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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왜구 토벌 작전, 대마도 정벌

|||||||||||||| 2020. 10. 4.

조선의 왜구 토벌 작전, 대마도 정벌

고려 시대 왜구 침입로

왜구를 정확하고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왜구는 '일본인 해적'을 의미한다. 한 정부의 명령에 통제를 받아서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군대가 아닌, 그냥 별개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대마도나 일본 본토에 거점을 잡았던 왜구들은 식량이 부족하거나 심심할 때 한반도에 상륙해서 연안 지역에 피해를 줬다.

조선이 나름 대마도 정벌 과정에서 조선군의 피해도 있었지만, 그래도 초기 조선사에 있어서 큰 의의가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다룰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대마도 모습

당시 조선의 기본적인 국방 정책은 '왠만하면 평화로 가되, 필요하면 정벌은 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주로 여진과 왜구에게 적용되는 방식이었다. (명나라와는 실질적 이익을 담보로 한 실용적 사대 관계) 조선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한반도의 새 주인으로 자리잡으면서 여러 대외적 문제에 직면했다. 우선 조선의 북방 국경을 노리던 여진의 위협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나름대로 여진에 대해서 '이이제이' 정책으로 대했기 때문에 별 무리가 없이 북방 국경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아니면 여진이 너무 행패를 부린다 싶으면 대규모 토벌군을 조직하거나 변방 장수에게 토벌 임명권을 부여해 여진족 부락을 공격해 불태우거나 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굵직하게 다루는 임진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선군에 대해서 약간 과소 평가하거나 찌질한 면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물론 그런 면이 중후기에 많이 있었지만, 그나마 초기에는 조선군은 진짜 여진족의 입장에서 '악마'라고 할 정도로 심심할 때마다 국경을 넘어 토벌을 감행했다. 압록강 - 두만강 변경을 넘어 여진족 부락을 불지르거나 여자와 어린 아이를 살해했던 것도 조선군이었고, 이에 대해 여진족이 강력하게 반박해 조선 국경을 침공하면 아예 조선 정부에서 대규모 침략군(수만 명 이상)을 조직해 여진족을 털어버렸다.

  • 태종 : 1만 명의 토벌대로 여진 공격
  • 세종 : 1만 5천여 명의 토벌대로 여진 공격
  • 세조 : 1만 명의 토벌대 구성(이시애의 난 진압 때 활약한 관군 병력)
  • 성종 : 4만 명의 토벌대로 여진 공격

하지만 100~200년이 넘게 지속된 평화기(물론 국경에서의 사소한 충돌은 있었음)는 조선군을 약체로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위용을 자랑한 만주 팔기도 입관(중국 진입)한 지 100년이 지나면서 큰 약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만주 팔기가 말도 제대로 못타고 활도 제대로 쏘지 못하는 약체로 전락한 것이다.

아무튼 어느 나라나 대규모 평화기는 외적에 대한 경계를 느슨하게 만드는 아주 악요인이다.

어쨌든 여진족에 대해서 심심하면 털어버린 나라가 조선이었으니, 그닥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왜구는 좀 곤란했다. 수시로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연안 지방을 노략질하고 바로 튀어버리니, 잡으래도 잡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충청도 해안과 서해안 일대까지 노략질을 하니, 조정에서도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토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생겼다. 당시 세종이 재위하고 있었던 시점이지만, 실질적으론 상왕 태종(이방원)이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때 상왕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왜구에 의해 우리 조선 국토가 유린되고 있는데, 그냥 방관하고 있을 것 인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적극적으로 토벌하자!"

자, 만약 조선 정부가 토벌을 하게 된다면(물론 했지만!) 수군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시 조선 초기 시기 수군의 상태를 파악해보자.

조선 정부는 태종이 실질적으로 집권(재위)하고 있었던 시점부터 수군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태종의 노력으로 1408년(태종 8)의 조선 수군 전함 총수는 '613척'에 달하게 됐다. 그리고 조선 수군의 병력은 세종의 치세에 '49,337명'으로 크게 확충되었다. 약 5만여 명의 수군이 있었던 것이다.

밑에 있는 자료는 조선 초기의 육군의 병력 현황이다.


