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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1755년 리스본 대지진

|||||||||||||| 2020. 10. 6.

포르투갈의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신을 믿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에게 정의가 있고 신도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 신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이라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다. - 볼테르

'대지진'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리히터 규모 진도 9(= 교량 파괴, 대형 구조물 파괴)의 강진은 황금의 제국,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덮쳤다. 리스본은 파괴되었고 시민 27만 명 중 최소 2만 5천 명이 사망했다. 가톨릭의 나라, 포르투갈은 이 국가적 재앙을 무엇으로 해석했으며 또한 과연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1. 1755년 11월 1일, 운명의 날 - 땅, 불, 물에 의한 심판

포르투갈의 수도이자 해안도시 '리스본' 은 유럽에서 암스테르담, 런던 다음으로 번창하던 항구도시였으며 브라질을 비롯한 세계 각 곳에서 유입되는 금이 모이는, 거대한 포르투갈 제국의 정신적, 행정적 중추였다. 당시 포르투갈의 왕은 동 조세(D. Jose 1750-1777). 선왕인 동 주앙 5세는 식민지에서 들어온 금을 포르투갈의 경제 부흥에 쓰는 대신 왕실을 치장하고 가톨릭 수도원을 건립하는 데 흥청망청 썼고 그 아들인 동 조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승마, 사냥, 음악회 등의 여흥으로 보냈고 정치는 절대적인 신임자인 총독 카르발류에게 맡겨 버렸다.

기업 활동의 부재는 새로운 부의 창출을 없앴고 리스본의 관문, 타호 강 하구는 단지 유럽의 선진 공업국으로 금을 실어 나르는 배들의 기항지에 불과했다. 리스본에 방문했던 여러 나라의 대사들은 예외 없이 본국에 부치는 보고서에 '포르투갈은 유럽의 미개국이다.'라고 기록했다. 1730년 파리에서 익명으로 출판된 <리스본 도시 해설>이라는 여행기에는 '포르투갈인들은 대단히 질투심이 강하고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으며 앙갚음을 잘한다. 또한 빈정대길 좋아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이유 없이 건방지게 군다. 대부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이다.'라고 쓰여있다.

지진이 덮치기 전 리스본의 모습

리스본에서는 거리마다 성당이나 노변의 십자가, 성지와 마주칠 수 있었고 참회 행진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성직자들은 리스본을 일컬어 '악의 소굴'이라고 끊임없이 비판했지만 이는 독실하고 까다로운 성직자의 눈에 비친 모습이었을 뿐 리스본의 진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톨릭 교회는 포르투갈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조직이었다. 상당한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종교재판소의 법정에서는 모진 고문, 끔찍한 방법을 동원한 사형 집행이 이루어졌다. 포르투갈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20만 명이 수도사였으며 리스본 인구의 10%가 수도사였다.

1755년 11월 1일. 이 날은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 모든 가톨릭 성인을 기리는, 교회력에서 엄격하게 지키는 축일로 이날 하루 동안 모든 경제활동은 중단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아침부터 성당에 모여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리스본에는 40여 개의 성당이 있었고 교구에 속하지 않은 성당도 몇몇 있었다.

오전 9시 40분, 예배가 시작된 직후 바닥이 요동쳤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산산조각 나고 대리석 조각이 천정에서 쏟아졌다. 3분 동안 일어난 2번의 잇따른 지진. 첫 번째 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졌고 첫 지진을 견딘 건물들도 약해진 지반으로 인해 두 번째 지진 때에는 맥없이 무너졌다.

지진은 서곡에 불과했다. 교회를 밝히던 촛불과 주택가의 난롯불은 시내 곳곳에 화재를 일으켰다. 안전한 곳을 찾아 항구 지역의 공터로 몰려간 사람들은 괴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바닷물이 멀리 물러나면서 맨땅이 드러나 옛날에 침몰했던 배와 화물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부풀어 오른 바닷물은 많은 시민들이 피난했던, 새로 지은 대리석 부두를 통째로 바닷속에 가라앉혔다. 90분 후에는 최고 높이 15m에 이르는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와 해안가의 사람들을 덮쳤다.

포르투갈의 남쪽엔 유라시아 판(북쪽)과 아프리카 판(남쪽)이 만나는 지진대가 있고 진앙은 리스본 남서쪽 200km 떨어진 대서양 해저로 추정되었다.

