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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 전보사건 - 외교의 천재,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사건

|||||||||||||| 2020. 10. 11.

엠스 전보사건 - 외교의 천재,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사건

1. 으르렁대던 프랑스와 프로이센

1848년 12월 선거에서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쿠데타를 일으키고 큰아버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이은, 프랑스의 두 번째 황제로 취임했다. 어린 시절부터 황제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국내 정책과 대외 정책에서 주도권을 쥐고 나서 빈 회의에서의 치욕을 딛고 프랑스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프랑스 민족의 위대함을 역설하며,

"만약 다른 국가들이 어떤 것을 얻으면, 프랑스도 역시 뭔가를 얻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돌아온 나폴레옹 황제'로 여기며 열렬히 환영했다.

이어 크림전쟁,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여하고 세계 각 지역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건설을 위한 노력을 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출하고(베트남-프랑스 전쟁) 중국의 제2차 아편전쟁에 참여하며 미국의 남북전쟁에도 한 발을 걸쳐놓았다.

근데 거의 모든 대외전쟁에서 지거나 / 이긴 전쟁에서는 엄청난 국력 소모를 했다.

예를 들어 미국 남북전쟁에서는 남부동맹을 지원, 크림전쟁에서는 이기긴 했지만 러시아와 원수를 지고,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이탈리아를 도와 이기게 하나 갑작스러운 프로이센의 개입으로,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가 탄생함으로써 위협적인 적을 하나 추가시키는 등등(여기서 이탈리아의 의도와는 달리, 교황청을 독립시키자고 주장, 전쟁에서 이탈리아를 돕고 나서 이기고 나니 적을 만드는, 아주 바보 같은 짓을 한다. 또한 이로 인해 영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금이 가게 됨).. 유럽 대륙 밖의 전쟁에서는 미국 남북전쟁을 제외하고는 승리하나 크나큰 국력손실이 동반되었고, (심지어 이때 '조선'이라는 국가에 천주교 신부의 죽음을 핑계로 병인양요를 일으켰는데 패배하고서 물러난다.)

결론적으로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나라들과는 모두 껄끄럽게 되었고 이미 적대적인 나라들과는 관계가 파탄 났다.

한편, 빈 회의에서 영토를 넓힌 프로이센은 이 시기에 비약적인 영토확장을 꾀하는데,

왼쪽 지도의 진한 보라색 --> 오른쪽 지도의 빨간색의 '북독일 연방'으로 커짐. 노란색은 북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은 남부독일

이는 전적으로 프로이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덕택이었다. 처음엔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던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는 군비확장을 두고 의회와 충돌을 빚었는데 비스마르크와 여러 시간을 독대한 후 '의회와 대립 과정에서 군주를 위험에 놓이게 하느니 차라리 그와 더불어 몰락하겠다'라고 충성심을 보인 그를 재상에 임명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강력한 군대를 앞세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윗 지도의 빨간색 영역을 '북독일 연방'으로 묶는 등 하나의 독일을 위한 작업을 충실히 진행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주변에 이러한 강력한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휴전을 중재하며 라인 강 유역의 영토를 프로이센에 요구했다.(위에서 "만약 다른 국가들이 어떤 것을 얻으면, 프랑스도 역시 뭔가를 얻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고수했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내 꺼는 내 꺼. 니 꺼도 내 꺼.' 라는 것이다.)

빈 회의 때 프로이센에게 베스트팔렌 지역을 떼어준 프랑스는 무언가 아쉬워지자 그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이를 쿨하게 거절하고 대신 네덜란드령 룩셈부르크 지방을 매입하는 것을 용인해줬다. (근데 북독일 연방이 용납하지 않았다.)

여기서 영국의 중재로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이 되지만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비스마르크 또한 나폴레옹 3세가 통일 독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도를 간파하며 서로 사이는 굉장히 나빠졌다. 비스마르크는 언젠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야 됨을 느끼지만 아직 그의 군대가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내치를 다지고 독일 소국들과의 연맹을 공고히 하는 것에 주력했다. 1867년, 비스마르크는 관세동맹을 통해 남부 독일까지도 제도적으로 북독일 연방과 묶게 됐다.

