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에서 중국의 참전과 공산군 재역전
한국 전쟁에서 중국의 참전과 공산군 재역전
1950년 10월 19일은 중국 인민지원군이 한반도 전역으로 참전하던 날이었다. 그날 우리 국군과 미군은 조선 인민군의 치열한 저항을 이겨내고 평양 점령에 성공하였다. 평양 점령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남한의 국군 본부에서는 환성이 터졌다. 이때 평양 입성의 최선두에서 지휘한 백선엽 1 사단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한다.
"일개 월남(경계선을 지나 남쪽으로 넘음) 청년이 장군이 되어 한미 장병을 지휘하며 고향을 탈환하려 진군하는 감회를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 생애 최고의 날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오늘날 북한 지역인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보냈다. 평양에 먼저 입성하려는 우리 국군과 미군의 경쟁의식은 매우 치열하였다. 국군 1사단과 미군 제1 기병 사단의 선두 진입 경쟁은 양국 군대 사이의 긴장감을 유발했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평양 공략의 작전을 맡은 우리 국군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우리 국군이 반드시 먼저 입성해야 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미군에 선두를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백선엽 장군은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보냈기 때문에 평양으로 가는 지름길을 훤히 알고 있었다.
평양 입성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북방에서의 전운은 여전히 감돌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수도 점령'과 '월경 참전'이 같은 날에 일어난 것이었는데,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묘한 일치였다. 하지만 확실한 차이는 하나는 '보이는 것(수도 점령)'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월경 참전)'이었다. 세계 최강의 정보 능력을 갖춘 미국은 중국 공산군이 국경으로 대규모 군사 이동을 감행했음을 알지 못했었다. 이렇듯 평양 입성의 쾌거를 올린 우리 국군과 미군 및 유엔군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보이는 것'이 무화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재역전의 비극을 낳게 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 지휘관, 남일에 대한 간략한 설명>
-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
- 베를린 공방전 참전 두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여 훈장을 수여 받음(소련군 대위 시절)
- 김일성의 주도하에 조선 인민 공화국(북한) 재건 참여
- 한국 전쟁 후반기에는 외무상을 맡았으며, 휴전 협상 때는 항상 참여하여 외교 능력도 어느 정도 뛰어나다는 평가
- 하지만 김일성에 의해 숙청(76. 3. 7)
북한 정부의 절멸을 통한 종전이라는 미군의 의지는 너무나도 확고했다. 10월 20일에는 미군의 제187 공수 여단이 숙천(肅川)과 순천(順川)에 투하돼 평양에서 철수하는 북한군과 북한 정부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였다. 우리 국군 수뇌부의 참모들 역시 김일성의 직접적 생포와 북한 정부의 절멸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맥아더는 10월 20일부터 2~3일 동안 4천 명의 병력과 6백 톤 이상의 장비를 투하시켰다. 이 모든 것이 북한 정부의 절멸을 위한 작업이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이러한 공수 작전이 북한 정부의 절멸을 완료시킬 것이며, 전쟁은 확실하게 끝날 것이라 호언장담 하듯이 말하였다. 당연히 평양 입성의 쾌거를 느끼고 있었던 당시 유엔군 지휘관들은 맥아더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맥아더의 큰 오판이었다.
이미 북한 정부와 조선 인민군 최고 군 지도부는 산악 지역을 통해 10월 12일에 평양에서 전부 빠져나갔다.