이 해일은 대서양을 횡단하여 10시간이 지난 후, 서인도제도에 도달, 특히 바베이도스와 마르티니크를 강타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이 지진을 감지한 곳은 영국 본토, 아일랜드 남동부, 덴마크 남부, 오스트리아 서부 등이고 그 면적은 육상에서만 128만 km2 였다. 여진은 본 지진 후 6개월간 약 250회나 있었다.

지진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심에는 대화재가 발생, 5일 동안 계속되었다. 건물의 85%가 파괴되었고 이 중에는 왕실 도서관도 있었다. 귀중한 장서 7만 권과 루벤스, 티치아노의 그림들, 포르투갈의 위대한 항해자들이 신대륙 발견을 통해 남긴 소중한 지도와 항해 기록들도 영영 사라졌다. 왕조차 지진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무너져 내린 왕궁 대신 천막에서 거처하는 신세가 되었다. 800년 역사를 자랑하던 리스본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2. 도시의 대혼란과 난세의 영웅, '폼발 후작'

대지진으로 특히 어린이와 여자들이 목숨을 많이 잃었다. 사망자들 중에 귀족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조금 늦게 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폐허가 된 건물 잿더미.. 감옥이 무너져서 죄수들이 탈출했고 약탈, 방화, 살인을 저질렀다. 종말론적 혼돈이었다.

성직자들은 리스본의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외치며 회개를 강요했다. 예수회는 심지어 지진 발생 1주년에 최후의 심판이 도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이는 독실한 신도들의 도시, 리스본 시민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말이었다.

절망에 빠진 국왕은 마침 그의 안부를 알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온 외무대신 카르발류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내리신 형벌에 어찌 대처해야 합니까?"

이에 대한 그의 대답

"죽은 사람은 묻고 산 사람에겐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세바스티앙 조세 드 카르발류 이 멜루.(Sebastiao Jose de Carvalho e Melo) 그는 전직 외교관으로 박력 있고 강인한 성격을 지녔으며 수년간 영국, 오스트리아 주 포르투갈 대사를 지냈었다. 지방 유지 출신인 그가 총독으로 임명되자 많은 귀족의 반발을 샀다. 카르발류는 왕의 권위를 등에 업고 즉시 다른 관료들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는 유능한 정치가였다. 왕은 그를 폼발(Pombal) 후작으로 승격했고 이후 그는 폼발 후작(Marques de Pombal)으로 불리게 된다.(이하 폼발)

절도 있고 현명한 폼발의 대답은 주저앉아 있던 왕이 듣고 싶던 말이었다. 폼발은 곧 폐허 복구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고 지진 피해 수습에 나선다. 그는 우선 리스본 대주교에게 요청, 전통적인 장례의식을 생략하고 시신을 즉시 수장하도록 허락을 구했다. 지방에 주둔하는 군 병력을 리스본으로 불러들여 공포에 질린 시민들을 안정시키고 치안 질서를 유지했다. 또한 약탈자 처벌을 위한 즉결심판제도를 도입, 범죄자를 교수형에 처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시신의 수습은 전염병의 창궐을 막았고 약탈 행위는 뚝 끊겼다. 폼발은 식량 배급소를 세우고 군인들의 감시 하에 식량을 공평하게 배분했다. 지진 피해를 입지 않은 장사꾼들에게는 지진 전의 가격보다 비싸게 물건을 팔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곡물과 생선, 고기를 싣고 리스본에 입항하는 배들은 상품을 헐값에 넘겨야 했다. 서서히 사람들 사이에서 굶주림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하지만 심약한 왕은 리스본을 포기하고 포르투갈 궁정과 수도를 다른 도시로 옮기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왕실 고해 신부들은 이번 재앙이 하느님의 뜻이며 리스본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충고했다. 폼발은 수도를 떠나려는 왕을 설득했다. 리스본을 성급히 포기하는 것은 그동안 포르투갈에 눈독을 들여온 이웃나라 스페인에게 빈틈을 보이는 일이자 해적들에게 리스본을 약탈할 기회를 주는 일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리스본 항을 잃게 되면 동맹국과 외국 상인들의 신뢰마저 잃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많은 식민지들을 함께 잃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런 왕을 기념한다고 리스본 코메르시우 광장에 동상을 만들어놨다. 그래도 이 왕의 유일한 업적은 폼발에게 통치 전권을 위임한 것.)

