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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초기 부국강병을 꿈꾼 군주와 관료들

|||||||||||||| 2020. 10. 15.

조선 시대, 초기 부국강병을 꿈꾼 군주와 관료들

고려 말기, 이성계의 활약

고려 말기, 수없이 많은 이민족의 준동으로 고려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홍건적 20만의 침공으로 고려 왕조는 수도가 함락되기도 했고, 왜구의 계속된 침공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해안가 지방이 쓸쓸해졌고, 내륙 지방까지 왜구가 준동했다.

그때마다 고려 왕조는 이성계를 찾았으니, 이성계 군대는 이 난세에서 그야말로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1380년, 이성계가 이끈 친병(親兵)이 황산에서 1만여 명의 왜구를 대파했는데, 고작 70여 명의 왜구가 살아서 도망쳤다.

이성계는 항상 출정할 때마다 전장에서 소라로 만든 군사 악기를 부르게 했는데, 이는 이성계 군단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저 소리는... 이것은 이성계의 차거(硨磲)로 만든 소리다!"

이성계 군단의 군사 악기 소리만 들어도 왜구는 줄행랑을 치기 일쑤였다. 반면 변방 지역의 고려 군사들과 백성들은 이 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이것은 이(李) 장군이 이끈 군단의 소리이니, 이제 우리는 살았도다!

이(李) 장군이 이끈 군대는, 필시 변방 백성들의 소망이로다!"

이성계의 군대는 함경도 동북면 변방 지역의 고려인들과 함께 여진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성계 밑으로 수없이 많은 고려인들과 여진인들이 이성계의 군대가 되기를 주청 했고, 이성계는 고려인이든 여진인이든 너그럽고 인자하게 대하며,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아아, 태조(太祖 : 이성계)의 무략과 덕이 변방을 넘어 저 먼 사해까지 미치니, 사방의 오랑캐들이 태조의 앞에 무릎을 꿇어 스스로 복종하기를 자처하는구나."

여진족 출신인 이지란은 수백여 명의 여진인들을 데리고 이성계에게 내부 하였고, 이지란 휘하의 여진인들은 이성계의 든든한 전력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조선 창업의 큰 공로를 세운 정도전, 그리고 당대 뛰어난 무장 이성계의 만남

"훌륭합니다, 이(李) 장군.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성계의 군영을 방문한 정도전은, 엄숙하고 잘 정돈된 이성계의 병사들을 보며 감탄했다.

제1차 요동 원정에서 요동성을 함락시켜 요동 땅의 심장부를 밟은 이성계였지만, 제2차 요동 원정에서 왕명을 거역하고 고려 왕조를 향해 칼끝을 돌렸다.

"내가 이(李) 장군을 요동으로 보냈으니, 그것은 북방의 큰 감응이로다!"

「고려 공민왕」

이성계의 요동 원정(제1차 요동 원정, 1370년 전역)

이성계의 킹메이커인 정도전은 창업의 뜻을 열었고, 이성계의 일파들은 고려의 권력을 하나씩 장악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고려 조정에 가득 찬 이성계 일파들은 고려의 마지막 군주인 공양왕을 폐위시켰다.

"폐주 정창군 요(공양왕)는 나와서 왕대비 마마의 교지(폐위)를 받아라!"

옥새가 이성계 일파에게 넘겨졌고, 이들은 이성계 집 앞으로 찾아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억조창생이 한결같이 바라는 바, 공(公)께서 부디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어주소서!"

이성계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이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가 옥새를 이성계 집의 마당에 놓았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왕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미 고려 왕조의 역대 왕들은 그 덕을 잃었으니, 성상(임금을 높이 부르는 말) 전하께오서

해동(海東) 천하에 새로운 왕업을 열어 신민들을 어루만져야 하옵니다!"

조선 개국사를 다룬 뛰어난 작품, 용의 눈물

이렇게 해서 이성계는 500년 조선 왕조의 왕업을 열게 되었다.

조선 왕조

조선 왕조는 한반도 전근대 역사상 우수한 관료 체계와 체계적인 행정 구역, 또한 제대로 된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으로, 조선 초기에는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 막강한 국력을 보여줬다. 태조(太祖)는 고려 말기의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며, 여러 전장터에서 많은 것을 체득했다.

"과인은 전조(前趙 : 이전 왕조, 고려 지칭)의 난세를 겪으면서 깨달았소. 나라가 힘이 없으면 결국 고통받는 것은 백성들이라는 것을."

조선 태조(太祖) 대왕 어진

"따라서 후대의 군주들은, 항상 군사를 조련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지어다."