<조선 초기 병력 현황>

  • 태조 2년 : 200,800여 명(평안 · 함경도의 국경 수비군 제외)
    • 평안 · 함경도의 국경 수비대는 대략 3만 명 내외
    • 태종 3년 : 296,310명
  • 세종 31년 : 191,989명
  • 성종 6년 : 148,449명(수군 포함)
    • 성종 21년 : 158,127명
  • 중종 4년 : 301,280명 중종 18년 : 311,765명

조선 선조 시기 이전까지 도합 병력 30만 명은 유지하고 있었던 조선이었고 실질적 전투 병력인 정군은 18만 명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미 조선 초기의 정부는 국방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고 조선의 초기 왕들과 양반 사대부들의 노력으로 군사의 질은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나름 국방에 대한 중요성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렇듯 육군뿐만이 아니라 수군에 대해서도 각별히 관심을 가졌던 조선 왕조는 태종 때에 '거북선'을 처음 선보였다. 그리고 여러 해상 훈련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하지만 조선이 별다른 대응을 안하고 일단은 방관하니깐 왜구들은 간뎅이가 부어서 그런지 자주 약탈을 하고 더 깊은 내륙 지역으로 들어왔다.

왜구 이미지

1419년(세종 원년) 5월 6일 새벽, 왜구의 선단 50척이 충청도 비인현 도두음곶 해상으로 침입을 감행했다.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정진이란 자는 왜구의 충청도 침입 사실을 즉시 조정에 보고했다.

이때 조선 조정의 입장은 "충청도 전역에 동원력을 하달하고 토벌군을 편성하자!"였고 그리하여 토벌군은 편성되었다. 당시 현지의 수장이었던 충청좌도 도만호 김성길은 왜구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한채로 술에 취해 곯아 떨어진 상태였다.

그때 충청도 도두음곶 해상으로 접근한 왜구의 선단이 바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변을 잘 볼 수 없는 기상 조건을 이용해서 포구까지 바싹 접근했고, 적극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왜구는 조선 수군의 전선 7척을 소각하고 다수의 조선 수군과 조선 백성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이렇게 왜구가 상륙하자 김성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왜구의 선단에 반격을 했다.

하지만 왜구의 창에 맞아 전사하였고 김성길의 아들인 김윤은 용감하게 싸워 왜구 3명을 참살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전사한 사실을 듣고 투신 자살했다. 이렇듯 충청도의 현지 지휘관 부자들이 전사하고 투신 자살하면서 지휘 체계가 무너졌고 왜구는 도두음곶을 손쉽게 점령했다.

 

조선 초기의 궁수
조선군 무장 상태

도두음곶을 쉽게 점령한 왜구, 이때 비인현감 송호생이란 자가 자신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역습에 나섰지만, 보현성으로 퇴각해 버렸다. 왜구가 상당한 병력을 갖추고 대규모로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왜구는 보현성까지 추격하여 포위 공격하였고 쌍방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여기서 보현성 내부의 백성들도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수적 열세로 보현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지서천군사 김윤과 남포진병마사 오익생이 향병을 거느리고 보현성으로 지원을 왔고, 왜구 진영의 배후를 엄습해 습격하고 보현성 내부의 조선군도 나와 응전하면서 왜구는 소소한 전사자를 내고 물러났다.

충청도 군민(軍民)의 노력으로 왜구의 충청도 진입을 차단하였지만, 조선군은 병선 7척을 소실하고 300여 명의 장병이 전사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14 세기 왜구의 약탈을 묘사한 중국의 회화

이 왜구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419년(세종 원년) 5월 13일, 선단 38척을 이끌고 서해도 해주의 연평곶을 기습 공격했다. 연평곶 전면에 선단을 내보인 왜구는 조전절제사 이사검과 만호 이덕생이 탑승했던 전선을 비롯해 조선 수군의 전선 5척을 포위하고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고 한다.
"우리는 조선 침공이 목적이 아니라 중국으로 가다가 양식이 떨어져서 이곳에 오게 된거임. 양식을 주면 물러나마. 네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 와서 우리가 저번( 충청도 침입 사건)에 응전한거임"

그리하여 조전절제사 이사검은 아전을 왜구 진영으로 보냈다. 쌀 5곡과 술 10병을 아전을 통해 왜구 진영으로 보냈지만, 오히려 왜구들은 어린이들마냥 '더 보내줘!'하면서 아전을 억류했다. 이사검이 다시 진무 2명과 선군 1명을 통해 쌀 40곡을 보냈지만, 왜구는 지속적인 위협을 풀지 않고 있었다.

왜구가 연평곶 근처에서 행패를 부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조정은 지원군을 보냈지만, 때마침 풍랑으로 상황이 어려웠다. 일단 조선 조정은 왜구가 육지로 상륙할 수 있는 주요 지점에 지휘관들을 파견하고 황해도와 서북 변경의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당시 조선 조정의 여론은 "도두음곶 사태에 이어서 연평곶에서까지 행패를 부리다니!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자!"였고, 이는 조선 조정의 상황으로 보아 조선과 대마도 왜구와의 전면 충돌은 기정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때 조선은 흉악한 왜인 21명의 목을 베었고 경상도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왜구들을 다른 지역으로 분치시켰다. 여기서 136명의 왜구들이 조선군의 칼에 맞아 죽거나 자살했다.