한때 20만 대군으로 남한 전 지역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여 서울 ·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 · 강원도 · 경상도 일부를 장악한 북한 공산군. 이제는 그 강대하던 군의 기상은 사라지고 북한 정부와 군 수뇌부는 이미 탈출을 시도하였다. 아무튼 평양 함락은 맥아더를 비롯한 유엔군 지도부를 더욱 고무시켰고 의기충천하게 만들었다. 당시 군의 일반적인 통론은 "평양 점령은 곧 전쟁 종식"이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적 수도의 점령은 자신감을 가져다주기 마련이며, 수도 점령이 지니는 정치적 심리적 효과는 군사적 효과를 넘어선다. 우리 국군도 수도 서울이 북한 공산군에 의해 함락된 것이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까지 점령했으니 그것의 환희는 대단했을 것이다. 워싱턴과 일본의 미 지휘부, 그리고 서울과 한반도 전역의 전선에서는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맥아더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맥아더는 합동 전략기획 작전단(JSPOG)에 한국에서 병력을 철수시킬 구체적 계획과 점령군으로서 남겨놓을 부대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도록 명령까지 내렸었다. 그리하여 합동 전략기획 작전단도 전선에서의 전투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엔군의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물론 여기에 합동 전략기획 작전단은 위험한 가정을 설정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군과 소련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리하여 미군 지휘관들은 전쟁이 거의 끝난 듯한 기분에 쌓여 있었고, 한국에 파견될 병사들의 파견 계획이 취소되었고 한국으로 오는 무기도 다시 되돌아갔다. 이와 동시에 맥아더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킨다는 전략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그것의 명령은 한반도의 최북단까지 진격을 개시하여 한반도 전 국토에서 북한군을 축출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전 유엔군이 한만(韓滿 : 한국과 만주) 국경선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대역전의 시작
한편 모택동(마오쩌둥)은 10월 21일 새벽 2시 30분에 팽덕회와 등화, 홍학지, 한선초, 해방 등에게 전보를 보내었는데, 전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시간까지 미군과 국방군(대한민국 국군)은 우리 지원군(중국 인민군)이 참전하리라고 생각을 못하고 감히 동서 두 길로 나뉘어 마음 놓고 전진하고 있다. 아군 주력 사단을 집중시켜 국군 3개 사단(6, 7, 8사단)을 각개 격파해야 한다. 이번에 국방군(대한민국 국군) 3개 사단을 격파해 출병 후 첫 전부에서 승리를 거두면 우리는 조선 전세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모택동은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부의 설치와 팽덕회로의 지휘 통일에 대한 반복 지시를 누차에 걸쳐 강조하였다. 또한 북경에서 지휘 계통에 대한 편제와 위계를 처음부터 거듭 확고하게 정리해주고 있었다. 모택동은 팽덕회와 등화에게 또다시 전보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조선 지역에서 방공호를 지어 사령부의 안전을 도모할 것과, 북한을 동서로 가르고 있는 동서 제고점을 차지해 동서 양쪽의 적을 분리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10월 23일에는 모택동은 전문을 보내 절대 조기에 접촉하지 말고 일정 지역을 적에게 양보하고 적을 유인하여 섬멸하라고 지시하였다. 10월 25일 모택동은 당 중앙의 이름으로 지휘부의 구성을 승인해 지원군 사령부가 정식적으로 성립되었으며, 중국 공산당의 군사 활동이 시작되었다.
마오쩌둥 곁에서 항일 전쟁의 승리, 그리고 한국 전쟁에서의 중공군의 군사적 활약에 큰 기여를 하였던 팽덕회는 문화 대혁명 때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으로 자신의 목숨에 위협을 느끼게 되고 결국 문화 대혁명 때 마오쩌둥에 의해 숙청당하게 된다. 팽덕회는 중국 공산군의 유명한 지휘관이다. 그는 10월 25일 밤부터 분산 전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에 대해 각개 격파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전투를 시작하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팽덕회는 오전 7시 우리 대한민국 국군 1사단을 격파하였으며, 오전 10시에는 우리 대한민국 국군 6사단을 모조리 격파하였다. 중국 공산군의 승리와 함께 대규모 남하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유인 후 매복과 기습을 통해 대역습을 가한다.'라는 중국 공산군의 작전을 인지하지 못하고 맥아더의 지휘 하에 계속 북진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군은 단기간에 걸쳐서 빨리 남하하여 조기에 승리를 거두고자 하였지만, 일이 그렇게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피난민들이 북으로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거슬러 역방향으로 전진해야 하는 중국 공산군으로서는 커다란 곤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 공산군의 '기습과 매복이라는 작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요충 지점을 장악해야 했는데, 그게 피난민의 대규모 이동으로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군사 작전 회의에서 팽덕회는 피난민들 때문에 진격 속도가 느린 38군에 대해 대로하며 질책하였다. 11월 1일에는 유엔군과 국군의 도합 약 5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이 청천강 이북에 진주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유엔군 및 국군을 노리고 있었던 중국 공산군의 병력은 총 12~15만 명 정도나 되었다. 여기서 중국 공산군은 유엔군 및 국군의 규모와 배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유엔군 및 국군은 중국 공산군의 작전 실태를 파악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중국 공산군의 대규모 병력이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드디어 11월 1일 저녁 중국 공산군의 각 부대가 일제히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운산에서 중국 공산군 39군이 평양 입성에서 공을 세운 미군 제1 기병 사단을 격파하였다. 미군 제1 기병 사단은 부랴부랴 철수하기 시작하였으며, 모택동은 두 번이나 작전 지시를 내려 청천강 남과 북의 적 병력의 연결 고리를 끊을 것을 지시하였다. 중국 공산군의 대규모 침공에 미군 제1 군단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1월 3일 전 전선에 걸쳐 철수를 개시하였으며, 팽덕회는 미군에 대한 추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동부 전선의 상황은 달랐다. 유엔군이 당시 북한의 임시 수도였던 강계와 두만강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련 군사 고문단과 중국 공산군 지휘관의 재밌는(?) 대화가 있다.
