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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 133 VS 13 임진왜란 때 미스테리한 전투

|||||||||||||| 2020. 10. 18.

명량대첩, 133 VS 13 임진왜란 때 미스테리한 전투

133대 13 누가 봐도 13이 불리한 숫자이며 만약 싸울 경우 10배나 많은 적한테 필패할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을 할 것이다. 아니 예상할 필요가 없이 필패이다. 그러나 그 예상을 뒤집은 사람이 존재한다.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알 것이다. 바로 대한민국의 존경하는 인물 1위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여러 전투 중 가장 미스터리한 전투가 명량해전이다.

우리는 과연 명량대첩(해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혹여 다른 전투로 인해 역사에서 그 비중이 축소된 것은 아닐까?

승리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본군은 왜 전투가 끝난 뒤 재공격을 안 하고 후퇴를 했을까?

그럼 조선 전쟁사 중 가장 미스터리한 해전인 명량 해전을 알아보도록 하자.

명량대첩, 흔히 우리는 명량해전이라고 알고 있다. 왜 명량해전이라고 알고 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 전법을 사용해서 승리한 한산도 대첩에 가려서 빛을 못 보고 있는 전투 중 하나라고, 물론 명량대첩비 등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명량대첩비

과연 한산도대첩이 이기기 쉬웠을까? 명량 대첩이 이기기 쉬웠을까?

아마 십중팔구는 한산도대첩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생각된다. 물론 어느 싸움이던지 승리하기는 정말 힘들다.(한산도대첩을 폄하하려는 거 아님)

그러면 우리는 과연 명량대첩(해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마 이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명언과 13척으로 일본 대군을 상대했다는 사실과 일자진 전법을, 그럼 우선 명량대첩의 발생 배경

현재의 명량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이라는 힘든 세월을 총 2번 겪게 된다. 한 번은 함경도에서 이일의 모함으로 발생하였고 한 번은 일본의 간첩에 당시 조선 조정이 농락당했기 때문이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일본에서 요시라는 인물이 조선 조정 사람인 김응서에게 일본군(가토 군대)이 부산으로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흘리면서 국왕인 선조가 이순신에게 출진하라는 명을 내리는데 이순신은 이것이 조선군을 유인하려는 일본군의 계략이라고 생각하고 왕의 명력을 불복종하게 된다 그래서 백의종군이라는 세월을 한번 더 격게 된다(첫 번째 발생원인)

여기서 문제는 일본군은 그 당일날 상륙을 했다는 거야 한마디로 이순신을 조선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계책이라는 거다. 이때 한심한 국왕인 선조는 갈수록 커지는 이순신의 힘을 꺾을 때라고 생각하여 한양으로 압송을 시켜서 각종 고문을 이순신에게 받게 했다. 문제는 이다음,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누가 삼도수군통제사가 됐을까??

아마 모두 알고 있을 거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놈이 상관인 게 못 마땅했던 바로 경상 우수사 원균.

원균의 영정

이 원균이 바로 조선수군을 거의 전멸하다시피 일본군에게 패한다. 그 해전은 칠천량 해전이다. 한국민족문화 백과에서는 이렇게 칠천량 해전을 설명한다.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번외지만 이순신 장군의 승리 원동력 중에 여러 학자들은 바로 일본보다 우수한 총통 무기가 있다는 말을 종종 한다. 과연 원균은 총통을 사용하지 못했을까?? 드라마에서 나오는 모습을 상상하지 말기 바란다.(드라마에서 원균을 총통 사용을 혐오스러워한다)

실제로 원균은 칠천량 싸움을 피하려고 하는데 권율의 계속된 압박으로 출전하게 돼서 결국에는 패한다. 이걸 자세히 살펴보자면, 칠천량 해전이 발생하기 전 조선수군은 두 번의 싸움에서 모두 패한다. 본래 원균은 권율의 육군이 안골포를 선제공격하기를 바랐고 권율은 원균의 수군이 먼저 공격하기를 바랐다. 원균이 나름 고심을 했는지 수군의 선제공격은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공격을 하지 못했는데 권율이 원균의 곤장을 치는 등 직접 압박으로 인해서 무리한 출전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내가 원균 옹호론자인가? 이렇게 생각을 할 오해가 있으므로 말을 하는데 난 원균 옹호론자가 아니다. 문제는 칠천량 해전의 패한 원인을 우리는 원균의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알고 있다는 거다. 패전의 책임이 권율에게도 존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장수를 믿지 못한 선조이다. 여담이지만 권율이 칠천량 해전 이후 조언을 듣기 위해 이순신을 찾아온다.