왕을 가까스로 설득해서 리스본에 남게 한 이후, 폼발은 무너진 리스본의 재건을 위해 도시 계획법을 제정했다. 건물의 소유주들은 파괴된 건물의 수리나 복구를 서둘렀지만 폼발은 새로운 도시계획이 수립되기 전까진 작업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도시건설 총괄 책임자로는 평민 출신의 '마누엘 다 마이아'(Manuel da Maia)를 임명한다. 그의 리스본 재건 제안서는 꼼꼼하고 철두철미했으며 실용적이었다. 옛 리스본의 모습을 똑같이 재건하는 계획부터 폐허 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계획, 도시를 옮기는 계획까지 5가지의 계획을 제안했으며 각각의 장단점을 간결하게 정리했다. 폼발은 이 중에서 잿더미 위에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계획을 선택했다.

(마이아가 건설한 리스본의 수도교. 이 다리는 신기하게도 지진을 견뎌내어 화재를 진압하는 데 필요한 물을 공급하고 생존자들의 식수 공급을 할 수 있었다.)

마이아는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이 제출한 런던 재건축 도면을 구해 이를 바탕으로(결국 런던은 이 도면대로 재건축되지 못하였다) 기하학적이고 반듯한 직선 모양의 도로, 대칭적 건물, 거대한 광장으로 리스본을 설계했다. 모든 건물의 높이는 4층으로 통일됐으며 행인과 마차를 위해 도로는 넓게 만들었다. 건물들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외양에 똑같은 형태의 문과 발코니, 주춧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규격화된 건축 자재를 미리 만들어둘 수 있었다. 건물들에는 작은 변화를 줌으로써 지나친 단조로움을 피하고 도시 광경 전체에 역동성을 심었다. 폼발의 법령에 따르면 부동산 소유주들은 과거 주거지 면적에 비례하여 집을 짓되 당국의 공식적인 설계에 따라 5년 안에 재건축을 마쳐야 했다.

건축기사 중 산투스는 지진 내구성을 갖춘 건물을 짓기 위해 두 가지 독창적인 방법을 고안해냈다. 하나는 전통적인 돌 지반 대신에 목재 더미를 땅 속에 쌓은 후 그 위를 소나무 줄기로 엮은 덮개로 덮어 건물을 불안정한 지대 위에 살짝 떠 있게 하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무를 엮어 만든 틀을 건물 석벽에 내장하는 것이었다. 가이올라(Gaiola)라는 이름의 이 틀은 여덟 개의 삼각형으로 짜여 직사각형을 이루어 높은 압력에도 견딜 수 있는 탄력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진 내구성을 가진 건축법이 처음 마련되었다.

('새장'이라는 뜻의 가이올라(Gaiola))

하지만 이는 곧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반발을 샀다. 그들은 집으로 평민들과 차별성을 두어야 했기에 건축의 통일성에 반대했고 건물의 소유주가 귀족임을 나타내는 어떠한 표시도 건물 벽면에 부착하는 것을 금지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성직자들은 복구사업에 참여하기보다 회개와 기도를 강조했다. 신의 진노가 또다시 임하기 전에 어서 빨리 도시를 탈출하라고 외쳤다. 대주교는 사제들의 선동을 중지시키라는 폼발의 요청을 무시했다.

또한 도시 중심지에는 리스본이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재건축되리라는 소문이 퍼지자 옛 집터를 잃게 될까 염려한 사람들이 폐허가 되어버린 자신들의 집터 위에 임시 건물이나 천막을 짓고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폼발은 1755년 12월 지진 파괴 지역에는 임시 건물을 비롯, 어떤 형태의 건축물도 세울 수 없다는 칙령을 포고하고 수백 명의 군인으로 무단 거주자들을 모두 몰아냈다. 도시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부에서 그 소유권을 사들여 사회적 지위에 맞게 원하는 대로 집을 지을 수 있는 리스본 근교로 이주하도록 했다.

