820 고지까지 모두 탈환하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곧바로 반격이 들어와 고지를 한 번 더 뺏긴 뒤 8월 23일에야 837 고지를 완전히 접수하게 된다.
무명용사 학도병 이야기가 나왔으니 노무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이 진짜 숨은 공로자였다고 생각한다. 고지로 올라가는 보급품은 전량 노무대에 의해 운반됐다. 노무대는 인근 마을이나 피난민 수용소에서 동원된 40-50대 장정들로 구성되었고 무보수로 헌신했다. 식사(주먹밥), 탄약, 기타 보급품을 고지 최전방 전선까지 지게로 운반하고 되돌아갈 땐 부상병 후송도 도맡아 했다. 이분들도 적의 사격과 포화에 많이 희생되었고 무거운 등짐을 지고 다녀 일선 병사보다 육체적인 고통도 많았다. 다부동 전투의 절반은 노무자가 치렀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이들의 기여가 컸다고 한다.
하얀 저고리를 입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 농촌 출신의 노무자들은 젊은 애들이 피를 흘리는데 가만있지 않겠다며 엄청난 무게의 보급품을 등에 지고 산비탈을 헤쳐 일선 중대까지 보급품을 지어 날랐다. 이들 대부분은 총탄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죽거나 살거나 모두 팔자소관이라며 각자 일에만 열중했다. 연륜이 있는지라 상대적으로 죽음을 초월한 헌신을 보여줬다. 어떤 노무자가 보급품 추진 중 총에 맞아 쓰러지면 그 짐을 다른 노무자가 자기 짐에 얹어 올라가고, 산에서 애들이 굶는다며 걱정하며 '의리' 하나로 등짐을 진 노무자들, 미군들은 이들의 지게 모양을 보고 'A 특공대' 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인내와 헌신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중학생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참전해 사망한 어린 소년병들.
불타는 애국심에 자원입대해 사망한 젊은이들.
울부짖는 가족을 뒤로하고 징집되어 사망한 청년들.
아이들이 굶는다며 걱정하며 무거운 등짐을 짊어졌던 노무자들.
이런 분들이 진짜 애국하고 돌아가신 거다. 어쩌면 이걸 읽는 사람들 가족이나 친척 중에 위와 같은 케이스의 희생자가 한 명쯤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음을 감사드리고 꽃다운 나이에 먼저 가신 그분들의 넋을 경건한 마음으로 기리자.
북한군은 소련군의 막무가내 전법을 그대로 배워와서 전법이 비인간적이기도 하고 유연하지도 못했다. 독전대라고 말 그대로 전투를 독려하는 전법인데, 말이 좋아 독려지, 이들은 아군 뒤에서 총을 겨누며 후퇴할 경우 무자비하게 발포했다. 같은 방향으로 병력을 몰아놓고 1개 팀 투입, 사살되면 또 투입, 이런 식이 었다. 지휘관이 공명심과 상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몰아붙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유연하게 대처하면 문책과 비판의 대상이 되니 자기 부하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게 신상 보전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다부동 전투에서 남북한 전역에서 징집해 온 어린 의용군들에게 술을 먹여 얼큰하게 취하게 한 뒤 소총 없이 수류탄 2발만 쥐어주고 '만세'를 부르며 앞으로 돌격하라고 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만세를 부르며 돌격하고 수류탄 두 발을 투척하고 목숨을 잃는 북한군에게선 심한 술냄새가 났다는 증언이 부지기수다. 백병전을 할 때도 술냄새가 펄펄 났다고 한다. 술에 취해서 두려움도 없겠다. 