권율

이때 원균이 보유한 삼도수군 전선 160여 척 중 12척만 남고 조선수군 2만 명이 전멸하게 된다. 좌수사 배설이 12척으로 후퇴를 성공한다. 칠천량 해전 이후 가장 멘붕인 사람은 바로 이순신을 모함한 조정의 몇 명의 대신들과 국왕 선조이다. 이순신은 1597년 8월 2일 이런 꿈을 꾸게 된다. 잠시 깼다.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으니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랴 비통할 따름이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23일 선조가 이순신에게 삼도 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는 교서를 내린다. 이순신은 과연 기뻐했을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남은 함선은 11척, 병사수는 200명 남짓, 정말 막막하다. 당시 조정 지원 없음, 단한장의 교서.

칠천량해전도

여기서 이순신은 선조의 교서를 받자마자 의도적으로 해안가로 가지 않고 내륙으로 향한다. 운곡에서 회룡포까지 거리로 환산하면 16일 동안 326.4킬로미터이다. 이렇게 대장정을 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황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자신이 건제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지휘관과 병력을 확충하기 위해서였으며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함이었다. 대략적인 정비가 끝날 무렵에 조선의 국왕 선조는 이런 명을 내린다. 조선수군의 피해가 막심하니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으로 통합하라. 그러자 이순신은 그 유명한 수군 폐지 불가론을 펼친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今身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조선수군은 유지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본격적인 명량해전을 알기 전에 그전에 있던 해전을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는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존재하는데 바로 칠천량 해전 다음 명량해전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틀린 말로 명량해전이 발발하기 전 두 번의 해전이 존재한다.

첫 번째 해전은 어란포 해전이고

두 번째 해전은 벽파진 해전이다..

이를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은근히 중요하다.

어란포 해전에서는 8척의 적선을 발견했는데 조선수군이 겁을 먹고 후퇴하려고 하자 이순신 장군은 장수를 격려하며 총통을 이용해 적들과 싸우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적들이 도망치는데 이순신 장군은 조선수군한테 추격전을 명한다. 여기서 잠깐 일본군의 유인작전일 수도 있는데 왜? 이순신 장군은 무리하게 추격전은 벌인 것일까? 바로 조선수군의 사기를 향상해주려는 모험을 한 것이다. 칠천량 해전 이후 이순신 장군은 적들을 계속 유인해오는데 그로 발생한 해전이 바로 앞서 언급한 어란포, 벽파진 해전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해전에서 조선수군의 사기를 향상할 만한 거리를 찾고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추격전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란포 해전으로 자신을 얻은 결과 벽파진에서 50여 척을 맞이하고도 조선수군은 겁을 먹지 않고 총통으로 대응해 적들을 후퇴시킨다.

여담이지만 이런 말도 있다 승리해본 사람만이 승리의 기쁨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수군에게 그동안 패전으로 인한 상실감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한 추격전을 펼친 것이다. 다행히 매복하고 있던 적은 없었다.

때는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드디어 조선의 운명이 걸린 명량 대첩의 서막이 오른다. 당시 일본 수군의 계획은 목포로 향하는 해류를 타서 전라도로 서진하여 일본 육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제 아무리 이순신이라지만 13척으로 막기는 무리라는 판단) 명량대첩이 발발하기 전날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을 모아서 이런 말을 하게 된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 일부당경 족구천부

이 명언(필사즉생 필생즉사)은 오기가 지은 병법서인 오자를 인용한 것인데, 오자에는 이런 말이 언급된다.

-무릇 병사들은 싸움터의 시체가 뒹구는 곳이다. 죽으로 한다면 오히려 살고 요행이 살려고 한다면 도리 어죽는다.-

즉 이순신 장군은 오자의 행생즉사를 필생즉사로 바꿔 말한다.(다행히 행을 반드시 필로 더 강한 느낌을 주는 단어로 변경)

필사즉생 필생즉사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이 명언은 길이 좁고 험하며, 높은 산이 크게 가로막는 곳에서는 열명이 지키더라도 천명이 통과하지 못한다(십부소수 천부부과). 라는 구절과 이것은 한 사람이 목숨을 걸면 족히 천명을 두렵게 한다라는 구절을 합친 것이다.

다음날 드디어 명량해전의 시작을 알리는 일본 함대 총 333척이 울돌목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일본 지휘부는 우선 133척을 협수로로 진군시킨다. 해협이 워낙 좁기 때문이다. 133척이 진군함과 동시에 조선군과의 일본군의 전투가 시작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패하면 조선의 앞날은 장담할 수 없었다.