폼발은 "리스본이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은 기도가 아닌, 인간의 창의력" 이라며 지진의 피해를 조사, 지진의 얼마나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어떤 구축물이 피해를 입었는지와 인명 피해는 어떤지에 대해 파악하였다. 귀족들의 반란 직전 음모자들을 체포했고 계속 선동을 일삼는 예수회에겐 예수회를 포르투갈에서 추방하는 법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맞섰다. 결국 대주교는 '재앙과 신의 섭리는 상관이 없다.'라고 선포하였는데, 그 바탕에는 분노한 신도들의 영향도 있었다. 폼발은 귀족 견제, 정교분리, 예수회 추방, 노예제 철폐, 군대와 교육 개혁 등 근대 국가의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이는 계몽적 지도자의 면모에 걸맞은 것이었다. 엄청나게 거대하고 복잡한 공공사업이었던 리스본 재건은 비록 민주적인 과정은 아니었지만 그 결실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다.

(리스본의 폼발 광장에 있는 그의 동상. 밑에는 지진 복구에 힘쓰는 시민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3. '재난관리', '도시 재건' 개념의 탄생과 계몽주의

리스본 시내의 전경

이런 유럽의 대도시가 지진에 의해 파괴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폼페이가 있긴 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폼페이란 도시의 존재 자체를 몰랐었다.) 특히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이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다. 서서히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 대신 인간의 자유의지와 과학적 탐구정신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왕실과 친인척 관계로 이어진 여러 나라의 왕실, 리스본에 돈을 투자했고 건물과 땅을 소유한 상인, 무역업자들은 구호물자와 금, 은을 보냈다. 심지어 오랫동안 앙숙지간이었던 스페인 왕실도 그간의 역사적인 갈등을 초월해 마차 넉 대분의 금을 보내왔다. (물론 원조를 제공할 의사가 있음을 전달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프랑스의 루이 15세 같은 인물도 있긴 했지만..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리스본 지진이 그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에 불과했다. 엄격한 칼뱅교도들이었던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지진이 구교도인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응징이라며 아무런 원조도 하지 않았다.)

재난의 극복은 교회에서 국가 중심으로 바뀌었고 포르투갈 전역에 걸쳐 다음번 지진에 대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리스본 대지진의 수습과정을 보며 많은 유럽 국가들은 사회제도와 도시를 재정비했다.

('국제재난구호'라는 개념과 '지진학'이라는 학문이 처음으로 탄생했고, 폼발은 근대 재난관리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당시 유럽에 만연하던 사상은 '낙천주의' 였는데 이는 '이 세상은 가능한 최선의 세계 중에서도 최선의 상태로 되어 있으며, 악이라는 것도 신이 선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다.'는 라이프니츠의 책, '변신론'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사망하는 엄청난 재앙 앞에서는 공염불이나 다름없었다.

유럽의 대표적인 지식인, 볼테르는 낙관주의 철학을 조롱하는 시, '리스본 재앙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이 시의 부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다는 원칙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는 '모든 불행의 시작이 신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이라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장 자크 루소('자연으로 돌아가라'의 그 루소)는 재앙의 원인을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규명하는 최초의 글을 쓰며, '지진의 피해는 자연이 인간에게 준 재앙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자연을 거슬러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라고 규정했다. 엠마누엘 칸트도 지진을 도덕적 타락에 대한 신의 응징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겨우 여섯 살이던 괴테도 훗날 '사도신경 첫머리에 따르면 천지의 창조주요, 전능하신 천주 성부이신 하느님은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분이다. 그런데 파멸의 신처럼 의로운 자와 부당한 자를 무차별적으로 버리시는 것을 보면 절대 그렇게 자비로운 성부는 아니셨다. 성경에 정통한 현자들 사이에서도 이 재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어린 소년의 마음이야 오죽했으랴.'라고 회상했다.

이처럼 유럽 지성인들에게 리스본 대지진은 사상의 대전환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리스본 에드워드 7세 공원의 대지진 추모 조형물. 승리의 월계관과 지진 때의 잔해물로 만든 탑이 있다.

 

4. 포르투갈에서 쫓겨난 예수회와 '말라그리다 신부'

포르투갈에서 예수회 사제들은 궁정의 도처에 포진해 왕실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식민지에서 선교활동뿐 아니라 불법적인 상업활동도 벌이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건물과 토지, 자선시설, 대학, 농장을 소유한 예수회는 한마디로 다국적 조직이었다.

지진이 일어나자 그들은 "이제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속죄하라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자들이여, 두려워하라!"라고 외치며 요한계시록을 제멋대로 갖다 붙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리스본을 빠져나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은 리스본을 복구하는데 꼭 필요한 일손들이었다. 브라질의 금을 보관했던 주조소가 건재한 사실도 성직자들에게는 '금과 은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그들을 능히 건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스바냐서의 구절을 인용한, 비꼼의 대상일 뿐이었다.

