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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왕의 북벌 추진과 신하들의 반대

|||||||||||||| 2020. 10. 16.

조선 시대, 왕의 북벌 추진과 신하들의 반대

『성상(임금을 높이 부르는 말)이시여, 고구려를 침공하다 패퇴한 당 태종의 고사를 잊으셨습니까!』

중국 당나라 황제, 태종 이세민

당나라 황제 이세민은 청년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수나라 말기의 여러 전장을 누비며, 마침내 통일 제국 당나라를 세우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세계 제국 당나라의 전성기 당시 영향력

이세민은 수나라 말기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나타난 여러 군웅들을 토벌하였고, 또한 돌궐을 정벌하고 서역을 원정하는 등 제국의 영향력을 서북방 변경에 떨쳤다. 그러나 이세민은 자신이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한 사업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고구려 원정'이었다.

그는 10만여 명이 넘는 대병으로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고, 천하의 뛰어난 무장들 역시 원정에 참여하였다. 물론 이때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방어선이 붕괴되는 등 막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이세민은 안시성 싸움에서 소득을 올리지 못하고 회군하는 등 자신의 무공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안시성 싸움

이 고사는 훗날 조선 시대에도 많이 회자될 정도였고, 여기서 성종 시대의 신하들은 성종의 북벌을 반대하기 위해, 이 유명한 안시성 싸움 고사를 인용하게 된다.

조선 성종 대왕

성종 시대의 조선은 유교 정치가 활성화되고, 의식주가 크게 안정되는 등 평화로운 시대였다. 조선 역사상 최대의 태평성대였으며, 이러한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국방 기강은 해이해졌다. 변방의 장수들은 여진족에게 뇌물을 받거나, 남부 지방의 청년들은 군대를 회피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해 대신 입대하게 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올량합 여진족 3천여 명이 조선의 변경 요새인 의주를 습격하여, 목책을 불태우며, 또한 조산보 일대를 공격해 조선 군민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성종은 매우 분노하며 치를 떨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친정할 의사를 표방하기도 하며, 또한 북벌을 추진하여 여진족을 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성종이 신하들을 모두 소집해 선언하기를,

"국가에서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였으니, 오랑캐의 죄를 심문하는 용맹스러운 거사를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이다. 오랑캐의 죄를 심문하기 위해선, 군사가 1만여 명 이하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니, 군사는 많은 것이 가하다!"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여 용맹스러운 군사를 발동시키기로 하였으니, 성상 전하의 이와 같은 결단은 참으로 용맹하신 결단이옵니다."

그리하여 허종이라는 사람을 북정도원수(북방 원정의 임무를 맡은 원수)로 임명하였다. 이때 많은 신하들이 성종의 기세에 눌려 북벌에 찬성하였으나, 홍문관 부제학 김심이 상소를 올려 북벌에 반대하였다. 또 김심 주변의 선비들도 북벌에 반대하는 뜻을 밝혔다.

"(중략) 지금 북방 정벌에 뜻을 결정한 것은 성상께서는 반드시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하고 장수가 현명하니 반드시 이 큰 일을 끝낼 수 있을 것이고 보잘것없는 작은 오랑캐는 평정할 것도 못된다고 하겠지마는, 그러나 당 태종은 무용이 뛰어난 군주로서 천하의 군사를 일으켰으며, 장수는 이적 · 이정 · 설만철 · 도종 · 장량 · 설인귀 같은 사람은 모두가 세상에 여간하여 나오지 않는 인재인데, 이 같은 세력으로써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새 알을 누르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 태종은 안시성이라는 조그만 성에 시달려 기세가 꺾여 패전하고 돌아가서 천하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무기는 흉한 기구이고 전쟁은 위태한 일이므로 진실로 쉽사리 말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장수의 재능과 군대의 힘은 당나라에 미치지 못한데도 오랑캐 땅의 험준한 것은 안시성보다 못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이에 성종이 이르기를,

"이미 과인의 뜻은 그대들도 잘 알았을 것인데도 너희들은 자신의 주견을 돌이키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성종은 홍문관 부제학과 선비의 반대 상소가 있든 말든, 허종에게 4만의 대군을 안겨 대규모 원정을 지시하였다.

