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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기근, 역병, 식량, 추위

|||||||||||||| 2020. 10. 19.

임진왜란 당시 기근, 역병, 식량, 추위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지금까지 조선이 맞닥뜨린 왜군의 규모는 수천여 명 수준이었지만, 임진년 변란은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왜군의 규모는 거대했다. 그 규모는 무려 '약 17만 명'.

임진왜란 참전국 병력 손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왕조엔 어느 정도의 군대가 있었을까? 다음 지도와 함께 조선 왕조의 지역별 군대를 파악해보자.

 

[조선 왕조] 경기도 주둔군 : 19,300명

[조선 왕조] 충청도 주둔군 : 10,800명

[조선 왕조] 강원도 주둔군 : 2,000명

[조선 왕조] 황해도 주둔군 : 8,800명

[조선 왕조] 평안도 주둔군 : 15,300명

[조선 왕조] 함경도 주둔군 : 10,200명

[조선 왕조] 경상도 주둔군 : 77,000명

[조선 왕조] 전라도 주둔군 : 25,000명

조선 왕조 전체엔 '172,400명'의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특히 경상도 지역에 77,000여 명이 배정됨으로써 그 군세가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경상도 방어선은 손쉽게 붕괴됐고, 도성인 한양은 물론이요, 평양까지 왜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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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왜구가 쳐들어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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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왜군이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당시 왜군은 조선군의 중요 거점만 점령하고 곧바로 진군했다. 허나 중요 거점 인근의 조선군은 여전히 건재했고, 이들 조선군은 왜군의 보급로를 위협하며 반격에 나선다.

게다가 조선군의 원조 요청을 승낙한 명군의 참전과 함께, 전쟁은 급기야 소강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수년 동안 계속 이어진 '흉년과 기근, 그리고 역병'이었다.

1593년, 조선군은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전황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전쟁 과정에서 대규모 징발, 토지 황폐화로 인해 생산력이 급격히 감소하였고, 게다가 3년 동안 흉년과 기근이 이어져 조선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1593년 2월, 전국의 조선 백성들이 살 곳을 정하지 못하여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잇달았다. 길거리에는 거지들이 가득했고,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산중의 풀잎과 소나무 등의 껍질과 뿌리는 백성들이 다 갉아서 먹었기에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기근으로 인해 인육을 먹는 사태가 증가했고, 기근은 역병을 유발하면서 조선군의 전력에 적잖은 손실을 입혔다. 1593년 3월에 혁혁한 공을 세워 활약했던 경상우병사 김면은 역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군을 지휘하는 장교가 역병에 걸려 죽을 정도였으니, 휘하의 사졸들은 역병으로 인해 얼마나 많이 죽었으리.

1593년 12월에는 선조가 좌의정 윤두수를 불러 남부 지방의 실태를 물었다.

"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신이 팔거(八莒)에 갔을 때에 사람을 잡아서 먹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군관을 보내어 그자의 목을 베었습니다."

1594년 1월, 사헌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아룄다. 바로 기근과 관련한 것인데, 당시 참혹한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 죽은 시체에 완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 이른바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한 것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보고 듣기에 너무도 참혹합니다, 전하!"

이렇듯 기근과 역병으로 많은 백성들의 삶은 처참했고, 또 게다가 당시 전쟁으로 인해 온 국토가 혼란스러웠다. 전쟁과 여러 역병으로 농업 인구는 감소하였고, 본격적으로 군량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또한 역병은 각 지역의 요충지와 군사 시설에도 전파되었고, 이와 관련해서 이순신 장군 역시 큰 고초를 겪었다.

이순신 장군이 1594년 4월 20일에 작성한 장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손실이 적혀져 있다. 역병으로 인한 조선 수군 사망자가 1,904명, 감염자는 무려 3,759명 정도였다. 따라서 3도(전라 · 충청 · 경상도) 조선 수군 1만 7천여 명 중 5천여 명이 넘는 비전투 손실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 시대 성인 남성의 1끼 식사 정량은 7홉인데, 이 당시 조선 수군에게 배급된 1끼 식사 정량은 2~3홉이었다. 전쟁통이라 많이 배고플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이 너무나도 열악해서 군량 보급의 양은 심각했다.

게다가 무기 유지비와, 군사들에게 줄 월급 등 군대를 유지할 재정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총체적인 악조건 속에서 이순신이 주둔한 군영을 비롯해서 전국에서 수없이 많은 탈영병이 속출했다. 당시 조선군 지휘부는 탈영병들을 즉각 참수하면서 군의 동요와 소란을 막았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문제는 고쳐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 조정도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장계를 접하게 되면서 이 끔찍한 상황을 보고 받았는데, 조선 조정 역시 골머리를 앓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조선 조정은 군대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상국이었던 중국 명나라의 도움을 빌렸다.

"우리 나라(조선)의 처지로는 전쟁을 수행하기가 한계가 있습니다. 천조 대국(명나라)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우리 군사들에게 먹일 군량을 확보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조선 조정은 중국 명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내 군량을 요청했는데, 중국 명나라에선 조선에게 막대한 군량을 지원해주었고, 이는 결과적으론 조선의 전쟁 수행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명나라 신하들 대부분이 이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명나라 황제(만력제)는 조선에 대해 꽤나 호의적이었다.