태종과 세종의 모습 -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1419년 5월 13일부터 조선 조정은 대마도 정벌에 대해 심도있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는 상왕(上王) 태종과 조선의 실질적 군주인 세종, 그리고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 예조판 성허조 등이 참석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본인이 상왕이 되었다지만, 실질적 병권은 태종이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이 대마도 정벌도 태종의 주도 아래 적극적으로 진행했다.(대마도 정벌 논의도 마찬가지) 하지만 여기서도 태종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세종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가 의견 대립을 했다.

강경파(상왕 태종, 좌의정 박은, 병조판서 조말생)   "그냥 무력으로 밀어버리자(for 대마도)!" [공세적 공격]

온건파(군주 세종, 우의정 이원, 예조판서 허조)   "오면 막자!" [수세적 수비]

이렇듯 서로가 격렬한 논쟁을 하였지만, 결국 병권을 가지고 있었던 태종의 강경 대책으로 인해 마침내 대마도 정벌은 결정되었다.

1419년 5월 14일, 대마도 정벌은 결정되었고 조선 조정은 정벌군을 삼군(三軍)으로 편성하여 대마도 정벌의 지휘 체계를 마련했다.

중군(中軍) -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최고 지휘관) 중군절제사 우박 중군절제사 이숙묘 중군절제사 황상 

좌군(左軍) - 좌군도절제사 유습 좌군절제사 박초 좌군절제사 박실
우군(右軍) - 우군도절제사 이지실 우군절제사 김을화 우군절제사 이순몽

대마도 정벌군의 지휘 부서를 편성하고 조선 조정은 하삼도(전라 · 충청 · 경상) 지역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중군절제사 이숙묘를 전라도 광주목사 박성양으로 교체하는 한편, 여러 준비를 하면서 토벌대는 드디어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병력  : 총  17,285명  군량 : 65일 분량(2개월)

전함 : 전라도 59척 + 경상도 126척 + 충청도 32척 + 경기도 10척

5월 18일에 태종과 세종은 두모포(동빙고)의 백사정에서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를 비롯한 대마도 정벌군의 장병들을 위로하는 의식에 참가했다. 중군과 우군은 당일로 원정길에 출발했고 바로 다음날에는 좌군이 원정길에 올랐다.

 

조선군의 경고

대마도 정벌군 총사인 이종무는 대마도주에게 사자를 보내어 비인현 도두음곶과 해주 연평곶에 침공한 왜구의 만행을 규탄, 이어서 그 주동자를 체포해 조선에 압송할 것을 요구하는 통첩을 보냈다. 하지만 대마도주 종정성은 여기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조선 토벌군이 대마도로 항해하는 과정에 있어서 갑자기 풍랑이 닥쳐와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그래도 별다른 피해는 없이 대마도로 근접해 들어갔다. 대마도의 왜구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조선의 함선을 '조선을 침공하여 약탈을 하고 돌아오는 왜구의 선단'으로 오인을 했다.

그렇게 술과 고기를 마련한 환영연을 준비하고 있었던 대마도의 왜구들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조선의 본대가 상륙하자 당황한 왜구들은 대부분 도주했다. 고작 50여 명의 왜구가 잠시 저항했지만, 이들도 도주해버리고 거의 험준한 산골짜기로 도주하여 은신해 버렸다.

조선군의 손실은 없었고 천포만과 두지포를 점령한 다음에 별다른 군사 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때도 조선군 토벌대 총사인 이종무는 대마도주 종정성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했다.

 

이종무 "귀순해(항복해)!"

대마도주 종정성 "..." [침묵]


이종무는 대마도주의 침묵이 끝까지 저항하려는 의도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때부터 공식적인 군사 활동을 개시했다.

일단 일부 조선군은 대마도 왜구들의 출행을 제한하기 위해 해상을 순회하면서 대마도 외곽의 해안을 수색 및 탐색 작전을 벌였다. 그리고 일부는 도내의 주요 통로를 샅샅이 수색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수색 및 탐색 작전 결과, 해상에서는 왜구의 적선 109척을 소각하고 왜구 20명을 도륙했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왜구 104명을 도륙하고 21명을 포로로 붙잡고 가옥 1,939호를 불태웠다. 여기서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출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편 좌군절제사 박실은 니로군으로 상륙해 왜구들이 매복한 고지로 돌진했다. 박실은 여기서 "우리 조선군의 전력이 더 우세하다."라고 하면서 왜구를 과소 평가했다.