고려 말기, 이성계의 활약상

조선의 창업자 태조(太祖) 이성계 자체가 '무인(武人)'이었다. 따라서 건국 초기부터 무예를 숭상하는 상무적 기풍이 강했고, 이는 조선 초기 문종 때까지 계승되었다. 조선이 실질적으로 중앙군의 약화 현상이 일어나는 시기가 세조, 그리고 전체적인 상무적 기풍이 쇠해지는 시기는 성종 때이다(유교 정치의 융성기, 사림의 중앙 진출).

창업 군주 태조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의 2대 군주 정종 이방과와, 또한 조선의 3대 군주 태종 이방원 등 이성계의 아들들은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여러 전장터를 누볐었고, 이러한 상무적 기풍은 조선 초기에 태조 · 정종 · 태종 · 세종 · 문종대까지 계승되었다.

특히 조선의 초기 군주들이 주목한 부분은, '군사력 강화'였다.

조선 초기의 중앙군

태조(太祖)는 개국 9일 만에 조선의 문무 관제를 반포하였고, 중앙군을 10위로 개편하였는데, 각 위마다 중 · 좌 · 우 · 전 · 후령을 두어 총 50령을 두었다(1령은 1천여 명). 따라서 조선 개국 당시의 조선이 중앙군으로 보유한 군사력만 해도 총 '5만여 명' 수준이었다.

조선왕조실록, 1397년(태조 6) 기사

정도전은 조선의 중앙군을 대폭 강화 및 고려 때 군사 체제의 전면 수정을 위해 태조에게 자주 건의안을 올렸다. 또한 정도전은 막강한 군권을 쥐어 대규모 진법 훈련을 시행하였고, 변경의 요새 등을 축성하며 방위 태세를 점검했다.

무엇보다도 태조(太祖)의 관심사는 '기병 위주의 중앙군 육성'이었는데, 태조가 고려 말기에 기병을 통한 회전 위주의 전투를 자주 벌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고려 말기, 이성계와 호바투의 접전지(호바투의 4만 기병 격파)

중앙군의 핵심인 갑사는 중기병의 편제였는데, 갑사는 스스로 기마와 복마(짐말), 군장은 물론이고 종자까지 거느리고 왕궁의 시위와 궁궐의 숙위를 담당해야 했다. 따라서 갑사가 되기 위해선 '경제력'이 막강해야 했고, 노비 5, 6 결을 소유한 자만을 입대 조건으로 제한했다.

기병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병종이었는데, 조선 중앙군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갑사(기병 위주의 편제)는 절정에 달할 때 '1만 4천8백여 명'에 이르렀다. 갑사 외에도, 평안도와 함경도에 1만여 명이 넘는 정예 기병이 주둔하고 있었고, 조선 초기 여진 원정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변경을 안정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한편 조선은 중앙군과 지방군을 합해, 도합 30만 명이 넘는 군력과 효율적인 군 체계를 갖추었다. 안타깝게도 조선 초기엔 국가를 상대로 하는 전면전은 없었기에, 조선군의 위력을 실전에서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여진 토벌전에서 5만의 명나라군이 해내지 못한걸 불과 1만여 명의 조선군이 작전을 성공시키는 것을 보면, 조선군의 질적 우수함이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긴 하다(건주 본영 함락 사건, 이만주 참살).

조선 시대 황해도 부방군(赴防軍 :국경 수비대)의 1회 부방 비용

위 표는 조선 초기 황해도 지역에 배정된 부방군의 1회 부방 비용액인데, 왕래 비용과 생활비, 군복무비 등이 체계적으로 짜여졌다.

한편 태조(太祖) 때에는 수군의 양성도 이루어졌고, 세종 때에 절정을 달해 대형 군선을 포함해 함선 총 928척을 보유했다. 하지만 세종 때의 대마도 원정 이후 100여 년 이상 동안 왜구의 침입 횟수가 극감 하면서, 조선은 대형 함선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Hell조선시점이 되는 조선 중기에 그 숫자가 급감했고, 결국 군선들은 세금 운반을 위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렸다(세종 시기 수군 병력 5만여 명).

조선 초기, 조선군 고증(조선 전쟁 생중계, 출처)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6대 선조, 먼터무

조선의 건국과 함께 변경 지역의 여진족들은 조선에 투항하며 스스로 변방의 용병이 되기를 자처했다. 조선 건국 이전에 먼터무(누르하치의 선조)는 태조의 부하 노릇을 하였고(태조와 함께 왜구 토벌에 참여), 먼터무는 주변의 여진인들에게 조선으로 귀순하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먼터무를 아꼈고, 사방에서 여진인들이 조선에 내투하였다.