게다가 뒤에서 따발총으로 무장한 독전대가 자기편 배후에서 총을 겨누고 몰아세우니 그저 앞으로 달려가 수류탄 두 발을 던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8월 13일부터 24일까지 석적읍 포남리의 328 고지에선 국군 1사단 15 연대와 북한군 3사단간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치열한 지원 포격을 해댔고 아군의 공군 지원 전투기는 네이팜탄을 쏟아붓고 10여 일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고지 탈환에 성공한 전투다. 이곳은 왜관 북쪽 5Km 지점의 나지막한 바위산인데 땅을 파봐야 흙은 고작 20Cm 밖에 안됐다. 즉, 돌산이라 참호도 파기 어려웠고 시신도 가매장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매일 시신 더미를 방패 삼아 싸우고 포탄이 터질 때마다 부서지는 사체의 잔해가 나뒹굴었고 얼굴에 진물을 맞아가며 전투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네이팜탄의 화염에 탄 시신이 즐비했고 나뭇가지마다 분해된 창자와 팔다리가 너절하게 걸려있었다. 주검마다 커다란 쇠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고 부패가 시작된 시신엔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참상이었다고 한다. 치열한 공방전이 끝난 뒤엔 병사의 몸과 전투복엔 사체에서 튀겨져 나온 피와 살점 범벅이고 바로 옆에선 배가 찢어져 창자가 튀어나와 울부짖는 부상자나 팔다리가 절단되어 고통에 흐느끼는 부상자 투성이고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로 후각은 마비되는데 37도를 넘긴 불볕더위와 이글거리는 열기에 시신의 배가 풍선같이 부풀어 오르다가 펑! 하고 터지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적의 포탄이 날아와 터지면 그 시신으로 진지를 보강해 야간 전투에 대비하고, 진지 벽으로 포개어 쌓아 놓은 시신은 부풀어 오르고 진물이 흘러나와 무너지고, 다시 포개 놓으면 다시 또 미끄러져 형태가 무너지고,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니 노무자들이 주먹밥을 가져오면 조금 전까지 시신에 있던 파리가 밥에 까맣게 달라붙어도 그 파리를 치우며 밥을 먹고 힘을 내야만 했다.
당시 병사들은 엄지손톱만 한 그 파리가 얼마나 지겨웠던지 가끔은 포탄이 떨어지면 시신이 터져 살점과 구더기가 온몸에 튀겨 들러붙어도 파리떼가 없어져서 홀가분하게 느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뒤 마을로 복귀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328 고지엔 어림잡아 3000여 구의 시신이 있었는데 개인 호마다 5-6구씩, 골짜기마다 30-40구씩 겹겹이 쌓여있었는데 시신 썩는 냄새로 견딜 수가 없어 치우러 올라갔지만 너무나 많아 그 위에 흙을 덮어주는 정도로 정리했다고 한다.
8월 13일, 북한군은 T-34 탱크를 앞세우고 신주막으로 진출해 유학산 837 고지를 무혈 점령한다. 탱크는 다부동 북쪽 2Km인 진목정까지 돌진해 정지하고 진목정 위쪽 우악산 647 고지도 점령한다. 이쪽 길로 밀고 들어와 다부동만 통과하면 대구로 향하는 길이니 우리 군은 절박한 위기 상황에 처한 거다. 12 연대 1대대가 현장에 급파되어 다부동 사수를 맡게 된다.
8월 15일, 광복 제5주년 기념일이다. 김일성이 대구를 점령하라고 지시한 이날 새벽부터 적은 총공세에 돌입하고 하루 종일도 부족해 다음날까지 밤새도록 피 튀기는 육탄전을 벌인다. 다부동 주저항선이 뚫릴 위기가 계속되고 점점 사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다가와 우리 국군은 대구 미 8군 사령부에 증파 요청을 하게 된다.