그 결과 왜구의 포위망에 휩싸여 도진무 김해, 종사관 한약, 박홍신, 김희, 박무양 등 많은 장교들과 병사들이 전사하는 패배했다. 조선군이 후퇴하자 왜구는 그 후미를 기습 공격해 100여 명의 조선군을 도륙했다. 왜구는 겨우 20여 명 정도만 사망했다. 대마도 정벌의 화려한 이름 아래 감추어졌던 조선군의 패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우군절제사 이순몽과 병마사 김효성이 격전을 벌인 끝에 왜구들을 상당 부분 도륙하고 포위망을 풀어 좌군을 구출했다.

이종무는 이 작전의 실패로 다시 수색 작전에 돌입하여 왜선 15척과 가옥 68호를 소각하고 왜구 9명을 도륙하고 중국인과 조선인 포로 도합 23명을 구출했다. 이렇게 대마도 정벌에서 조선군은 총 2,007호를 소각하고 적선 124척을 불사르고 20척을 노획, 반항하는 왜구 154명을 처형했다.

조선군의 대마도 토벌 경로

비록 왜구는 니로군에서의 조선군을 격파하였지만, 대마도의 수장은 조선군의 규모와 기세에 위축되어 전의를 상실했다. 무엇보다도 조선군이 섬 자체를 봉쇄시키고 내륙(조선) 왜구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식량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조선군은 충분한 식량이 있었고 조선군이 장기전을 수행할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왜구는 항복을 결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종무는 깊은 갈등에 빠졌다.

"우리는 식량도 많고 충분히 장기전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대마도주가 항 복을 선언하였고 무엇보다도 7월이 되면 대마도 일대에 태풍이 불어오므로 이 태풍이 우리 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무작정 장기 토벌전을 수행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겠지."

그렇게 이종무는 대마도를 완전하게 섬멸한다는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여 조기 철수를 단행했다.그렇게 7월 3일에 거제도로 회군하면서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막을 내렸다.

이때 태종은 "날씨로 인해 우리가 여기서 그만두지만, 다음에 또 나대면 10만 대군으로 정벌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여기서 조선 정부는 대마도주에게 다음과 같은 문서를 전달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보낸 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희 대마도주가 우리 조선에게 군신(君臣)의 예(禮)[임금(조선) 신하(대마도)] 로써 섬기면 더 이상 무력을 행사하지 않겠다."

이에 대마도주 종정성은 조선에 시응계도를 사자로 보내어 왜구의 도두음곶 및 연평곶 침공 사건의 조사 결과를 상세히 보고하여 관련자를 처벌했다. 그리고 조선의 요구에 순순히 순종하여 대마도를 '경상도의 일개 속주(屬州)로 할 것과 대마도민을 조선으로 사민(徙民)할 것'을 맹세했다. 조선은 종정성이 순하게 나오자 그에게 '종씨도도웅와'라는 인신을 하사하고 대마주의 지위를 인정해 주었다.

또한 대마도주의 인신이 찍힌 도선증서를 휴대한 왜인에 대해서만 조선에 왕래할 수 있게 엄격한 금지 규정을 두었다. 그리고 대마도가 조선 조정과 연락을 취할 경우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통해 예조에 보고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선의 왜구 토벌 작전인 대마도 정벌은 고려의 대마도 정벌에 비해서 그리 통쾌하지는 못한 정벌 작전었다. 여러 기상 조건의 악화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작전을 불가피하게 변경하여야만 했었다.

하지만 조선의 대마도 정벌로 인해 중종 시기까지 최소한 50여 년은 남해안에서 왜구의 별다른 대규모 침공이 없었다. '50여 년'이면 상당히 긴 세월이다. 게다가 조선의 남해안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교역에 종사하는 민간인들은 걱정할 필요 없이 바다를 항해할 수 있었다. 통쾌한 전투는 아니지만, 대마도가 형식적으로 조선의 속주가 되면서 조선은 일본을 무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종 이후로 조선의 문치가 싹을 틔게 되면서 국방력이 점점 약화되가고 말았지고, 지속적인 오랜 평화기로 조선의 군사력이 점점 약해지면서 삼포왜란·을묘왜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더 나아가 임진왜란을 맞이하면서 조선은 전에 자기들이 무시했던 일본들에게 큰 코를 다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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