소련 군사 고문단 : 수고 많으십니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중국 공산군 지휘관 : 황초령 일대 병력 배치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살펴보려 갑니다.
소련 군사 고문단 : 그런데 중국에서 대규모 병력이 조선 전쟁에 참전하러 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제대로 장비나 갖추었는지 궁금합니다.
중국 공산군 지휘관 : 글쎄요. 보시다시피 변변치는 않습니다.
소련 군사 고문단 : 그렇다면 중국에는 전투기가 있기는 있습니까?
중국 공산군 지휘관 : 전투기는 한 대도 없습니다.
소련 군사 고문단 : 그러면 우리의 T-34와 같은 탱크는 몇 대 있습니까?
중국 공산군 지휘관 : 전혀 없습니다. 중대마다 박격포 정도가 있을 뿐 대포도 거의 없습니다. 그저 소총 정도의 개인 화기와 수류탄 정도 갖추고 있습니다.
소련 군사 고문단 : 그렇군요.
소련 군사 고문단은 중국 공산군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저렇게 형편없는 장비로 어떻게 현대화된 무기로 무장한 미군과 싸울 수 있는가? 하지만 그들의 의구심과는 상관없이 중국 공산군은 개입 초전에 상당한 전과를 세웠다. 중국 공산군의 주야에 걸친 끈질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미군은 각 전선에서 철수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1월 5일 팽덕회는 각 군에 명령하여 공격 중지를 명령, 이로써 제1차 전역은 종료되었다. 압록강 변경까지 승세를 타던 유엔군은 청천강 이남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미군의 패배는 정보 부재와 오만이 가져다주었던 쓴 패배였다. 아무튼 팽덕회는 1차 전역에서 승리한 이후 추격을 실시하지 않고 중국 공산군 주력 부대를 각각 30~50km 후방으로 후퇴시켰다. 중국 공산군의 1차 전역으로 인해 유엔군이 밀리는 상황이 도래하자 워커(Walton H. Walker)는 일단 진격을 중단하고 병력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맥아더의 구상은 변하지 않았으며, 알몬드(Edward M. Almond)는 미군 병력을 상륙시켜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국경선을 향하여 진격하라는 맥아더의 명령을 수행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10월 25일 한국군 부대와 유엔군의 진격은 중국 공산군의 저지로 인해 차단되고 있었다. 중국군은 이제 동서에 걸쳐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음이 분명해진 것이었다. 그렇게도 오래 워싱턴과 동경, 런던을 비롯하여 서방 세계의 정치가들과 군사 지도자들이 논란을 벌였던 중국 공산군의 대규모의 직접적 참전은 확실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군과 직접 조우한 소수의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8군과 10군단의 사령부, 동경의 극동군 사령부와 워싱턴의 미국 사령관들은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평양 - 원산 지역을 전방으로 삼고 덕천, 구장, 영변 북쪽과 서쪽을 후방으로 삼아 장기전을 펼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았다. 11월 5일 밤 10시에는 모택동이 송시륜의 9 병단 파병을 알리며 9 병단에게 적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힐 계획을 구상하라고 지시하였다. 중국 공산군이 장기전으로 전환할 것을 표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북진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맥아더는 여전히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 중국 공산군의 개입이 확인된 뒤에도 계속적인 북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가 선택한 카드는 공군의 활용이었다. 미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트 마이어는 11월 4일에는 강계를, 5일에는 삭주와 북진, 그리고 7일에는 신의주를 폭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극동공군사령관 오도넬(Emmett O Connell)은 이들 도시를 초토화시켜 중국 공산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계획이었다. 11월 5일 맥아더는 스트레트 마이어 장군에게 전 극동공군 승무원을 2주일 동안 동원하여 북한군과 그 동맹군들을 격멸하도록 지시하였다. 11월 4일 B-29 폭격기들은 청진에 소이탄을 투하했고, 5일에는 강계 지역에 소이탄 170톤을 투하하였다. 그리하여 강계 지역의 시내 건물 65% 정도가 파괴되었다. 