예수회 미화의 끝을 보여주는 영화, 'The Mission'

사제들 중에서도 리스본 시민들을 가장 맹렬하게 나무랐던 사람은 바로 가브리엘 말라그리다(Gabriel Malagrida) 신부였다. 그는 이탈리아 예수회 신부로 리스본에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1721년 그는 복음을 전파하고 원주민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리스본을 떠나 브라질로 갔다. 30년 동안 그는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호전적인 원주민과 숨 막히는 열대지방 더위와 질병에 맞서 싸우는 성자 같은 인물로 명성을 쌓았고 이런 그를 다시 리스본으로 부른 것은 포르투갈 왕실이었다.

말라그리다는 리스본에 지진이 일어나자

"이는 혜성, 별의 문제도 아니오, 자연적으로 일어난 현상이 아닙니다. 이는 오로지 우리의 씻을 수 없는 원죄로 인한 것입니다. 이 재앙으로 얼마나 많은 죄인들이 지옥으로 떨어졌습니까? 막사와 새로운 건물을 지으려는 자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딴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주인이 오직 하느님뿐임을 정녕 모른단 말입니까?"

라며 지진이 하느님의 징벌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의 소책자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한다. 리스본 재건에 방해가 되는 그를 동 조세 국왕은 폼발의 말에 따라 세투발로 유배 보냈지만, 말라그리다는 잠자코 있지 않았다. 더욱이 포르투갈의 학교는 거의 다 예수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당시의 인문과학 교육에 대해서 접할 기회가 없었다. 재앙을 자연과학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경시되었다.

리스본을 재건하는 데에 눈엣가시가 된 그를 폼발은 '타보라 사건'을 누명 씌워서 감옥에 가둬버리는데..

'타보라 사건'이란?

1758년 왕의 마차가 3명의 말을 탄 사내의 습격을 받고 왕이 그들이 쏜 머스켓 총에 팔과 어깨를 다치자 폼발은 첩보에 의해 그들 중 2명을 검거, 모진 고문 끝에 타보라 후작의 이름을 자백받고 그들의 음모를 낱낱이 밝히기 위해 1년 동안 감시, 그 결과 타보라 후작 부부가 아베이루 공작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꾸민 짓이란 걸 알게 된다. 타보라 후작, 아베이루 공작은 예수회 수사 13명과 함께 체포, 혐의자들은 능지처참형, 화형, 참수형에 처해지고 음모에 가담한 예수회 수사들은 투옥되었다. 말라그리다는 타보라 후작부인의 고해 신부였고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벨렝 탑의 지하감옥에 투옥된 후, 감옥에서 필사한 책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이단 취급을 받고 화형에 처해진다.

화형 당하는 말라그리다 신부와 그가 갇혔던 벨렝 탑

이를 계기로 폼발의 포르투갈 정부는 예수회 소속 학교들을 폐쇄했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국왕 시해 음모가 일어난 지 정확히 1년 뒤, 폼발은 예수회를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 보호령에서 추방한다는 법령을 포고하고 예수회 사제들을 모두 체포, 허름한 배에 태워 교황이 통치하는 지역인 교황령으로 추방한다.

가톨릭에서는 말라그리다 신부를 순교자로 인정하고 있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투옥된 말라그리다는 정신이 이상해져서 자기가 제2의 세례 요한이라느니, 성모 마리아가 자신에게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서술하라고 시켰다느니, 지옥문을 지키는 세 자매 중 한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폼발은 그의 리스본 재건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이었던 말라그리다를 다른 예수회 사제들과는 달리 계속 유폐시켜 놓았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녀 안나의 '자궁'에 대한 외설적이고 병적인 집착을 보였다... 가톨릭에서는 '그건 고령의 노인이 치매에 의해서 헛소리한 것이다.'라고 실드를 치고 있지만..?

이탈리아 메나지오에 있는 말리그리다 순교 기념비

타보라 사건은 나중에 동 조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마리아 1세의 지시 하에 재조사를 해서 폼발이 귀족세력 중 정적과 예수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사건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폼발은 유죄를 선고받지만 고령이라는 이유로 시골 영지로 추방되었고 궁정 100 km 이내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영웅적인 업적에 비해 말년은 초라했다.)

마지막으로 대지진의 영향을 무사히 피해 가서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감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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