2. 스페인의 국왕 자리와 '엠스 전보 사건'

그러던 어느 날, 1868년 스페인의 이사벨 2세가 혁명으로 실각한 후 스페인 왕위가 공석이었는데 스페인의 혁명 파는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사촌인 '호엔촐레른(Hohenzollern) 대공 레오폴드'에게 이를 계승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이사벨 2세의 초상화

여기엔 다소 복잡한 스페인 왕실의 사정이 있었는데, 스페인의 왕위를 놓고 17세기 말부터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가 경쟁하다가 루이 14세가 자신의 손자인 필리프를 스페인 왕에 밀어 넣고 나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합병하려고 했으나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의 그것과 스페인의 그것으로 쪼개졌다. 하지만 같은 혈연인 만큼 끈끈한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페르난도 7세가 별세하고 갓 왕위에 오른 이사벨 2세의 나이는 불과 '3살'이었다. 게다가 당시 부르봉 왕가의 관습법인 '살리카 법'에 따르면, 여성은 왕위를 승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왕의 삼촌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여왕도 내치, 외치에 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혁명으로 실각했다.

사촌지간인 호엔촐레른 왕조의 '빌헬름 1세'(왼쪽)와 '레오폴드 공'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여러 해 동안 지배를 받던 프랑스 왕가의 인물보다는 새로이 떠오르는 프로이센 왕가에게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당연히 프로이센은 환영의 입장이었지만, 레오폴드 공은 야심이 없는 인물 었는지 이를 쿨하게 거절했다.

근데 뭔가 냄새를 맡은 비스마르크는 이것이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하고, 국왕인 빌헬름 1세의 반대에도 불구, 비스마르크는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 결혼 수락 발표를 해버렸다. (1870년 6월 21일)

여기에 나폴레옹 3세는 당시 방광 결석증으로 앓고 있어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노발대발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프랑스의 서쪽, 동쪽으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70년 7월 11일, 나폴레옹 3세는 라인란트-팔츠(Rheinland-Pfaltz) 주의 작은 마을, '바트 엠스'(Bad Ems)에서 휴양 중이던 빌헬름 1세에게 주 프로이센 프랑스 대사였던 '빈센트 베네데티' 백작을 파견, 여기서 빌헬름 1세가 프랑스의 요청(스페인 왕위를 받지 마라)을 받아들이면서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근데 이 작은 외교적 승리에 도취되었는지, 나폴레옹 3세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이틀 뒤인 7월 13일, 베네데티 백작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 번 빌헬름 1세를 방문하게 하여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호엔촐레른 왕가의 대공이 절대 스페인의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달라.'라고 전달하도록 시켰다.

흰 수염의 빌헬름 1세를 방문하는 베네데티 백작(오른쪽)

요구 자체도 다소 무례했던 데다가, 베네데티 백작은 사전 약속도 없이 아침 산책 중이던 빌헬름 1세를 불쑥 찾아와 불러 세운 것이다. 하지만 빌헬름 1세는 백작의 요청을 최대한 정중하고 우호적으로 거절했으며 이 즉석 회담 내용은 국왕의 비서가 전보로 작성해서 베를린의 비스마르크에게 보냈다.

전보로 보낼 내용을 메모한 문서와 실제 전보 내용

국왕 폐하께서 제게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베네데티 백작이 산책로에서 짐을 가로막더니 상당히 성가신 태도로 '짐은 호엔촐레른 대공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해 다시는 동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전보로 보내도록 윤허해 달라고 요구했소. 그런 식의 약속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만큼, 짐은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소. 물론 짐은 그에게 '짐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고 당신이 파리나 마드리드를 통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우리 정부가 그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틀림없이 알 것'이라고 말했소.'

폐하는 프랑스 황제에게 이번 베네데티 백작의 요청과 그 거절 사실에 대해 양국 대사와 언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해도 좋다고 제안하셨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강경한 반발에 대해 '나는 잘 모르는 바이니 이를 보장할 이유도 없지 않으냐'라고 거절하면서 양국 간의 대화 창구를 열어놓겠다는, 온건한 화답이었어. 하지만 이를 본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입지를 굳히고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좋은 기회임을 포착,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바꿔서 언론에 배포했다.

