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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선의 여진족 학살

|||||||||||||| 2020. 10. 17.

조선시대, 조선의 여진족 학살

조선 왕국의 국경과 가까운 어느 평화로운 여진 노토 부락

이 노토 부락은 좌우로 높은 산과 절벽이 있고 마을 안은 매우 넓다. 토지는 비옥하고 그 가운데로 큰 냇물이 흐르며 모든 부락들은 그 물을 끼고 살고 있다. 집들 역시 즐비하며 살림의 넉넉함은 다른 여진 부락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평소 여진족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그들 역시 가축에게 풀을 먹이며 곡식을 재배하는 등 평화롭고 목가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방에서 불화살이 쏟아지더니, 맹렬한 굉음이 온 하늘을 준동하였다. 평화롭던 노토 부락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고, 절벽 위에서 불화살과 대포알이 쏟아졌다. 노토 부락민은 비명을 지르며 즉각 도망가기 시작했고, 마을은 금세 온 비명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거친 말발굽 소리와 함께모래 바람이 하늘을 가리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병대 무리가 마을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들은 노토 부락민을 문자 그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침략자 무리들은 바로 조선 왕국의 토벌 부대였다. 절벽 위에서, 오랑캐 땅을 짓밟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던 조선군 사령관은 입가에 미소를 뗬다. 조선군은 도끼로 가옥의 뼈대를 해체시켰고, 전부 불살라버렸다. 또 성벽과 목책을 허물었으며, 물에 독을 풀어 영영 마실 수 없게 만들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노약자든 어린이든 모두 참수되었고, 화염이 하늘까지 치솟는 모습을 보며 조선군은 모두 호탕하게 웃었고, 겨우 몸을 피해 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여진 노토 부락민은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었다.

조선군의 승전 소식은 곧 그들의 도성인 한양으로 전해졌고, 승전 보고문에는 당시 노토 부락을 처참하게 학살했던 조선군의 심정이 잘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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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선조 33), 함경도 관찰사 윤승훈이 오랑캐를 토벌한 시말과 전과를 보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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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조선 왕국의 선조 임금이 재위한 당시에 있었던 '노토 부락 토벌전'이다. 동원된 군사는 무려 5천 명이었고, 대부분이 정예 기병 군단이었다. 당시 이 토벌 부대는 노토 부락을 문자 그대로 초토화, 심지어 여진족이 땅 속에 묻은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전부 짓밟고 무려 1천여 집을 한꺼번에 태워버렸다. 이 토벌전에서 사망한 여진족은 1만여 명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피폐해졌었고, 왕실의 권위 또한 실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진족은 조선 왕국의 변경에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 보복의 일환으로서 선조는노토 부락 토벌을 명했던 것이다. 사실 그 이전부터 국경 장수가 북벌 계책을 올렸었고, 그러나 북벌에 대한 사헌부와 선비들의 반대 의견이 무척이나 심했다.

"임진년 병란으로 국토가 피폐해져 온 인민이 고통받고 있사온데, 북벌을 통해 나라의 힘을 소진시켜서는 아니되옵니다 전하!"

"과인이 이번 북벌에 뜻을 품은 이유는, 사악한 기운을 가진 저들에게 우리의 은혜와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변방 오랑캐는 짐승과도 같은 족속으로서, 그 사특한 마음을 그대로 좌시한다면 우리나라(조선)에 장차 화가 될 것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선조 때까지 거의 연례 행사로 여진 토벌에 나섰다. 여진이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면, 그것의 갑절로 보복 공격에 나서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전에 국경 지방의 여진족이 조선의 '녹둔도'를 함락시켰는데, 이때 조선인 10명이 피살당했고, 16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이순신과 이수일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추격하였다.

여진족의 침범 소식을 접한 선조는 매우 분노했고, 이듬해 선조는 2천5백여 명의 토벌 부대를 보내 여진족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과정에서 조선군은 200여 개의 가옥을 불태웠고, 380명의 여진족을 참수하였다. 조선군의 반격으로 여진족 부락 하나가 깨끗하게 사라진 셈이었다.

또한 선조 재위 동안에 무려 최대 3만여 명에 달하는 여진족 기병대가 조선의 국경을 대대적으로 침범했다(니탕개의 난).

조선의 최고 성군이라고 하는 세종이 개척한 '동북 6진'에는 동시다발적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요새 몇몇은 여진족의 파상 공세에 함락되기도 했고, 조선군은 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뛰어난 여진족 사냥꾼이 있었다.

조선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 장군

 

신립은 온성부사로 재직할 당시, 자신을 따르는 철기병 500기와 함께 두만강 변경을 거닐며 사냥도 하고 훈련도 하며 이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등 정예 기병으로 단련시켰다. 그런데 신립이 이끈 철기병의 빠르기가 귀신같았다고 하기에 이 광경을 여진족들이 모두 몰려와 구경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신립은 기병 500기로 훈융진을 공격하던 여진족 기병 1만 기를 격파했고, 적장 중에 백마를 타고 조선군 진영을 도발하자, 신립이 활을 쏘아 적장을 명중시켰다. 이때 조선군 용사 8천여 명이 출전하여 니탕개의 여진족 군대를 공격했고, 신립 역시 6진의 병사들과 함께 반격에 나서 니탕개의 수만 군대를 격파했다.

더 나아가 국경을 넘어 여진족 산채들을 토벌했고, 500여 급의 여진족을 잡아 참수하였다. 당시 여진족 중에서 신립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서로 놀라며 말하기를,

"온성(穩城)의 영공(令公)이다!"

이렇듯 조선은 여진족 토벌 및 보복 공격을 자행해왔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국초부터 이러한 행동은 계속되어 왔다.