일본 수군이 이순신 함대로 향해 진군해 오자 대장선은 각종 화포로 적군이 근접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함선은 적들의 위세에 눌려 조금씩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라우수사라는 김억추는 1킬로미터 정도 물러나 있었다. 이순신은 초요기를 올려 뒤에 있던 함선들이 전투에 참여하라고 격려했으며 점자 조선수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전선을 향해 총공격을 향했다. 특히 이때 적장인 구루시마가 화살에 맞아 바다에 빠졌는데 이를 본 조선수군이 구루시마를 건져 올려 참수시킨 뒤 배 위에 진열해두었다. 포격전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해류가 바뀌면서 조선수군에게 유리한 진열이 형성되었고 일본 수군은 30여 척의 수군을 잃은 뒤 퇴각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맨 앞에 있는 군함이 대장선이고 뒤에 있는 군함은 발만 동동 구르는 아군이며 그 뒤는 군세를 부풀리기 위한 군선으로 가장한 어선이다. 흔히 학자들은 명량해전의 승리의 원동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 일자진
  • 해류의 변화
  • 화포

일자진

그러나 이것도 불확실하다. 다들 알겠지만 아무리 일자진이라고 133척을 막기는 무리가 있다. 바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몇 개의 전선은 대장선과 1킬로미터까지 물러났다는 소리이다. 1킬로미터 생각을 해보자 엄청 길다. 한마디로 전투 당시 일자진은 붕괴되었으며 상당히 난전이 지속됐다는 것이다. 사서에서도 나오지만 조선수군 장군인 안위가 일본선에 둘러싸인 것을 이순신이 직접 구하면서 충파라는 작전을 구사한다 충파는 배로 배를 부수는 전법이다. 당시 판옥선은 왜선보다 몇 배 강도가 강했다.

'일자진의 최대 큰 약점은 한 곳이 무너질 경우 나머지 아군 군함이 포위당하기가 쉽다'

그리고 해류의 변화를 학자들은 주로 주장을 하는데. 이것도 허점이 상당히 존재한다. 전투가 지속되자 해류가 변하여 조선수군이 유리해졌다. 이를 반대로 해적 하면 해류가 변하기 전에는 조선수군이 불리했다는 말이다. 참고로 일본 군선은 배 밑바닥이 뾰족해서 조선 함대 주력선인 판옥선보다 속도에서 월등했다. 또한 일본 수군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일본의 시코쿠의 미야쿠보 지역도 울돌목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조류가 흐르며 물의 속도 또한 울돌목에 못지않다고 한다. 특히 이 지역을 근거로 했던 수군은 구루시마 수군이었다 따라서 명량 해전에 참전한 일본 수군에게 울돌목의 빠른 물살은 그것만으로는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오히려 일본 수군이 울돌목으로 과감하게 진입한 것은 빠른 급류를 이용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방법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화포의 존재를 언급하는데, 이걸 주장하는 학자들은 진정으로 무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군도 대포를 사용했다. 과연 어떠한 요인이 그럼 직접적인 일본군 후퇴에 영향을 미쳤을까? 옛말에 이런 말이 존재한다.

'장수를 잡으면 일백의 군사를 잡는 셈이고 장군을 잡으면 일 만군사를 잡는 셈이며, 왕을 잡으면 그 군사를 모조리 잡는 셈이다.'

일본군 장군인 구루시마가 전투 중 몸이 토막이 내어졌으며,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진 수모를 겪게 되고, 총사령관인 도도 다카도라는 부상을 당한다. 이는 일본군 본대까지 큰 피해를 입을 거라고 생각이 된다.

이 글을 마치며, 임진왜란 해전 중 최대의 미스터리가 바로 이 명량 대첩이다. 모 방송국에서는 명량대첩의 승리의 원동력으로 철쇄 사용설을 언급했으나 당시 상황과 조선의 무기 상황을 볼 당시 그렇게 길고 두꺼운 철쇄를 제작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고 보는 편이 우세하다.

결론적으로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드라마에서 나온 강강술래를 했다는 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이 대첩의 승리의 요인을 명확이 진단 내리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이 해전 이후 일본군의 거취 또한 이상하다. 명량대첩 이후 조선수군은 더 이상 싸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더욱더 서쪽으로 퇴각을 한다. 그럼 일본군의 상황은 어떨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일본군 전선 333여 척 중 파괴된 전선은 30여 척이다 물론 전투 중에 파손된 적선이 100척이라고 해도 아직 200여 척의 파손되지 않은 전선이 존재한다는 점으로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동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이 원인을 명확히 설명하는 학자도 아직 없을뿐더러 나조차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200여 척은 섬을 돌아서 이순신의 배후를 공격하지 안 했으며.. 등등..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일본에게 상당히 무시무시한 영향력은 지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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