호엔촐레른 대공의 왕위 계승 포기 소식이 프랑스와 스페인 정부에 전해지자, 엠스의 프랑스 대사가 찾아와 '빌헬름 1세는 호엔촐레른 왕가가 앞으로 스페인 왕위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는 전보를 보낼 수 있도록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폐하는 이로 인해 대사의 접견을 거부했으며 보좌관을 통해 더 이상 프랑스 대사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양국 간의 외교 결례로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인데, 이 내용을 본 프랑스의 통신사 아바(Havas)는 번역 과정에서 두 가지 결정적인 오역을 저질러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프랑스 언론에 실린 그 오역은

  • 대사의 '요구'를 질문(il a exige)라고 오역.
  • 보좌관(adjutant)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썼는데, 이는 독일어로 꽤 고위급의 관리라는 뜻임에 반해, 불어로는 '하사관'을 뜻한다는 점.

따라서 프랑스 언론에서는 '그저 질문을 하러 간 우리나라 대사를 빌헬름 1세가 문전박대한 것은 물론, 일부러 하사관 나부랭이에게 회신을 돌려보네 모욕을 줬다.'라고 실어버렸다. 또한 이 보도가 나간 것은 7월 14일로 이는 프랑스 국경일인 '바스티유 기념일'이었다.

즉, 프랑스인들은 1년 중 가장 애국심이 충만할 시기에 자국의 안보와 관련된 핵심 요구사항을 독일의 국왕이 모욕적으로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한 셈이다.

(나중에 이 오역 소식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내 뜻대로 되었다'며 엄청 기뻐했다고 한다.)

프랑스 시민폭동의 시발점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오른쪽엔 바스티유 광장에 세워진 기념탑

따라서 프랑스 국민들은 모두 화가 났고,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난리였다. 비스마르크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뜨려는 셈이었다.

양국의 국왕, 나폴레옹 3세와 빌헬름 1세는 전쟁을 치르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방광결석 등 개인 건강의 문제와 그 당시 멕시코 공략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음.) 비스마르크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 작은 기회를 빌미로 전쟁을 유도했다. 착실히 군대를 만들어놓은 프로이센에 비해, 프랑스는 전쟁 준비도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었고, 하지만 프랑스는 국민들의 성화에 못 이겨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결과는?

독일의 휴양도시, 'Bad Ems'와 전보사건을 기념하는 표지석

3. 보-불 전쟁과 프랑스의 처참한 패배, 그리고 굴욕..

프랑스의 국민들은 전쟁이 시작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위대한 프랑스 제국의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하길 원했던 거다. 하지만 상황은 반대로 전개되었다.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함에 따라, '관세동맹'이라는 약한 울타리에 묶여 있던 남부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기대한 것처럼 앞다투어 프로이센 측에 붙어 함께 싸웠고, 프랑스는 영국이나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기대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앞서 말한 룩셈부르크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회담 내용을 런던 타임즈에 흘리고 영국은 이에 프랑스 측 및 프로이센 측과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하라는 내용의 조약만 맺었을 뿐 수수방관했다.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프랑스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윗 동영상을 보면 전쟁의 전개 과정을 알 수 있다. 프랑스가 자랑하던 포병 부대는 프로이센의 잘 훈련된 기병대에 의해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프랑스가 극비리에 준비했던 기관총, '미트레이외즈'(Mitrailleuse)

(미트레이외즈는 워낙 극비리에 준비를 한 나머지 막상 전장에 투입되었을 땐 사수 중 아무도 조작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한다.)

프랑스 군대는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에 참패하고 '스당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혔다

포로로 나오는 나폴레옹 3세를 맞이하러 나오는 비스마르크와 둘이 나란히 앉아있는 그림

황제가 포로로 붙잡힘에도, 파리 시민들은 '파리 코뮌'을 조직하고 4개월여간 저항하다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프로이센 군은 파리 시내에서 거리 행진을 벌인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로 취임하는 빌헬름 1세와 흰 옷의 비스마르크

이후 나폴레옹 3세는 폐위되고 프로이센은 알자스-로렌 지방을 먹었으며(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배경이다),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을 갚을 때까지 군대를 프랑스에 주둔시키기로 하지만(프랑크푸르트 조약),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프랑스 국민들은 금, 은, 보석 닥치는 대로 돈이 되는 물건이란 물건을 모두 배상금 갚는 데 사용, 석 달도 안되어 50억 프랑을 모두 갚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이는 나중에 1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 하여금 엄청난 배상금을 빨리 갚도록 독촉할 수 있는 밑밥이 됨.)

보불전쟁 이후 유럽지도. 파란색으로 칠한 부분이 알자스-로렌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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