7일에는 B-29 70대가 신의주 상공에 나타나 500파운드 소이탄 584톤을 투하하였다. 하지만 폭격에도 불구하고 북한 공산군과 중국 공산군의 동요는 포착되지 않았고, 오히려 사태는 국군 및 유엔군에게 심각하게 돌아갔다. 보다 큰 문제는 바로 '보급'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청천강 지역까지 전선을 넓게 확장시켰기 때문에 보급선이 너무나도 길어졌다. 게다가 도로 사정과 추위는 최악에 가까웠으며, 평양 이북으로 이동한 이래 8군은 주로 공수에 의해 물자를 보급받는 실정이었다. 철도는 단선인 데다가 중간중간 철교가 파괴되어 있어서 군수 보급 통로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즉 북한 공산군의 공격과 보급 통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감행하였던 무차별 폭격이 역으로 유엔군의 진격에 장애 요소로 전락되었다는 의미이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국군과 유엔군은 추운 날씨로 인해 동사자가 늘어나 사망하는 병사가 속출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위에서 거론한 것처럼 보급 문제 역시 심각해졌다. 특히 미군 제1 군단은 하루 분량의 탄약을 갖고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하루 반 분의 유류를 비축하고 있을 뿐이었다. 워커(Walton. H. Walker)는 제한된 수송 능력과 빈약한 도로, 그리고 먼 거리 때문에 진남포의 항구가 완전히 개항되지 않는 한 이러한 위험한 사태를 호전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볼테(Charles. L. Bolte)는 워싱턴 당국에게 "화물 수송은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며 지원의 즉시 증대를 강력히 건의하고 있었다. 이 시기 북한 공산군과 중국 공산군은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펼쳐 국군과 미군, 그리고 유엔군에게 큰 심리적 공포감을 심겨 주었다. 11월 7일 맥아더는 합참에게 많은 수의 전력을 보충시켜 줄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동시에 중국 공산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완전히 바뀌었으므로 자신에게 보내줄 모든 병력 파견 계획을 즉각 실행할 수 있게 요청하였다.
"더욱 많은 전력의 지원이 없다면 그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써는 곤경에 처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획득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될 것!"
워커(Walton. H. Walker)는 중국군 주력이 압록강을 넘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맥아더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깊이 고려하지도 대책을 세우지도 않았다. 맥아더가 과거 2차 세계 대전에서 얻은 명성으로 인해서, 자신이 참전하면 북한 공산군과 중국 공산군이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은 북한 공산군과 중국 공산군의 확실한 연합 계획에 맞혀 공산 진영의 군대가 다시 내려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11월 9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중국의 출병 의도가 확인될 때까지는 전 한국을 군사적 수단으로 신속히 점령한다는 원래의 계획을 계속 실시한다고 최종적으로 확정 짓고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변경시키지 않을 것을 결정하였다. 중국 공산군의 1차 전역에서 조우한 뒤로 맥아더와 미국 워싱턴은 전략상 심각한 갈등에 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는 사이 북경의 모택동과 전선의 팽덕회는 치밀하게 이들을 유인하여 격퇴시킬 구상을 가다듬어 가고 있었다. 팽덕회는 이미 2차 전역에 대한 작전 구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특히 유인 작전을 펼칠 때에는 그 미끼 부대로 당시 중국 공산군의 최정예 부대였던 38군 및 112사단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112사단은 항일 전쟁과 국공 내전 당시 패배를 모른다 하여 '철군'으로 불린 최정예 부대였다. 일반적으로 고금을 막론하고 미끼 부대로 약체 부대가 맡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 다음에 주력 부대가 역습을 통해 승세를 장악하는 것이 유인 작전의 일반적 전술이었다. 그러나 팽덕회는 모험적인 반대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미군은 지휘 체계가 이원화되어 있었다. 