조선 왕조의 피와 땀이 서린 창업 거점(이성계의 동북면, 함경도 지역)

"동북면 1도(道)는 태조(太朝)가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되어,

야인 오랑캐의 추장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좌우에서 태조를 모시었고, 동쪽과 서쪽을 정벌할 때에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조선 초기 1400년대, 변경 지역의 여진족 세력 범위

조선 태조 시기, 변경 지역의 여진족과 조선의 관계는 괜찮았으나, 태종대 이후로 관계가 틀어지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다(조선의 오도리 학살 작전). 게다가 세종의 이이제이 정책으로 누르하치의 6대 선조 먼터무가 다른 여진족에게 살해당하는 일도 발생한다.

태조는 변방 너머의 여진족들에게 조선인과 결혼 정책을 취했으며, 또한 태조가 은덕을 베풀자, 여진 추장들은 자신들의 아들과 딸을 조선에 인질로 보내 충성을 맹세하기도 하며, 혹은 조선의 벼슬을 받기를 원하였다. 태조는 자주 동북면 변방에 행차했는데, 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들은 앞을 다투어 와서 태조를 뵈어 절을 올렸고 뵙지 못한 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심지어 태조가 사망한 후에도, 후대의 여진족들은 태조 때의 일을 상기하기도 한다.

세종 때 조선의 변방 장수와 술을 마시며 향화 야인이(조선에 투항한 여진족) 취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대국(大國 : 여기선 조선 지칭)의 태조 대왕께오서 변경 너머에 은덕을 베푸니, 사방 천 리의 부락민들이 태조의 덕을 입어 그 풍속이 조선의 것과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태조를 도와 여러 전장(왜구 토벌)을 누볐던 것이 일생 최대의 영광이었습니다."

변경 지역의 여진족들은 스스로 명나라의 초유를 거부하며, 조선에 복종하기를 원하자, 명나라에선 조선이 변경 지역의 여진족을 포섭해 명의 변방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냐며 의심하기도 하였다.

태조 시기 조선과 명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았고,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싼 조선과 명의 숨 막힌 대립이 이어졌다. 조선은 조선대로 변경 지역의 여진족을 포섭해 조선의 용병으로 만들었고, 명은 만주 지역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해 명의 질서 안으로 여진족이 편입되게끔 하였다. 결국 두 강국에서 불쌍한 것은 힘없는 여진족들 이리라.

물론 명의 국력은 조선의 수십 배에 달하며, 조선 8도의 생산력은 중원의 1도(道)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엄중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변경 지역의 여진족들은 신중해야만 했다. 만약 조선보다 더 강한 명에게 붙는다면?

곧바로 조선의 '보복 공격'이 행해진다. 변경 지역의 여진족들은 명나라 사신 왕교화적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었다.

"우리들이 조선을 섬긴 지 20여 년이다. 조선이 명나라와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는데, 우리들이 어찌 따로 명을 섬길 필요가 있겠는가?"

당시 명의 황제였던 영락 대제는 만주 지역에 대한 강력한 군사적 압박을 실시했고, 결국 부족의 생존을 보호받기 위해 변경 지역의 여진족들은 잠시나마 조선의 질서에서 이탈했다. 그러나 태종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고, 크게 분노해 군사를 출정했다. 물론 명의 사전 승인을 받지 않은 조선의 독단적인 출정이었다. 세종 때에도 여진 토벌은 명의 허락을 받고 추진됐는데, 태종은 멋대로 여진족을 공격했다.

"아바마마(태조 이성계)가 우리 조선의 은혜를 미개한 야인들에게 널리 베풀어 그 은혜가 사방 천리에 달했는데, 감히 이 사특한 무리들이 우리의 초유를 거부하고 멋대로 이탈한단 말이냐? 길주도찰리사 조연, 그대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잔멸해 야인 부락을 멸망시켜라."

태종의 명을 받은 조연은 1천여 명이 넘는 정예 기병으로 올량합 여진 부락을 초토화시켰고, 수백여 명의 부락민을 참수하였다. 또한 모련이지휘 파아손, 아고거, 착화, 천호 하을주 등 추장급 인물들이 조선군에게 피살당했다. 이렇듯 약소 민족 여진족들은 조선과 명이라는 두 강국 속에서 고독한 줄타기를 하며 생존을 위해 부단히 움직인 불쌍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누구를 선택하든 그 결말은 좋지 않았다. 다시 태조 때로 돌아와서,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싼 조선과 명의 대립은 치열해졌고, 이것 외에도 명나라 황제 주원장 특유의 의심병까지 도져 조선을 강경히 노려보았다. 심지어 조선이 보낸 사신을 폭행하기도 하였고, 급기야 사신 입국을 불허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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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신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조선 조정에선 설마 명이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냐며 국경 지방에 무기와 군량을 수송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관료들은 군비 확충을 위한 건의안을 태조에게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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