"저 미개한 오랑캐 놈들은 마땅히 짐승과 금수처럼 길러야만 한다. 저놈들은 흉악이 극도에 이르러, 우리 변방 백성을 살해하여 죄악이 천하에 가득한데, 나는 국가 신인의 분노에 의지하여 저들의 죄를 추궁하는 용맹스러운 거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의 파저강 토벌(군사 1만 5천여 명 동원)

우리 세종 대왕께서는 이미 천하의 병마를 일으켜 저들의 파저강 소굴을 소탕해 목을 남김없이 쳐버렸고, 세조 대왕께서는 용맹스럽고 날랜 군사로 건주 여진을 공격해 저들의 소굴을 분탕 하였다.

세조의 건주 여진 토벌(건주 여진은 훗날 청나라의 창업 계통이자, 누르하치 소속) 북정 도원수 허종은 듣거라, 그대는 의정부(조선 시대 최고 행정 기관)에 있으면 요숭과 송경의 업적을 이룰 수 있고, 그대가 변방으로 나아가 군사들을 지휘하면, 위청과 곽거병의 위대한 훈공을 이룰 수 있으니, 그대는 여러 오랑캐를 굴복시켜 나의 위령을 천하에 통달하게 할지어다!"

* 요숭과 송경 : 당나라 현종 때의 현명하고 유능한 신하

* 위청과 곽거병 : 한나라 무제 때의 흉노 토벌에 큰 군공을 세운 뛰어난 무장

그리하여 북정도원수 허종이 이끈 4만의 조선군이 국경을 넘었으나, 여진족에게 있어선 악명 높은 조선군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마을을 폐쇄하고 멀리 도망갔다. 이러다 보니 조선군도 이들을 잡을 도리가 없었고, 조선군이 거둔 성과는 겨우 여진족 7명의 목을 참수한 것이 고작이었다.

전투 과정에서 조선군의 사상자는 없으나, 정작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해 사상자가 늘어났다. 그리하여 수십여 명이 얼어 죽었다고 하며, 이 원정에서 7만여 석의 막대한 곡식과 재정을 소모하는 등 원정의 성과는 미미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정을 이끈 허종은 자신의 전과를 과장해서 보고하니, 이 원정은 성종 시대의 숨겨진 흑역사였다.

"세종께서 날랜 군사를 발동해 파저강의 오랑캐들을 쓸어버리고, 세조께서 건주 여진의 본영을 습격해 이만주 부자를 참살하고 저들의 수급을 수없이 거두었지만, 왜 나는 선왕의 무략에 미치지 못하는가!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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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를 일으키는 행동을 경솔히 하지 마시옵소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사옵니다.』

연산 재위 시기의 조선의 변방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1499년(연산 5)에 여진족 기병 수십여 기가 삼수군을 침범해 조선인 7명을 살해하고, 남녀 33명과 소와 말 10여 마리를 노략질하는 등 국경에서 여진족의 약탈과 습격이 횡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접한 연산은 크게 분노하며 이르기를,

"변방 방어의 임무를 소홀히 한 장수들을 모두 처벌하였으되, 오히려 징계가 되지 않고 변방의 환란이 이와 같이 끊어지지 않으니 도대체 이것은 웬일인가? 이는 반드시 변방 장수가 방어를 소홀히 한 때문일 것이므로 한 사람을 엄중히 징벌하여 경계코자 하니, 의논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연산은 서쪽 오랑캐들을 정벌한다고 교외에 선언하였고, 우의정 성준과 좌찬성 이극균을 서정(서방 원정) 장수로 임명, 서정도원수(서방 원정의 임무를 맡은 원수)를 새로 선발하였다.

서방 원정의 임무를 맡은 장수들이 말하기를,

"신 등을 서정 장수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국가가 오랑캐들에게 욕을 당한 것이 여러 차례이므로 조정에서 모두 통분하니, 성상의 진려가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세종조에 최윤덕 등이 장수가 되어 정벌하려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불가하다고 하였사오나, 세종께서 독단하여 최윤덕의 계책을 좇으셨고, 그때 황희는 변방의 경계를 물리자고 하였으나, 세종께서 또한 독단하여 김종서의 계책(6진 개척)을 좇으셨습니다. 황희는 어진 재상이었으나 변방의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계책이 보잘것없었으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오서 대사를 거행하려면 변방의 사정을 잘 아는 주장의 말을 따라야 하오며,

세종 대왕과 성종 대왕처럼 이번 원정은 전하의 결심과 독단하기에 달렸사옵니다!"

