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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때 일본은 어떻게 선진국 반열에 올랐을까?

|||||||||||||| 2020. 8. 21.

1854년 일본은 미국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개항을 당하게 되었다. 자칫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 오히려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칸막이식 자본축적이라는 서구 열강의 자본축적과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하게 되었다.

미쓰이 로고
미쓰비시 로고

일본 정부는 당시 4대 재벌이었던 미쓰이, 미쓰비시, 야스다, 스미토모를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해주며 고정자본이 소요되는 업종을 담당시켰다. 재벌 즉 대자본과 중소자본 간에 철저하게 장벽을 설치해서 상호 간의 영역에 대해선 건들 수 없도록 만들었다.

즉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었고, 중소기업 역시 대기업의 업종을 절대로 잠식하지 못하게 했다.

물론 일본 정부의 재정적인 혜택은 대기업 한정이었고, 중소기업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단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중소기업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준수하게 시켰다. 이에 중소기업은 대기업으로부터 침입이 차단되어 보호무역으로 방어된 벽 안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며 발전이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특히 개방 후에 유입된 공업제품의 수입이 급증하였지만, 당시 수입되는 제품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 착안하여 농촌의 풍부한 저임금 노동자를 이용하여 그대로 모방을 했다. 결과적으로 노동집약적 공업이 가능해지고, 수입대체산업이 발전하면서 국제수지가 크게 개선되며 분리된 두 자본 모두 자본축적을 달성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1차대전

1914년 발발한 1차 대전은 재발과 중소기업의 두 자본을 비대하게 축적시키는 요인을 재공 하게 되고, 군수산업을 주축 산업으로 내세우며 전쟁 경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당시 선진국이 전쟁에 전념하는 바람에 비어있던 중국과 인도시장에 상품을 대량 공급하면서 지속적인 무역흑자를 달성하게 되었다.

당시 수출/입 내역, 단위 : 1000원

전쟁 발발 이듬해인 1915년부터 수출이 증가하였고, 수입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무역흑자가 꾸준히 증가했다. 단 전쟁이 종료된 1919년엔 다시 적자로 돌아섰고 이후 적자폭이 계속 증가했다. 1921년 무역이 크게 감소하면서 일본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영국, 프랑스 같은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시장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고, 중국과 인도는 일본보다 저렴한 임금을 활용해서 우수한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일본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선진국들이 넓은 식민지를 유지하며 보호무역을 고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식민지가 협소했던 일본은 어려움이 심했고 경제발전 이후 첫 번째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결국 1927년 히로베은행, 와타나베 은행을 시작으로 은행의 연이은 휴업이 시작됐고, 이후 두 달간 27개의 은행에서 고객에게 예금지급을 중단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일본 정부가 직접 개입, 은행 간 합병을 유도하여 1918년 2280개였던 은행을 1930년 910개로 감소시키고 대형화 전문화시켰다.

또한 부실은행을 4대 재벌에게 인수하게 하였고, 산업자본에 지나지 않았던 일본의 재벌이 금융자본을 인수하며 독점자본으로 변신, 더욱 거대화 됐다.

뿐만 아니라 임금을 인하시키고 생산량을 감축하며 경영합리화를 꾀했으나 근본적인 타개책이 되지 못하자 결국 50년간 유지되어 왔던 칸막이를 무너뜨리고 중소기업을 계열화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모든 중소기업을 대기업이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기업에 흡수되지 못한 경쟁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을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으로 진출시켰다. 또한 일본의 독점자본이었던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와 중견 재벌들이 진출하며 조선에서 기업활동을 했다.

시대의 흐름을 발 빠르게 감지하고 그 흐름 한가운데에서 활로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일본 정부는 전문적인 경제학자조차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대자본을 축적하여,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빠른 성장을 하게 되고, 부단한 국력신장을 통해 군사력 또한 크게 신장했다.

그 결과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되어 핵을 두방 맞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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