서부 전선은 미 8군(제1 · 9군단), 동부 전선은 미 제10군단으로 나뉘어 전자는 워커 중장의 지휘를, 후자는 동경의 맥아더의 지휘를 직접 받고 있었다. 그 결과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의 미군 사이에는 엄청난 틈새가 존재하였는데, 그것은 거의 100km 정도에 달하는 거대한 공백 지대였다. 이 넓은 틈새를 우리 국군이 메워 준다고는 하였지만 국군의 전력으로는 역부족인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국군 및 미군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팽덕회는 유엔군의 결정적 약점을 놓치지 않고 '유인 후 역습'이라는 2차 전역의 작전 구상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대병력의 일부는 덫을 놓아 유인 작전에 투입하였으며, 나머지는 유엔군의 상륙 작전을 대비해 서해안 경비에 투입하였다. 아마도 '인천 상륙 작전'을 경험한 교훈이 있기 때문에 병력의 일부를 서해안 경비에 투입한 것 같다. 모택동은 11월 9일 전보에서 "12월 초까지 공세를 펴 전선을 평양 - 원산 간 철도까지 확대한다면 일단 성공"이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중국 공산군에게 충분한 물자 보급을 위해 동북군구 주석 고강에게 방법을 강구해보라고 지시하였다. 한편 11월 13일의 회의에서는 전면전에 대비해 중국 공산군은 조선 인민군과 합동으로 유격전을 벌이는 문제에 대해서도 결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원군 42군 125사단의 2개 보병 대대와 조선 인민군 1개 연대를 합쳐 유격대를 구성해 유엔군 측의 후방인 맹산, 양천, 성천 지역에 침투하였다. 제2 전선 책임자 최현은 김일성에게 항일 무장 투쟁의 경험을 살려 유격전을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차 전역을 앞둔 시점에서 당시 유엔군과 중국 공산군의 병력은 대략 22만 대 38만으로 중국 공산군이 앞서 있었다. 특히 동부 전선은 9만 대 15만, 서부 전선은 13만 대 23만으로 양 전선 모두 중국 공산군이 1.7배의 압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극동군 총사령부는 적군의 총병력은 북한 공산군 8만 3천 명, 중국 공산군 4만 ~ 7만 935명으로 믿고 있었다. 엄청나게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며, 당시 중국 공산군은 최소 30만 명의 병력을 압록강 이남으로 투입한 상황이기 때문에 맥아더가 판단한 중국 공산군 병력보다도 약 4 ~ 7배가 많은 상황이었다. 2차 전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중국 공산군은 일관되게 후퇴 작전만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군은 너무 쉬이 물러서는 것에 대해 유엔군이 의심할까 봐 매우 조심스레, 그러니까 고의적 후퇴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11월 16일 팽덕회는 각 부대에 지시를 내려 적이 예정된 전장으로 전진하도록 유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북쪽으로 철수하고 진격하는 적에 대한 반격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유엔군은 계속해서 중국 공산군이 설정한 매복 자루 지역, 즉 함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비슷한 시간 정반대의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11월 18일 워싱턴에 11월 24일 공세를 시작할 계획임을 알리며 지난 10일 동안의 공중 폭격으로 유엔군은 전장을 적의 추가적 증원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크게 성공하였으며, 적의 보급도 크게 감소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스스로 적군의 자루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는지도 몰랐던 유엔군은 최종 공세를 앞두고 계속 전진하였다. 마침내 11월 24일 유엔군의 최종 공세가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성명을 통해 중국 공산군에 대한 유엔군의 대규모 포위 섬멸 작전을 발표하면서 이제 그 결정적 단계에 도달했다고 언명했다. 특히 맥아더는 이 작전이 성공하면 전투는 사실상 끝나고 유엔군의 조속한 철수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했다. 정일권에 따르면 현지 전선의 참모 회의에서는 밀번 군단장의 맥아더에 대한 이견 제시가 있었다고 했다.
"운산 지역의 적이 예상보다 강하다."
하지만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나의 군력에서 미 육군에 승리의 기록만을 바쳐왔다. 나의 부하들도 그러했다."