이에 8월 17일, 위기에 처한 다부동을 구하기 위해 미 제27 연대가 M-26 탱크를 몰고 올라와 1사단을 돕게 된다.(곧이어 미 제23 연대도 올라와 합류한다) 105mm 곡사포 18문의 화력도 추가시키고 F-51 전투기도 다부동 지역으로 급파한다. 국군 1개 사단 방어지역에 미군 2개 연대를 증파한 사례는 한국전쟁 중 이때가 유일해 그만큼 다부동의 전황이 위태로웠고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그날 밤, 미군의 투입을 몰랐던 북한군은 T-34 탱크 5대를 앞세워 공격을 시도하는데, 우리의 3.5인치 바주카포로 공격으로 선두 탱크 1대가 파괴되며 퇴각한다. 북한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을 감행하지만 한미 연합작전 신공으로 실패한다. 만일 타이밍 적절하게 증원된 미군의 화력이 없었다면 T-34 탱크를 앞세워 총공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방어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승리의 신은 우리에게 미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날인 8월 17일, 국군 7 연대를 극딜 하던 북한군 1사단 14 연대가 가산산성을 점령한다. 그리곤 가산산성 고지에서 대구를 향해 82mm 박격포탄 7발을 발사한다. 날아간 포탄은 대구역에 쾅쾅쾅! 떨어지고 결과는 역무원 1명 순직, 민간인 7병 부상을 당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정부를 부산으로 옮기는 날이었다. 이 때문에 대구에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민심은 동요했다. 하지만 내무부, 육본, 그리고 미 8군 사령부 가 대구에 계속 남아 민심수습과 치안을 유지했다. 8월 19-20일에도 14발의 박격포탄을 대구시내로 떨어뜨렸으나 실패했다. 포탄이 애먼데 떨어져서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한편 낙동강 쪽에서도 북한군의 포격 계속되자 8월 16일 B-29 폭격기 98대를 동원해서 북한군의 본진인 구미 쪽에 (지금의 구미 1 공단 지역과 그 아래쪽) 26분간 포탄 960톤을 투하했다.
당시 투하된 폭탄의 흔적이다. B-29 폭격기 98대에 폭탄이 960톤이다. 이후 한동안 국군 1사단 및 미 1 기병사단을 향한 북한군의 포격은 현저하게 감소했다. 이 폭격은 낙동강변에 주둔하던 북한군의 2개 사단과 포병, 공병, 전차부대를 점멸시키고 사실상 북한군은 이때부터 희망을 잃기 시작한다. 하지만 피해 상황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원래부터 빨간 쪽 애들이 선동과 정보 왜곡에 얼마나 강한지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모두 함구했다고 한다.
다시 다부동으로 돌아와서,
지난 8월 17일, T-34를 앞세운 공격에 실패한 북한군은 8월 18일부터 20일까지 다부동 지역의 한미연합군을 공격하며 대구 점령을 위해 21대나 보충받은 T-34 탱크의 몸을 풀며 대규모 공세를 준비한다. (21대는 북한군 전선 부대가 한 번에 받은 최대의 보급량이다)
이에 아군은 대전차 지뢰를 묻어 탱크 공격에 대비하고,
탱크를 배치시키고
한미 연합작전을 구상하며 다부동 방어 라인 사수 결의를 다진다.
8월 21일 밤, 한국전쟁 개전 후 최초의 '탱크 대 탱크' 전이자 최초의 한미연 합작 전이 개시된다. 우리 11 연대가 증파된 미 27 연대와 합동 작전을 수행한다. 북한군은 대구 진격을 작심한 듯 T-34 탱크 7대와 SU-76 자주포 3문으로 사격을 퍼부으며 돌격했다. 하지만 아군에게는 M-26 퍼싱 탱크가 있었다. M-26 퍼싱 탱크는 약 200m 거리에서 포사격으로 T-34 탱크를 명중시켜 파괴시키고 3.5인치 슈퍼 바주카포 단 한방으로 SU-76 자주포를 파괴시킨다. 선두조가 당하자 후속 탱크와 자주포는 무차별 포격을 가하고 좁은 골짜기에서 M-26 탱크 대 T-34 탱크의 피할 수 없는 전면전이 펼쳐진 거다. 쌍방의 탱크포에서 발사된 철갑탄의 불덩이가 5시간 동안 서로 교차하며 난무해 밤하늘을 수놓았고 미군들이 이런 장관을 보고 마치 볼링공이 굴러가는 것 같다고 표현해 이날 밤 탱크전이 '볼링앨리 (Bowling Alley - 볼링장)' 전투로 불리게 된다.
8월 22일, 전투가 끝난 다음날 볼링앨리 계곡에는 북한군 탱크 7대와 SU-76 자주포 3문이 파괴되어 버려졌지만 여자 방송요원을 동원한 선무방송은 계속되었다.
