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마지막 민주화운동 - 천안문 사태
모택동 초대 주석의 초상화에는 페인트가 칠해졌다.
학생들은 광장에 '민주주의 여신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동상은 그들의 투쟁을 상징했다
1989년 6월 1일, 광장에서는 아이들이 웃는 얼굴로 춤을 췄다.
학생들은 관제 신문을 불태웠다.
베이징의 군인들은 시위에 우호적이었다.
이후, 무력탄압에 동원된 해방군 부대는 '베이징에 지인이 없고,
베이징 시민에게 무차별 발포하는데 큰 저항감이 없다'는 이유로,
신장 자치구 등에서 차출된 군인들이 중심이었다.
마치 1980년 광주처럼.
광장에서 승리의 V사인을 그리는 사람들
학생들은 공개적으로 정부를 거부했다.
그건 마치 우드스톡 페스티벌처럼 다소 낭만적이기도 했다.
학생 지도자 왕단(王丹)이 거리에서 호소하고 있다.
단식투쟁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중국 정부는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언론이 곧 시위에 합류했다. 승리의 일보 직전이었다.
천안문 광장의 시위에는 여유와 유머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곧 다가올 승리를 축하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 시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교육 실습생들도 손을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
광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개혁을 부르짖는 깃발들이 나부꼈다.
그러나, 평화로운 승리는 점점 불확실해졌다.
인민해방군은 시민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부상자들은 리어카로 실려나갔다.
시민들은 전차의 진로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항했다.
그러나, 결국 시위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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