이어 서정 장수들이 계속 말하기를,

"청컨대 군사 2만 명, 내금위 70명, 겸사복 20명, 우림위 10명을 주시옵소서! 서방 원정의 과업을 반드시 완수하여, 변방을 걱정하는 전하의 시름을 덣어드리겠사옵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 선비들의 반대가 무척이나 심했기 때문이다. 곧 문신 관료와 선비들의 집단 반발이 이어졌다.

위에서 성종의 북벌을 반대한 홍문관 부제학 김심의 상소를 언급했는데, 연산 시절 당시에도 김심은 북벌을 반대했다. 신수근, 유순, 김심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오서 대군을 동원해 저들의 소굴을 분탕 하여 노약자를 참하거나 사로잡는다 하여도, 소득이 그 손실을 보충하지 못할 것이며, 또 오랑캐들이 훗날을 모의(거사)할 것은 필연의 형세입니다!"

강귀손과 한사문이 아뢰기를,

"서방 변경에서 오랑캐들이 독기를 부리니, 마땅히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야 하오나, 혹시 형세가 이롭지 못하면 한갓 군사를 괴롭히고 재물만 손상시킬 뿐입니다!"

안처량, 홍흥, 이계남이 아뢰기를,

"저들이 누차 변경을 침범하였으니, 마땅히 대거 출동하여 바로 그 소굴을 두드려야 하지만, 군사를 일으킴은 대사이므로 경이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집, 이복선, 정숙지, 민사건 등도 아뢰기를,

"근래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산이 펴지지 못하고, 변방의 곡식도 넉넉지 못하니, 작금의 상황에서 서방 정벌은 옳은 것이 아닌 줄 아옵니다."

이창신이란 신하는 중국 한나라 역사를 인용하며, 서방 원정에 반대하였다. 이렇듯 곳곳에서 반대가 이어지자, 연산은 원정의 뜻을 굽히게 되었고, 마침내 이 원정은 실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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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군사와 백성이 피폐하온데, 또다시 대군을 일으켜 나라를 지치게 할 것이란 말이옵니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혼란스러운 조선의 정세를 이용해 여진족의 남하가 시작됐다. 또 이 당시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이 강성해지고 있었고, 건주 여진은 압록강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조선과 접촉하기도 하였으며, 주변의 여진 부락들은 조선의 국경을 약탈하고 습격했다.

조선의 노토 부락 토벌전(선조 시대)

이 과정에서 변방의 장수였던 윤승훈은 선조에게 북벌 계책 15조항을 올렸었고, 선조는 윤승훈의 북벌 계책을 높게 칭찬하며 북벌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다.

또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선조는 국방력 강화를 실감했는데, 변방으로 화기를 운송하면서 여진족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선조 자신은 이미 화기 덕후가 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임진왜란 때 자신이 직접 총도 만들었다(물론 사관은 왕이 무기를 만드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신랄하게 까댔다...).

선조가 직접 총을 만들어 유성룡에게 이르기를,

"조총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전하기가 쉽지 않아서 혹시라도 선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과인이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정체가 뭘까?)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유성룡)에게 보내니, 과인이 만든 총을 보고 한번 웃기 바란다."

한편 선조는 여진족의 남하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남부 지방에서 화약을 구워 변방으로 운송했고, 화기와 조총 등을 보급했다. 한편 윤승훈은 북벌 계책을 계속 올렸고, 선조가 중간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선조도 사실상 북벌로 마음이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북벌은 곧 천하 대사이다. 포수를 동원하지 않으면, 이번 거사 자체가 불가능하다."

선조는 이번 북벌에서 포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화기 덕후인 선조는 변방의 경포수 수백여 명을 북벌 부대로 편성시켰다. 이때 사헌부 소속 관원들이 북벌 반대 의견을 설파했다.

"근래 오랑캐들이 날뛰며 누차 변방을 진동시켜 우리의 변방 백성을 약탈하고 성곽을 함몰하니, 이대로 계속 놔뒀다가는 훗날의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산천은 험하고 도로는 머니, 오랑캐 소굴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병가에서 꺼리는 바입니다. 혹시라도 그들의 흉계에 빠져 으슥한 곳에서 복병을 만나 공격을 받게 되면 순식간에 성패가 판가름 나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도 한심합니다! 북벌에 대한 거사는 우선 정지하소서."