“남조선 반동 괴뢰군은 즉시 항복하라!"
"무적의 인민해방군이여, 적의 가슴에 총알을 박아라!”
여성을 이용한 선동 방송은 북한의 전공이다. 술에 얼큰해진 자들을 싸움터에 몰아놓고 여자가 확성기로 독려하면 어느새 신바람이 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8월 15일 밤 다부동 동쪽에서 벌어졌었던 466 고지 전투에서도 북한군은 여성을 이용한 대남 방송반을 투입했던 사례가 있었다.
"국방군아 나는 한성 여고생이다. 총부리를 돌려라. 대구가 보인다"
라는 방송을 되풀이했으나 아군이 동요하지 않아서 실패했다. 아무튼 볼링앨리 계곡의 선동 방송에도 불구, 실제상황은 좋지 않았다. 북한군은 이날 전투로 병력의 7할 이상을 잃었고 치열했던 전장엔 1,300여 구의 북한군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이날 북한군 13사단 포병연대장 정봉욱 중좌가 백기를 들고 11 연대 2대대에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소에 가진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도 작용했고, 북한군 내부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다 포병이 잘못한 결과라는 추궁을 받자 귀순을 실행에 옮기는데 정봉욱 중좌는 북한군이 교묘히 위장해 놓은 포병 진지와 곡사포 진지를 알려줘 남아있는 화력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후 북한군 잔당은 가산산성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게 된다. 미군의 포병 지원이 화끈하게 이루어진 가산산성 안은 북한군의 고함소리와 비명이 울려 퍼지고, 나중에 여기서 북한군 포로를 한 명 잡았는데 심문 결과 서울에 유학 중이던 대구 청년이 의용군으로 끌려온 케이스였다. 북한군 장교가 퇴각하면서 이런 지시를 남기고 버렸다고 한다.
"너희들은 대구가 고향이니 여기서 끝까지 적을 무찌르고 대구로 진격하라. 만일 도망치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8월 23일 새벽 2시, 12 연대 1대대는 1,000여 명의 손실을 내고 그동안 북한군과 정말 처절하게 싸웠던 837 고지를 완전히 탈환한다. 그리고 곧이어 인근 3대대도 유학산 주봉인 839 고지를 완전히 탈환에 성공한다.
8월 23일, 미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 (Lawton J. Collins) 장군이 정일권 참모총장의 안내로 굵직한 전투를 승리 모드로 만드는데 고생한 다부동의 1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뒤 "Ya Feel So Good!"을 외치며 11 연대본부로 가던 중 갑자기 북한군의 포탄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에 양국 참모총장이 빛의 속도로 뛰어 같은 참호 속으로 대피해 진땀을 흘리는 토막극이 연출된다. 천조국 참모총장도 참호 속에 집어넣었던 사건이 바로 다부동 전투였다.
8월 26일, 드디어 우리 군의 사기가 드높아지면서 급기야는 북한군 15사단 사령부를 습격하는 작전을 세운다. 국군은 14명의 잔뼈 굵은 베테랑 수색대원으로 정찰대를 조직해 유학산 건너편 상림동에 있던 북한군 15사단 사령부를 습격해 초토화시켰다. 6.25 한국전쟁사에서 유일한 적 사단 사령부 습격이었고 결과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특히 북한군의 암구호를 미리 입수해 북한군과 맞닥뜨리는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지역으로 안전하게 돌아와 인원점검을 해보니 총원이 1명 늘어났다. 황당해서 다시 점검을 해 보니 복장이 이상한 애가 하나 있는 거다. 알고 보니 북한군 병사 1명이 우리 정찰대가 자기네 부대인 줄 알고 따라온 거다. 모두들 너무나 황당해 낄낄낄~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벙한 이 북한군 친구는 포로로 처리했다고 한다.
이후 국군 1사단은 우리의 가로축 방어선을 완전히 회복하고 신주막으로 진출하며 일대에 남아있는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며 부대를 정비한 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을 계기로 다음날인 9월 16일 오전 9시부터 일제히 반격전을 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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