명나라 황제 만력제가 꿈을 꾸었는데, 중국 삼국지의 그 관우가 만력제의 꿈에서 나타나더니, 만력제가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왕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라고 하는 바람에 만력제가 조선에 호의적이게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마 이 이야기는 야사의 이야기인 듯하다.

"저희 조선으로선 전선과 병참을 감당하기엔 많은 한계가 있사옵니다. 부디 황제께오서 불쌍한 조선을 위해 황은을 베풀어주소서!"

"짐은 조선을 위해 천하에서 많은 병마와 군량을 징발하고 있다. 천병(天兵 : 명군)과 함께 오랑캐를 평정해, 부디 동방(東方 : 조선)의 사태가 평정되기를 바랄 뿐."

1593년, 중국 명나라 황제는 군량 10만 석을 배로 운송해 조선에 보냈으며, 이해 8월에는 명나라가 조선에게 군량을 보내기 위해 14만 석을 새로 징발하였다. 또한 이해 11월에는 군량 12만 석이 새로 징발되어 조선에 보내졌으며, 조선 조정은 이 군량을 군사와 백성들을 먹이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광범위하게 베풀자, 군량이 또 부족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내 군량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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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중국에서 많은 군량이 오자, 조선의 처지는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군사와 백성들의 처지는 곤궁했고 피폐했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재침 선언을 발표하게 되면서, 전란의 피해가 미미했던 전라도 호남 평야가 공격을 받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호남(전라도)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남원성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명나라군 3천여 명도 참전하여 남원성 내부에 배치되어 농성에 돌입했다(조선군 1천여 명). 남원성은 순식간에 함락됐고, 이 전투에서 겨우 10여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또한 전라북도의 중심 거점인 전주성이 함락됐고, 호남 평야가 공격을 받게 되면서 조선군의 보급 문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왜군은 소규모로 군대를 쪼개 호남 평야에서 분탕질치기 시작했고, 이에 전라도 지역의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등 큰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조선 조정은 당시 중국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전라도 지역으로 왜군이 증강되면서 농사를 짓지 못했기에 그러한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을 위해 식량 소비에 사용한 은만 해도 583만 2천여 냥에 달했고, 쌀과 콩을 교역한 은이 또 300만 냥으로서, 조선에 대한 식량 지원을 위해 많은 것들을 퍼주었다.

[명나라 말기(17세기) 1년 예산 : 은 400~500만 냥]

결국 명나라의 도움과 함께 조선군은 후대의 경신 대기근처럼 심각한 대기근의 참상을 면할 수 있었고, 조선군에게 군량이 보급됨으로써 군량 문제 해결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전국에 주둔한 조선군이 모두 풍족했던 것만은 아니고, 평균적으로 보자면 여전히 곤궁하고 피폐했다.

이렇듯 지금까지 흉년과 역병으로 인한 조선 수군의 사망자 및 감염자 관련, 또한 전쟁과 기근으로 인한 군량의 부족으로 인한 백성들과 군사들의 고충과 탈영, 조선 조정의 식량 문제 해결 등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겨울의 추위로 인해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고통받았고, 추위로 얼어서 죽는 군사들 역시 속출하여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 초년부터 조선 조정은 이 문제를 논의했다.

선조가 신하들에게 하문하기를,

"전쟁에 나가 있는 군사들에게 지난번에 옷을 만들어 주라고 명하였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군사들을 위해 귀가리개도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선조의 명으로 조선 조정은 모피(毛皮)를 사들여 귀가리개를 만들었고, 이를 각 군영에 보내 군사들에게 하사하였다. 그러나 전쟁통이라 물자는 한정되어 있었고, 10만이 넘는 조선군을 위한 방한 장비를 만드는 것도 조선으로선 한계였다. 수없이 많은 군사가 얼어 죽었고, 급기야 이런 보고까지 이어졌다.

"추위가 매우 심해서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사들이 거의 얼어 죽고 굶어 죽을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살아 남은 자도 귀신의 몰골이어서 듣는 자들이 모두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창칼에 죽지 않고 살아 남은 목숨들이 또 얼어 죽는 것을 면치 못하는데, 비변사로 하여금 충분히 계획하고 의논하여 속히 처리하게 하소서!"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서는 많은 백성들이 사망했고, 궁궐과 도성을 지키는 군사들도 얼어 죽어 그 시체가 싼더미처럼 쌓이자, 비변사(조선 시대 국방 관련 임시 전담 기구)는 한양에 쌓여 있는 시체를 처리할 방법을 선조에게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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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추위가 닥친 이래 굶주려 얼어 죽은 사망자가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날씨가 풀려 시체가 해동이 되면, 악취가 성에 가득하게 되어 사람이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군사를 차출하여 구덩이를 파고 묻은 다음 그들의 굶주린 넋을 위로한다면 도성 안을 깨끗하게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작업을 하는 우리 군사들도 모두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이니 쌓인 시체를 운반하는 것을 고통스러워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호조(조선 시대 경제 관련 부서)에서 곡식 5~6석을 내어 군사들에게 먹이고 나서 시체를 실어내게 한다면 힘을 다할 것입니다. 속히 거행하게 하소서!"

이렇듯 임진왜란 동안 기근, 역병, 식량, 추위로 인해 많은 백성들과 군사들이 고통을 받고 죽어나갔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 문제로 인해 전쟁 물자에 대한 수요를 만족시켜 줄 순 없었고, 당대 조선인들에겐 임진년 변란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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