결국 밀번 군단장의 말은 간단하게 제압당했고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때까지 미 장병들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다며 그러니 이번 총공세를 빨리 끝내자고 다그쳤다. 그리하여 맥아더의 직접적 명령과 함께 유엔군은 즉시 정주, 태천, 덕천 지역에 대한 대규모 전면전을 개시하였다. 중국 공산군은 작전상 후퇴를 계속하다가 드디어 11월 25일 기다리던 2차 전역을 개시하였다. 중국 공산군은 2차 전역의 시점부터는 속도를 내기 위해 낮에도 이동했다. 행군 중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몸에 걸쳤던 위장도 벗어버렸다. 왜냐하면 미군과 국군은 위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공산군만 위장을 하는 것은 오히려 공습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미군의 뛰어난 도청 기술을 감안,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 중국 공산군 부대(113사단)는 무전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 행군 시간을 아껴 한시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따로 식사 시간을 갖지 않고 행군 도중 미숫가루를 먹었다. 그 결과 중국 공산군 113사단은 14시간 동안 무려 72km가량을 행군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중국 공산군의 2차 전역 개시, 그리고 그것의 전황은 역시 1차 전역과 같았다. 국군과 미군은 커다란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밀리고 있었다. 팽덕회는 바로 적에 대한 즉각적 포위 섬멸과 도주 차단을 명령하였다. 맥아더는 11월 28일 합참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우리의 공세로부터 초래된 사태 진전으로 상황이 명확해졌다. 한국 전쟁을 명목상의 외국인 부대와 북한군으로 구성된 적군에 국한시키려는 모든 희망은 지금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중국 공산군은 대규모로 북한에 투입되었으며 현재 증강 상태에 있다. (중략)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an entirely new war)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 공산군의 궁극적 목적은) 한국에서 모든 유엔군의 완전한 격멸에 있다."
11월 30일 합참은 유엔군의 안전상 필요하다면 한반도 북부 변경 지역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지시함으로써 지난 몇 달 동안 견지하였던 '북한 붕괴 - 한국 통일'이라는 전쟁 목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공산군의 참전이 1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중국 공산군의 전체 규모는 물론 작전, 위치, 지휘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미군은 엄청난 화력을 동원하여 맹공을 가하였으나 지상군은 역부족이었다. 전선은 총체적으로 뒤엉키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서부 전선은 사태가 심각하였다. 그리하여 서부 전선에서 유엔군의 대규모 후퇴가 시작되었으며, 이어 12월 1일 마침내 동부 전선에서도 유엔군의 대규모 후퇴가 시작되었다.
장진호 전투는 중국 공산군이 이때 거둔 큰 승리였다.
쑹스룬이 이끈 중국 공산군 15만 대군은 미군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제1 해병 사단은 전사 463명, 후송 후 사망 98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의 전투 소실과 3,659명의 비전투 손실을 기록하였다. 미군은 이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 탈출하기 시작하였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동사단의 5 연대는 하룻밤에 병력이 437명에서 194명으로 격감하였다. 게다가 미 제7 사단의 한 개 연대는 하루 사이에 병력의 75%가량이 상실되었다. 전체적으로 미군은 2천5백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5천여 명 가량이 부상당하였다. 비록 미군이 패배한 전투이지만 중국 공산군 피해는 더 막심했으며,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의 무훈이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게 된다. 아무튼 12월 3일 마침내 유엔군은 대규모 퇴각을 개시하였다. 모택동은 그대로 남진하라고 명령하였다. 팽덕회는 12월 3일 모택동에게 3개 사단이 세 길로 나누어 평양을 위협함은 물론 다음과 같은 작전을 모택동에게 건의하였다.
"만약 적이 평양 - 원산 전선을 스스로 포기하면 아군은 곧 38선으로 진격하고 기회를 보아서 서울을 점령한다."
모택동은 이러한 작전에 동의하였다. 전황은 공산 세력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이것은 모택동과 팽덕회가 구상하였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모든 남조선군(대한민국 국군)을 섬멸시켜야 미 제국주의의 철수를 촉진시키는 데에 더욱 큰 힘이 될 것"
12월 6일 중국 공산군은 마침내 평양을 회복하였다. 평양 탈환과 함께 김일성은 "평양시 해방에 제하여"라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우리의 후퇴는 위대한 조국 해방 전쟁을 승리에로 인도하기 위한 전략상 일시적 후퇴입니다. 인민들의 힘은 무진장합니다. 이 무진장한 힘은 백전백승의 힘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평양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도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들의 헌법에 따르면 당시 북한의 수도는 서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부는 서울시다."
사태는 풍전등화와 같았다. 하지만 맥아더와 워싱턴과의 의견 충돌이 있었듯이,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도 의견 충돌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 의견 충돌은 예전부터 견지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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