선조가 반박하기를,

"북방 오랑캐를 정벌함에 있어서, 계책이 이미 정해졌다. 다시는 그 따이 말로 논의하지 말라."

1599년 7월 24일, 또다시 사헌부의 관리들이 잇따라 북벌의 거사를 정지할 것을 아뢰니, 선조가 반박하기를,

"이미 형세를 보건대 모두 토벌할 만하다고 하였다. 군사를 발동시키는 것은 정지할 수 없다. 대개 토벌하지 않으면 오랑캐들이 군사를 나누어 번갈아 나와 동서로 공략할 것이며, 우리는 방어하기에 어려워서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적은 힘들이지 않고 우리를 제어하고 우리는 스스로 지탱해 내지 못할 것이니, 오늘의 사세로 보아 거사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북쪽 오랑캐를 섬멸하고 백두산에 비를 새긴다 하더라도 걱정은 우리에게 있지, 저들에게 있지 않다. 북벌의 계책을 반대하는 사헌부의 뜻을, 과인은 윤허하지 않는다."

한편 선조는 비밀리에 북벌에 찬성하는 장수들을 만나, 노토 부락의 형세와 지리, 무기 마련과 군량의 선정 및 보급, 군사의 발동과 관련하여 큰 관심을 가지며 몇 날을 거치며 상세히 논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선조의 북벌이 추진되었다.

5천의 정예 기병과 수백여 명의 포수가 동원된 이번 북벌에서, 조선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각 여진 부락의 여진족들은 놀란 나머지, 일시에 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여진족들은 너무 급한 나머지 살림살이와 가축 및 잡물을 미처 갖고 가지 못했다.

조선군 사령관은 여진족의 곡식이나 각종 농기구와 무기들은 불을 놓아 태우도록 명하였다. 또한 여진족들의 집을 불태우라고 명했는데, 당시 여진족은 흙을 발라 불에 타지 않게 하였기에, 조선군 중 도끼를 가진 자들이 집을 다 때려 부수고 다시 불을 놓았는데, 이렇게 되자 여진족들의 집은 활활 탔고, 조선군은 집 한 칸도 남기지 않았다.

한편 조선군은 장주 부락에서 마을 외 부락까지 무려 1천여 집의 여진족 집을 한꺼번에 태워버렸고, 실록의 현지 사령관의 묘사에 의하면,

"오랑캐들의 집을 한꺼번에 태워버리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고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배가 되었습니다."

활활 타는 모습을 보면서 사기가 올랐다고 할 정도다. 당시 여진족은 산 위에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었고, 게다가 조선군은 여진족이 파묻은 곡식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고 곳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또한 다시는 이 인근의 여진족들이 재기할 수 없게, 강에다 독을 풀었고, 현지 사령관의 묘사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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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북벌에서 여진족 1만여 명이 조선군에게 학살, 사망했으며, 조선군은 큰 피해 없이 회군하여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왔다. 회군하는 도중에 인근 여진족들이 분노하여말을 타고 기습했지만, 조선군 포수대가 여진족 기병 수십여 명을 사살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이후 선조 집권기의 조선 조정에서는 제2차 여진 토벌 계획이 나오기도 했으나, 선조가 기운이 쇠약해지고, 추진하기도 전에 일찍 죽는 바람에 실행되지 못했다. 한편 선조는 여진족의 보복에 대해서 철저한 것으로 유명한데, 니탕개가 2~3만여 명의 여진족 기병으로 조선을 침공하자, 선조는 신립을 보내 재빨리 막아냈다. 방어에 성공한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금득탄 등 여진족 소굴 700여 굴을 초토화시켰고, 한편 여진족들이 이후 녹둔도를 습격하여 조선인 10여 명을 살해하자, 선조는 2천5백여 명의 경장사와 토병 군대 등을 보내 여진족 머리 350여 급을 베고, 여진족 산채 200여 채를 불태웠다. 후일 선비들이 선조에 대해 논평하기를,

"선조 대왕께 오선 북로(북쪽 오랑캐, 여진)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남쪽 오랑캐, 왜구)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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