조선 초기엔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조선과 명나라의 대립이 있었다. 당시 두만강 인근 변경 지역의 여진 부족은 조선의 지배를 받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사신 왕교화적을 보내 여진족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그곳 여진족들은 조선을 섬기기로 회맹 하며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들 여진 부족에 대한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힘이 없는 약소한 여진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의 질서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초유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 태종은 곧바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길주도찰리사 조연이 이끈 1천여 명의 조선군 기병 부대는 올량합 부족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가옥과 논밭을 불태웠고, 수백여 명의 부족민을 참수, 이어 무기로 무장한 여진족 군사 1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또 참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조선군의 일방적 토벌이었고, 태종도 이를 의식했는지 신하들과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태종은 자신의 상국인 명나라 황제를 속이기로 작정했고, 태종의 계책은 성공해서 외교적 문제로까지는 비화되지 않았다.

조선 세종의 파저강 토벌 작전

태종의 아들이자, 조선 최대의 성군인 세종 대왕은 무려 보병 1만과 기병 5천의 대군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진족을 토벌하겠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널리 유시해 그 뜻을 장황하게 밝혔다.

"무지한 이 야인(조선이 여진족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 시랑 같은 마음으로 벌같이 쏘는 독기를 마음껏 행하여 우리 국경을 침략하니, 과인이 매우 애통하고 슬프다. 태조(太祖)께서 세우신 이 종묘사직이, 위대한 선왕들이 그 대업을 계승해 나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하루아침에 이 국토를 야인 오랑캐들에게 내줄 수 있으리오! 국가 장병이 온 힘을 다해 변방 백성들의 소망에 보답하게 하라!"

1만 5천여 명의 조선군은 파저강 인근의 올라 · 거여 · 마천 · 팔리수 · 이만주 본진 · 임합라 본진에 들이닥쳐 이곳의 여진족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고, 논밭과 가옥을 전부 불태웠다. 그리고 여진족의 가축은 조선군이 죽이거나 약탈해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이 작전을 이끈 최윤덕 장군은 현지에서 여진족을 참수하며 승전 퍼레이드를 거행했고, 세종의 위업을 칭송하며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보고했다.

"성상 전하의 지혜는 중국 탕(湯) 임금보다 더하시고, 총명하심은 중국 순(舜) 임금과 같으시와, 우레 같은 위엄을 한 번 떨치매, 신성한 기운이 오랑캐 땅에 빛나고, 해와 달같이 밝으신 덕이 야인의 풍속을 아름답게 만들어, 무기를 거두고 변경에 근심이 없어졌습니다. 신은 전하의 명을 받들어 창과 칼을 부러뜨려 하늘에 가득한 악한 무리를 쓸어 버렸나이다!"

세종은 보고 소식을 듣고 기뻐, 사정전에 나아가 옷 두 벌을 하사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신기전 등 화차가 개발되었고, 이는 여진족 고을을 토벌할 때 사용되었다.

여진족 토벌에 있어서 세조(수양 대군)는 더욱 잔인했다. 세조의 측근인 신숙주는 변방 방위 및 군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신숙주가 이끈 2천의 조선군 기병은 아적랑귀 대천(大川)의 여진족 숲을 불태웠으며, 수백여 리에 이르는 여진 부락들의 집과 논밭을 전부 불태웠다. 이어 430명의 여진족을 참수, 가축 1천여 마리 약탈, 900여 채의 가옥을 전소시켰다.

1467년에는 강순 · 어유소 · 남이 등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건주 여진 토벌을 명하게 했다. 건주 여진은 훗날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소속이기도 하다.

조선의 건주 여진 토벌(1~2차 원정)

5만의 명나라군이 잡지 못한 이만주 일당을 조선군이 손쉽게 참살하였고, 1만의 조선군은 건주 여진의 동북쪽 발저강의 산채를 전부 초토화, 이만주와 그 아들 이고납합과 이타비랄 등 286명의 부족민을 참수하였다. 게다가 수백 채의 집을 불태웠으며, 포로로 잡은 여진족을 참수하여 귀를 잘라 소금에 절이도록 명했고, 승전 기념으로 그 귀를 명나라 조정에 바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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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 이후, 세조는 토벌에 나섰던 우의정(右議政) 강순과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세조가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이 건주 여진을 정벌할 때에 나무를 쪼개어서 글을 썼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예, 전하. 조선 대장 강순이 정예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건주 여진을 공격했다고 썼나이다!"

그러자 세조가 말하기를,

"공격한다는 글자는 통쾌하지 못하니, 멸망한다는 글자가 가장 좋았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나서, 세조는 활을 쏘아 호랑이를 잡았다. 세조는 이후에도 군사를 보내 국경 지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게 명했고, 이후 유교 정치와 문치주의가 융성해지는 성종 시대에도 여진 토벌은 계속됐다.

조선의 상무적 기풍이 쇠해지고, 유교 정치가 꽃을 피는 성종 시기에는 무려 4만 명의 대군이 동원됐다. 그러나 여진족이 미리서 도망을 갔기에 조선군은 별 소득도 없이 돌아왔다. 참고로 성종 시기엔 조선군 국경 장수가 항복한 여진족의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내는 일도 벌어졌으며, 한양에서는 조용히 살고 있던 여진족이 조선인에게 살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렇듯 조선은 국초부터 여진족을 짐승처럼 취급하며 야인이라고 부르며 멸시했고, 전통적으로 이이제이 정책을 취해 여진 부족들을 분열시키며 그 힘을 약화시켰다. 여진족이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기도 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조선군이 여진족 고을을 침범하여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약탈하는 일도 실록을 찾아보면 비일비재했다. 이후 여진족은 건주 여진의 통합 아래 하나로 뭉치게 되었고,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이 청 중심의 질서로 편입됨으로써 조선의 여진 원정사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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